자멸 국가 대한민국: 소멸 시대를 넘기 위해
박명림(연세대학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원고를 마무리하다가 막 공개된 정부 통계를 보며 추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2023년 연간 합계출산율(잠정)은 0.72명이며, 4분기는 통계 작성 이래 최초로 분기당 0.6명대(0.65명)로 추락하였다. 서울은 0.55명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저·최소 수준 자체가 불가능한 수치들이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한 0점 대로서 OECD 평균(1.58명. 같은 2021년 기준)의 절반 수준임(0.81명)은 물론 바로 위의 차악 국가(스페인)조차 1.19명으로서, 평균과의 차이(0.77명)는 물론 차악 국가와의 격차(0.38명)도 상당히 큰 독보적인 최악 국가이다. 경제발전은 재빠른 ‘추격 산업화’를 통해 선진국에 도달한 한국이 출산과 인구문제는 어느 나라도 ‘추격이 불가능한’ 인류사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초 자치 단체 중에는 여러 곳이, 수년 전에 0.5명을, 그리고 연전에 0.4명을 돌파하여 우리를 경악하게 하더니, 이번 정부 발표에서는 마침내 0.3명 대에 이른 곳이 추가되었다. (서울 관악구 0.38명. 종로구 0.4명. 광진구 0.45명. 강북구 0.48명. 마포구 0.48명. 부산 중구 0.31명. 대구 서구 0.48명) 서울의 기초 자치 단체 중에서 0.6명을 넘는 곳은 겨우 6곳에 불과하다.
‘이중 악역’, 서울
출산 지표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지방인구의 사회적 강제 유입이 아니라면 서울은 이미 완전 붕괴와 폐허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사회적 요인은 ‘연령대별’ ‘세대별’ 정치·경제·교육·의료를 포함한 ‘인위적’ 유인과 이동 요인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 요인은 항상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붕괴와 소멸을 가속화시켜 끝내는 더 이상 인구 수원지(水源池)와 저수지를 갖지 못하는, 상호 사막화를 촉진할 뿐이다.
게다가 서울은 계속적인 인구유입에도 불구하고 인구 유출과 감소의 규모가 막대하다는 점에서, 이른바 이중의 악역 ― 인구 유입을 통한 지방소멸과, 최저출산 및 인구 유출을 통한 국가소멸 ― 을 수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 악역’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중심 인물들의 놀라운 ‘이중 성격’ ‘이중성’ ‘이중 역할’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들의 이중성은 때로는 너무 모순적이어서 우리를 지극히 당혹하게 한다. 따라서 종종 선을 가장한 악을 당연히 뛰어넘는다. 즉 서울은 ‘사회적 인공적 인구유입’ 역할로 ‘국가적 전체적 인구감소와 소멸’ 역할을 가릴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역할은 셰익스피어의 양면 통찰에 정확히 근접한다.)
지난 10년(2014∼2023년) 동안 서울에서 다른 시도로 전출한 인구는 547만 명이었다. 반면 다른 시도에서 서울로 전입한 인구는 461만 명이었다. 서울에서 다른 시도로 86만 명이 순유출된 것이다. 이는 순유출을 기록한 시도들(10개) 가운데 1위다. 우리는 그동안 지방소멸, 즉 늘 지방에서 서울로의 인구 유출만을 말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서울은 이제 최저 출산율 1위 시도에 이어, 인구 유출도 최대인 것이다. 그중 수도권(경기도와 인천)으로 전입한 인구가 383만여 명으로 압도적이다. (1위 경기도 340만 5천 명. 2위 인천 42만 7천 명)
인구 유출에 이어 서울은 인구 감소율도 1위다. 즉 서울은 지방소멸과 인구소멸에 직면한 지역 지방자치단체들보다 인구감소 속도가 더 빠르다. 2022년 서울 거주인구는 942만 8372명이다. 반면 10년 전 2012년은 1019만 5318명이다. 10년 동안 76만 6946이 감소한 것이다. 같은 기간 17개 지자체의 인구 증감률 중 서울은 –7.5%로 1위다. 부산(-6.2%), 대구(-5.7%), 전라북도(-5.5%), 대전(-5.1%)보다 더 빠른 속도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지방소멸의 한 핵심 요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집중 때문이다. 같은 기간 수도권 인구는 2513만 2598명에서 2598만 5118명으로 85만 2520명(3.4%) 증가했다. 서울 인구는 감소했지만 수도권 전체로는 인구가 늘었다. 특히 경기도의 인구는 지난 10년간 149만 6133명(12.4%)이 늘었다.
