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이 무척 더워졌습니다. 길가의 꽃들은 형형색색 한창인데, 봄꽃의 이른 개화에 많은 벌들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제 이르게 활짝 핀 튤립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긴 어렵겠죠. 지구 곳곳의 동식물이 이상기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재앙인 기후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더욱 고심하게 되는데요. 여기,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고민했던 마법소녀들이 있습니다.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기후 위기라는 재앙을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던 마법소녀들의 이야기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마법소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데요. 새로운 마법소녀의 등장을 환영하며, 오늘의 들불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 알리는 말씀 : 오늘 <번역으로 읽는 여성서사>는 내부 사정으로 4월 30일에 발행될 들불레터 52화에 실릴 예정입니다. 해당 코너를 기다려주셨던 분들께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

👏  들불이 만난 이야기
  •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박서련
  • 『요술봉과 분홍 제복』, 사이토 미나코 저/권서경 옮김
위 : 달의 요정 세일러문
아래 : 웨딩피치  
구구's comment!
   저는 <세일러 문>, <웨딩 피치>, <마법기사 레이어스> 등을 보며 마법소녀의 꿈을 키웠던 어린이였습니다. 마법소녀들의 화려한 변신 과정과 마법,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어찌나 멋져보이던지, 저도 언젠가 그들과 같은 마법소녀가 되어 정의를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가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정글짐을 오르내리며 나름의 수련(?)을 하고 나만의 마법 동작을 만들곤 했죠. 웨딩피치 천사의 부케와 천사의 크리스탈 장난감을 손에 꼭 쥔 채, 저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요.
   최근 유튜브에는 제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들을 한 시간 내외로 볼 수 있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추억에 젖은 저는 그 중 몇 편을 보게 되었는데요. 만화 속 그들은 여전했지만, 저는 이미 많은 세월을 지나왔기에 더 이상 그 때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긴 힘들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화려하지만 짧고 불편한 변신복, 연애와 결혼이 중심이 된 서사 등 지금의 제 가치관과 맞지 않는 장면들이 많더라고요. 그럼에도 유년기를 함께 했던 그들에 대한 애틋함과 그들로부터 배운 우정과 용기의 힘이 떠올라 잠깐 마음이 부풀기도 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박서련 작가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성인이 된 우리가 공감할만한 현실적인 마법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마법소녀물의 일부 설정을 가져온 '마법소설'입니다. 저처럼 마법소녀를 좋아했지만 더 이상 마법소녀물에 몰입하기 쉽지 않은 분들께 이 책을 강력 추천합니다 🤗

  • 줄거리
   주인공 '나'는 스물아홉살의 어느 새벽, 마포대교 위에서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나'가 죽기로 마음 먹은 건 냉장고 때문이었는데요. 냉장고를 할부로 산 이후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은 '나'는 할부금을 갚지 못해 신용카드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고, 이 때부터 빚에 허덕이게 되었죠. 그리고 결국 갚지 못한 삼백만원 때문에 마포대교 위에 오르게 됩니다. 한참 갈팡질팡하다가 이제 막 마음을 먹고 뛰어드려던 그 때, 택시를 타고 등장한 여자가 '나'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라고 말이죠.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 간사 아 로 아'라고 적힌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예언의 마법소녀라고 소개한 여자는 자신의 마구(具, 마법 도구)인 아로아미러에 주인공이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는 증거가 있다고 말하고, 장차 세상을 구할 마법소녀가 '시간의 마법소녀'이며 그 소녀가 바로 '나'라고 말합니다.

   '나'는 아로아의 말에 다소 혼란스러워하지만, 할아버지의 금은시계방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재주로 시계 디자이너를 꿈꿨던 과거를 떠올리며 마법소녀가 자신의 '천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각성하는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그리며, 인류에게 처한 재앙을 해결하기까지의 고난을 그립니다.

  •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의 설정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는 기존의 마법소녀물과 전혀 다른 여러 설정들이 등장하는데요. 책의 설정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기존의 마법소녀물과의 차이점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 설정 1.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의 존재
   마법소녀물을 보면서 소녀들의 격투로 인해 발생한 주변 피해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마법소녀들이 다칠 때마다 그들의 치료비를 걱정한 적은요? 또, 각종 조합과 단체들처럼 마법소녀에게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책 속 세계는 외계 행성이나 다른 시간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닌 한국의 지금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마법소녀물과는 조금 다른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즉, 마법소녀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시스템을 고려한 설정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의 중심에는 바로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이하 전마협'이 있습니다.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는 전마협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법소녀들에게는 복잡한 일이 많이 있어요. 가령 활동 과정에서 일어난 기물 파손의 책임 소재나 보험사의 가입 거절 문제 같은 것들 말이죠. (...) (법정대리인인 성인 보호자가 있는 미성년자와 달리) 성인 마법소녀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해요. 그래서 연대체가 필요했죠."

🧙 설정 2. 특이한 마구(魔具, 마법 도구)
   보통 마법소녀물하면 요술봉 또는 장신구나 화장품 형태의 무기들을 떠올리곤 하는데요. 책 속 세계에서 주인공이 가지게 되는 마구는 여타 마법소녀물과 매우 다릅니다.