인구에 관한 한 서울은 최저 출산율, 최대 유출, 최대 감소율이 모두 1위다. 이제 국가소멸, 인구소멸의 주범은 지방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방소멸은 서울소멸의 인위적 방탄과 방지를 위한 출혈이요 피해의 결과라는 점이 너무나 뚜렷하다. 대한민국은 서울(과 수도권) 때문이 아니라 지방 때문에 그나마 연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선현들은 개인별, 계층별, 성별, 지역별 자원과 권력의 독점과 집중이 어떻게 공화국을 멸망시키는지에 대해 자주 언명한 바 있다. 한국은 정확히 그 사례에 해당한다.
서울의 이중 악역을 보면, 서울과 지방의 인구를 동시에 빨아들여 과거의 서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오늘의 수도권이 머지 않아 서울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리라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지방과 서울의 감소와 소멸상황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수도권도 머지 않아 감소와 소멸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도 당연하다. (서울 0.55명, 경기도 0.77명, 인천 0.69명으로서 수도권 평균 출산율 0.67명은 전국 평균 0.72명보다 크게 낮다.)
예측을 뛰어넘는 현실
인구와 출산에 관한 한국의 통계와 전망은 두 가지 점에서 매번 충격적이고 특징적이다. 자살과 저출산 지표, 두 개가 전 지구에서 최악의 공동 금메달을 차지한 이래 후자는 항상 그러하였다. 하나는 매번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초” ― 즉 최저·최악 ― 이며, 최고의 과학 국가인 이 나라의 “장래 인구 추계와 예측이 항상 오류”일 정도로 악화의 정도와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다는 점이다. 출산과 인구 문제에 관한 한 장래 인구 추계는 예외가 없었다.
최악의 공동 금메달 수상 이후 관련 자료를 접할 때마다 같았다. 2011년 정부의 장래 인구추계에 따르면 10년 후인 2021년 합계출산율은 1.36명이나, 실제 합계출산율은 0.81명이다. 출생아 수도 각각 450천 명 대 261천 명이다. 2016년 정부가 발표한 2022년 합계출산율은 1.26명이나, 실제로는 0.78명이다. 출생아 수는 각각 411천 명 대 249천 명이다. 큰 차이다.
진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 최고의 이 과학 선진국의 현재와 단기 미래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진단과 분석이 크게 틀렸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인간 공동체의 두 가지 현실 변화, 즉 개개인의 선택과 집합적 모습이 인간들의 정교한 전망과 예측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출산과 인구 문제에 많은 예산(2006년 이후 280조)을 투입해도 막아낼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한국이 투입한 규모조차 결코 큰 예산이 아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족 지원 공공지출이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56%인 반면 OECD는 평균 2.29%였다. 게다가 직접 현금으로 지원하는 가족 지원 공공지출은 한국이 GDP의 0.32%로서 OECD 평균 1.12%의 겨우 30% 수준이다. (국회연구조정협의회, 『초저출산 장기 지속 시대의 인구 위기 대응 방향』, 국회입법조사처, 2023). 가족 지원 공공지출은 가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대한 직접 지원이다. 당연히 출산율 제고에 효과가 크다. OECD 국가들 중에 가족 지원 예산이 GDP의 3%를 넘는 경우 합계출산율이 상대적으로 크게 높다.
압축성장, 압축소멸
1991년 세계은행은 산업화를 시작한 뒤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로 성장하는데 걸린 기간에 대한 주요 국가간 거시수치를 비교한 바 있다. (“Periods during which output per person doubled, selected countries”, World Development Report, World Bank, 1991) 영국은 1780년 이후 58년 만에, 미국은 1839년 이후 47년 만에, 일본은 1885년 이후 34년 만에 두 배가 되었다. 한국은 1966년 이후 단지 11년 만이었다. 한국은 선진국들이 걸린 시간의 1/5에서 1/3 정도 밖에 안 걸린 것이었다. (브라질 18년, 인도네시아 17년, 중국 10년)
같은 시기에 세계적인 학자들은 공동 연구를 통해 한국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1988년 기준 1인당 GDP 5000$ 이상) 모두를 이룩한 ‘제1세계’(The “First World”. 강조는 원문그대로) 국가로 분류한 바 있다. (Adam Przeworski, Sustainable Democr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한국에서 민주화를 막 달성한 시기였다. 동시에 한국을 제1세계는 커녕 ‘제3세계’나 ‘(제국주의) 종속국가’로 본, 주사파를 포함한 급진파도 절정에 달할 때였다. 밖은 이미 한국을 제1세계로 볼 때, 한국인들의 일부는 크게 객관적 시각을 상실한 것이었다.
한국이 제1세계로 진입하고 나서 이제 딱 한 세대가 지났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은 압축성장의 속도만큼이나 압축소멸의 속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무비의 선두다. 한국 정도의 압축적 경제 성장을 이룩한 나라는 여럿이지만, 한국 정도의 압축적 인구소멸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는 유일하다. 그 한 세대 사이에 이 나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민주주의와 물질발전을 초단기간에 이룩한 이 번영과 영화의 시기에 도대체 말이 되는가?
한국의 인구문제는 인구감소(減少)를 넘어 인구절벽(絶壁)으로, 인구절벽을 넘어 인구소멸(消滅) 단계로 접어들더니, 이제 인구괴멸(壞滅)과 인구진멸(盡滅) 단계에 접어들었다. 실제로 국회의 한 기관은, 한국의 총인구가 초저출산현상(합계출산율 1.19)이 지속될 경우 최종적으로 2750년에는 대한민국 인구가 소멸할 것으로 전망한다.(입법조사처, 2014) 그러나 반복되는 장래 인구추계 실패를 포함해 이 기관의 기준 출산율은 실제 수치보다 너무 높다는 점에서 한국의 인구소멸 연도는 훨씬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괴멸적 수준의 출산현황이며 진멸적 수준의 인구미래다. 이것은 곧 인간과 나라의 생명소멸이며 생명괴멸이며 생명진멸을 말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이 그 어떤 자연재해나 외부 침략이 없는 번영과 평화의 시대라는 점이다. 밖으로부터 아무도 침략하지도 않았는데 왜 한국의 나라와 국민은 자기들 스스로 인구와 생명을 괴멸적이며 진멸적인 상황까지 몰아넣고 있는가? 전쟁과 빈곤의 시대도 살아남고 일어서고 극복한 한 인간 공동체가 지금 그러한 것들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내부 요인에 의해 자멸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명백히 자멸국가인 것이다. 이 인간공동체의 극적인 붕괴 드라마는 일대 역전과 소생의 흐름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훗날 인류의 참담한 반면 교사로 남게 될 것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대한민국
한국의 오늘을 보며 인류의 한 과거 제국을 떠올려 본다. 인류 역사에서 사상 최고의 제국으로 평가받았던 한 나라의 멸망 원인에 대한 선현들과 석학들의 진단은 한결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들의 진단이, 서로 다른 여러 의견이 아니라, 한결같다는 점에 크게 놀라게 된다. (물론 작은 부분에서는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자연재해?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한 역사시대 들어 빙하를 포함한 거대한 자연재난은 없었기 때문이다. 행성충돌? 당연히 전연 아니다. 그렇다면 그 제국 하나만 홀로 멸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식량부족과 빈곤? 물론 아니다. 그 제국의 발전과 번성은 당대의 정점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외침과 전쟁이다. 과연 그것이었을까? 일단 표면적으로 그 제국의 멸망은 외부로부터의 침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강대했던 제국이 멸망해 간 요인과 과정을 깊이 살펴보면, 전쟁과 외침 역시 단지 마지막 국면에서의 최종 일격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알게 된다. 단순히 하나의 나라를 넘어 최고의 제국이자 문명으로 평가받았고, 문명을 넘어 세계의 표준이요 척도로까지 받아들여졌던 로마의 멸망 요인은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즉 내부 요인 때문이었다.