   마구는 마법소녀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상징물이자 마법소녀의 각성과 변신을 도와주는 마법의 '의지'입니다.  한국 최초의 마법 소녀이자 제작의 마법소녀인 전마협 의장 연리지의 도움으로 주인공은 마구를 갖게 되는데요. '마법소녀의 마음의 모양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출력된' 마구는 놀랍게도 주인공의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진 신용카드 모양입니다(!) 놀랍고 웃긴 모양새지만, 후에 발현된 주인공의 능력을 보면 마구가 신용카드 모양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답니다 🤣

🧙 설정 3. 마법소녀 직업 박람회
   '나'는 아로아에게 '마법소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묻습니다. 이에 아로아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데요. 그 곳은 놀랍게도 '직업 박람회'입니다. 아니, 마법소녀의 직업은 마법소녀 아니야?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기존의 마법소녀물에서 마법소녀는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명을 직업이라기보단 운명으로 받아들이는데요. 마법소녀의 운명이란 분명 멋지고 근사해보이지만, 그것이 현실을 살아갈만한 돈과 자원을 제공해주지 않고, 노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마법소녀는 인류를 구하는 동시에 마법소녀 본인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직업'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마법소녀는 현상금 헌터, 마법소녀 경호원, 마법소녀 학원의 강사 등 다양한 파생 직업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 그 외 설정들
- 유튜브로 입장 발표하는 마법소녀
   기존의 마법소녀물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는 마법소녀 또는 악당은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자하는 말을 내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이제 마법소녀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자신의 힘을 보여줍니다.

- 기후 변화의 모습으로 다가온 인류의 종말
   과거 마법소녀물에서 종말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계의 존재가 분노하여 발생하는 것이거나 사랑의 전사(또는 천사)에 대항하는 존재, 즉 악마가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일념 하에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는데요. 이 책에서 인류의 종말은 대마왕도, 외계인도 아닌 바로 '기후 위기'입니다. 

  • 마무리하며 (feat. 작가 노트)
   작가 노트에서 박서련 작가는 「세일러 문」 신드롬을 이야기하며, '마법소녀 장르에 덧씌워진 오랜 오해를 결부하여, 소녀적인 것은 '덜 중요한 것'인가? 실체적이지 않은 것인가? 즉 '소녀적'인 세계는, '세계'가 아닌가? 소녀들의 세계는 향긋한 느낌과 예쁜 이미지와 달콤한 환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피와 땀으로 표상되는 짭짤하고 씁쓸한 세계와는 무관한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적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웹툰 「매지컬 고삼즈」와 같은 현실 인식이 성숙한 마법소녀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본인 역시 이 작품을 쓰기에 이르렀다고 말하죠. 

   성인이 된 우리가 마법소녀를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와는 분명 다를 겁니다. 고달픈 현실 앞에서 마법소녀 같은 건 다 잊고, 매일을 그저 살아가느라 바쁜 사람들도 많을거고요.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 '마법' 은 현실을 잘 모르는 해맑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사치이자 철 없음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마법소녀물의 영향력에서 자란 우리가 언제든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마법의 힘이 성인이 된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지 설명하며 마무리합니다.

   저자의 말을 따라가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도 마법의 힘을 아직 각성하지 못한 마법소녀인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과거 우리가 선망했던 마법소녀들의 힘만큼 거대하고 화려하진 않더라도, 세계를 위하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근사한 마법의 힘을 가진 선량하고 윤리적인, 그런 마법소녀 말입니다.

"자신을 마법소녀로 여기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 그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마법소녀-되기에는 유년기 문화적 자산으로서만이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유효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마법소녀들은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끝없이 사유하고, 본인에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개인적 편의만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제안이 '참여 가능한 환상'으로서 수용되기를 기대한다. 당신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기를. 당신은 종말론만 있고 맞서 싸울 이는 없는 이 암울한 세계를 밝힐 촛불이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요술봉과 분홍 제복』, 사이토 미나코 저/권서경 옮김

   『요술봉과 분홍 제복』은 앞서 소개한 책과는 조금 결이 다른 책인데요. 이 책은 애니메이션과 아동용 위인전집의 여성 주인공들이 시사하는 여성상을 고찰하며, 제가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포함하여 '소녀 왕국'으로 대표되는 작품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와 대조되는 '소년 왕국'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먼저 소년 왕국은 국가를 배후에 둔 채 이질적 존재를 배척하는 전쟁을 벌이는,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군대이자 여성 대원에 대한 성희롱이 난무하는 세계입니다. '욕실 엿보기'라는 저질스러운 행위가 훈훈한 개그로 통하는 그런 곳이죠. 반면 소녀 왕국은 연애지상주의가 만연한 곳으로, 사적인 친한 친구 무리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전투하며, 비과학적인 마법을 사용하고, 눈물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는 곳입니다. 또, 소녀 왕국의 여주인공은 변신을 통해 성인 여자로 변하는(또는 성인 여자의 외양을 흉내내는) 과정을 거치며, 그들의 세상은 별자리 운세, 패션, 연애 콘텐츠를 제공하는 여성잡지 속 세상과 비슷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처럼 애니메이션 속 마법소녀와 소년 전사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애니메이션이 만든 왕국은 완전히 성차별적이며, 여자아이들에게서 주체적 힘을 앗아갔고, 여자의 목표를 연애와 결혼으로 고정하여 다양한 선택지를 제거하였습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권서경 번역가는 현대의 애니메이션 역시 성차별적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하는데요. 이렇듯 현대물이 기존의 마법소녀물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뿐 아니라 절망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과거의 소녀 왕국을 보고 자란 우리가 이제 공주님이 되기를 거부하고 주체적인 의지와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책을 통해 소녀 왕국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고찰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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