『법의 정신』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또 다른 명저 『로마제국의 번영과 멸망 원인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causes of the ris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갈등과 분쟁 자체보다는 조화와 균형의 붕괴로 인한 독임과 전제, 그리고 너무 빠른 번영과 영화(榮華)가 로마몰락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온갖 분쟁과 소요를 내전으로 전변시킨 것은 공화국의 번성이며, 로마인들의 자유의 상실조차 제국의 과업을 너무 빨리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우연적이며 계기적인 단기적 사건은 일반적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여러 원인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로마에 대한 몽테스키외의 역설적인 통찰을 따라, 한국 역시 너무 빠른 성공에 너무 빠른 소멸의 요인이 함께 들어있음을 반드시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너무도 잘 알려진 기본(Edward Gibbon)의 대저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는 어떤가? 방대한 그 대작은 로마의 번영과 쇠망 과정을 차례대로 심층 분석한 뒤, 제국 멸망의 원인을 네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지진과 화재, 홍수를 포함한 자연과 시간 요인, 둘째 외부 적대세력들의 침략과 파괴, 셋째 욕망과 쾌락을 위한 자원과 물질의 도용과 남용, 넷째 로마인들의 내부 불화와 적대. 기본은 이 중 네 번 째 것이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파괴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끊임없는 내부 분열과 분쟁을 말한다. 모든 의제와 정책에 대해 진영을 경계로 일체 합의를 거부한 채 사사건건 다투는 오늘의 한국을 연상케 한다. 놀랍게도 그 분열과 파괴를 완성시켜준 것은 ‘법의 전제’(the tyranny of the laws)였다. 법(율법)은 자신도 타자도, 개인도 사회도 화평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본은 잘 알려진 계관 시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를 인용한다.
“로마의 폐허를 보고 그 태곳적 웅대함을 상상해 보시오! 시간의 풍상도, 야만족도 이 엄청난 파괴 행위의 공적을 자랑할 수 없소.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가장 빛나는 아들들이 그 파괴행위를 저질렀으니, 그대의 선조들은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 검으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파성추(破城搥)로 완성했소이다.”
총과 칼이 아니라 나라의 성격과 정책, 불화와 적대로 스스로 파괴행위를 저지르는 오늘의 우리 한국을 향한 추상같은 잠언으로 들린다. 지금 우리는 ‘시민’과 ‘국민’ 이전 단계를 의미하는, ‘지파’·‘부족’·‘진민’(陣民) 사이의 격렬한 진영 분열과 대결이라는 내부 파성추로 인해, 진영 의제가 아닌, 출산·인구·교육과 같은 나라 전체의 공화국 의제는 해법과 길을 잃었다.
‘공화국’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아니라 ‘진영국’ 대한진국(大韓陣國)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소멸과 국가자멸 상황에 접어들었다. 하여,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의 폐부를 찌르고 정수리를 내리쳐야 한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장 25절)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느니라.”(마가복음 3장 24-25절)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누가복음 11장 17절)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근대 정치학을 개창한 홉스(Thomas Hobbes)나 미국의 분열을 방지한 링컨을 비롯해, 나라를 통합하고 보존하고 영속하려는 이론가와 지도자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건설하고 발전시켜온 나라를 스스로 분쟁하며 스스로 파괴하고 스스로 단종하려는 자멸적 파성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대 사회과학의 철학과 방법을 정초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 문제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들어보자. 그가 이해하기에 로마제국은 외부 요인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베버에 따르면 로마는 멸망 오래 전부터 그 자신의 본질과 정수(精髓) 자체가 변질되어 갔다.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외부적 가격으로 갑자기 붕괴한 것이 아니었다. 외부 요인은 오히려 오래 진행돼온 내부 요인에 최종적인 종지부를 찍었을 뿐이었다. 로마 문명은 이미 제국의 외형적인 몰락에 앞서 정점으로부터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즉 문학, 법, 역사기술, 언어, 문화, 기득권층의 타락을 포함한 여러 부문의 복합요인들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서 사회 하층과 농민, 가족, 군대 문제에 대한 베버의 견해에 대해 필자는 의견을 달리하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즉 그가 보기에 (외부 야만의 침략으로 인한) 제국의 몰락 이전에 이미 내부의 야만성이 오래도록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진영 논리 하나면 모든 게 정당화되는 야만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던지는 섬뜩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리가 탐색하려는 고대 문명 몰락이라는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라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지만, 오래된 문명의 내적 소멸이라는, 실로 가장 특이한(the most singular) 역사적 현상의 하나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자멸 국가 대한민국, 소멸의 시대를 넘기 위해
로마가 가장 번성했던 고대 제국의 몰락의 가장 극적인 내적 몰락 드라마라면 한국은 지금 가장 빨리 발전한 현대국가의 가장 극적인 내적 소멸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나라와 의를 먼저 살려야 한다. 한국은 나라가 번영한 이후에도 온통 물질만을 먼저 구하다가 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 교회도 나라가 가난을 벗어난 이후까지 생명과 영혼보다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구해오지 않았는지 묻게 된다.
현대 인구학이 밝혀내었듯 인간 문제로서 출산과 인구문제는 사실 개인 문제와 공동체 문제의 결과이며 중앙이다. 왼쪽에 개인 문제가 있다면 오른쪽에는 나라 문제가 있다. 이 때 개인 문제는 개인이 직면한 삶의 현실을 말한다. 나라 문제는 나라의 성격과 정책을 말한다. 둘이 수렴하는 그 사이 중간에 출산 문제와 인구문제가 존재한다. 즉 출산과 인구문제는 육아, 교육, 취업, 복지, 주택, 부동산, 의료를 포함한 모든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의 총합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복제와 연장의 이기심을 최고의 생물학적 존재 이유로 갖는 생명체가, 사회적·인간적 요인에 의해 개인적인 생물학적 이기심을 죽이는 수준을 뛰어 넘어 국민이라는 종(種) 전체를 단종시킬지도 모를 집합적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과 환경의 상호 작용의 산물인 문명의 발전 단계에 따라 자아실현의 욕구와 수준도 함께 높여왔다. 따라서 문명의 발전과 자아실현의 충족 수준은 병행한다.
즉 문명의 발전 이후에도 공동체 유지를 위해 고등한 자아실현을 포기하면서까지, 과거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 기초적인 생물학적 요구에 부응할 개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것은 이미 인간들의 심리와 선택에 대한 인간학과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물론 정치학의 탐구에서 규명된 바 있다. 본성적으로 자기보존과 자아실현을 우선시하는 인간들에게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가치와 목적도 궁극적으로 개인, 그리고 그들의 집합체인 인간공동체를 지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느 한 순간의 주관적 선택의 누적이 훗날 삶의 객관적 현실이 되어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흠칫 놀란다. 수많은 순간이 모여 거시가 되고, 단기가 모여 장기가 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 또한 한 사람의 선택이 모여 나라가 되고 공화국이 된다. 개인이 모여 나라가 된다.
그 반대는 더욱 진실이다. 즉 나라가 먼저다. 나라가 개인이다. 이를테면 출산율이 어떤 나라는 높고 어떤 나라는 낮을 때는, 개인 문제라기 보다는 사람을 대하고 사람이 놓여있는 나라 요인이 가장 크다. 특히 같은 물질 발전 단계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라의 조건과 상황, 인식과 정책 때문에 그 결과로서 청년들이 출산을 못하고 인구가 감소되는 것이다. 출산이 초래할 자기 삶의 곤고함을 막으려는 선택에 더해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힘든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의지가 결합된 것이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조건과 낳지 않는 결정이 만나서 최악의 출산국가가 되고 국가소멸과 진멸을 말하는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낱낱의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가 되고 나라 현실이 된다. 내가 지금 겪고 보고 듣고 있는, 출산·육아·교육·취업·성평등·복지·노후의 삶의 단계별 비용과 안정성, 예측과 전망이 모두 합쳐져서 나와 자녀 삶의 행복을 고려하여 결혼과 출산을 결정한다. (아이를 못/낳게 하는) 나라가 개인이고, (아이를 못/낳는) 개인이 나라인 것이다. 전체가 부분이고, 부분이 전체인 것이다. 생명과 인간을 다시 회복하려면 먼저 그 나라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의인은 없기에 나라를 바꾸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결국 둘은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