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83회 (2022.12.14)

반갑습니다. 이따금 희곡과 소설을 쓰고 그보다 더 이따금 번역을 하는 고영범입니다. 원고를 의뢰받았을 때 이 시집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처음 읽은 건 일 년쯤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집 한곳에 책꽂이를 크게 짜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이사시키면서 배치에 대해 궁리하다가 다시 살피게 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책꽂이에 책을 배치하는 원칙은 다들 제각각일 겁니다. 분야별, 장르별로 나눈 뒤 다시 저자의 이름 순서로 나누는 방식도 있을 것이고, 시대순으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친구 중에는 오로지 크기와 색상에 근거해서 나눈 뒤 보기좋게 꽂아놓는 이도 있는데,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제가 좋아하던 어떤 시인은 서로 사이가 좋을 것 같은 책들끼리 나란히 놓는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생각이 많이 다른 책들을 나란히 놓는 건 비인간적인 처사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두었다가는 밤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게 그 양반의 얘기였습니다. 저도 한동안 이 방법을 흉내내다가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서가에 안 읽은 책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을 때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어찌해볼 수가 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그리 대단한 규모도 아닌 제 서가는 ‘장르별—국가별—시대순—알파벳순’으로 무미건조하게 정리됐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서가를 새로 짜서 책들을 옮기는 동안 다시 한번 단란하고 사이좋은 책장을 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작품집들만이라도 그렇게 해보자 싶어서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 시집이 덜컹거렸던 겁니다.

나희덕 시인은 아시다시피 서정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전혀 부드럽지 않고, 사소한 깨달음을 향해 감탄사를 뿌리며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성깔 있고 매끄럽지 않은 시들이죠. 나시인이 낸 이전의 시집들을 다섯 권 가지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는 시집들의 무더기에서 망설여가면서 황동규-정호승-정현종-정희성 다음에 두었습니다. 그 옆으로는 단 한 권의 시집만 낸 성석제-성원근-기형도를 꽂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면 다른 자리를 찾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최근에 나온 이 시집, 『가능주의자』입니다. 이 시집은 나시인이 자서에 썼듯이 이전에 낸 여덟 권의 시집들과 마찬가지로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 곁”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러나 어딘가 좀 다릅니다. 이 시집의 어떤 시들은 브레히트나 김남주, 케테 콜비츠의 옆에 놓여 있는 게 더 평화로울(아마도 매우 치열한 평화겠죠……) 것 같고, 어떤 시들은 당분간 혼자 두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고영범 번역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묻다 (나희덕, 『가능주의자』)

 

묻어도

너무 많이 묻었어요

여기는 죽음의 무진장이에요

캐도 캐도 시체들의 잔해가 자꾸 나와요

 

얼굴이 반 이상 잘려나간 시체도 있어요

엄마는 아들을 몰라봤지만

어쩐지 그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해요

 

40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은 자식이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묻어주고 가야 할 턴디,

눈 못 감는 엄마가 여기 있어요

 

시체들을 실은 비행기는 바다로 갔지요

군인들은 시체를 철로 된 레일 토막에 묶은 뒤

천으로 싸서 바다에 던졌어요

바닷바람에 떠오르거나 밀려오지 않도록

 

잠수부는 말합니다

시체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힘이 영혼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바다는 기억하고 있어요

철이 붉게 녹슬고 따개비로 덮인 뒤에도

작은 단추 하나가 썩지 않고 남아서 말해주기도 합니다

살육은 어떻게 은폐되는지

결국은 드러나는지

그 단추는 누구의 옷섶에서 빛나던 것일까요

 

제발,

더는, 묻지 마세요

 

묻어도

너무 많이 묻었어요

여기는 죽음의 무진장이에요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무진장이에요

시의 해설처럼 들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고, 이 시의 화자가 지쳐 있는 것 같다는 말은 먼저 해야겠습니다. 화자는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들은 이야기, 본 것들만 가지고 전반부를 채웁니다. 그러나 그가 보고 들은 것들 중 선택한 내용들이 이미 어찌할 수 없는, 묶여 있고 고정되어 있는, 남들 맘대로 다 끝낸 것들이라서, 우리는 화자가 사용하는 마침표 없는 존대어가 지쳐서 낮아져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곧바로, 썩지 않고 남은 작은 단추 하나를 가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맙니다. 케테 콜비츠가 가지고 있던 태도가 느껴지는 대목이고, 브레히트가 주목하던, 김남주가 폭발시킨 태도죠.

이 시를 읽는 동안 잠시 ‘이게 어느 학살을 말하는 거지?’ 하는 혼란이 스쳐갔습니다. 40년 전이라고 특정하고 있는 구절을 봤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잠수부’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바로 세월호를 떠올렸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죠. 너무 많은 학살, 버려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시 앞뒤로 장기수, 이덕구, 남영동 사건의 희생자들,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포스트 박준, 고명재 시인의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영범 번역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이별의 시점 (나희덕, 『가능주의자』)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헤어진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척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헤어진 척하다가 결국 헤어진 사람들도 있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무심코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결혼에서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법원에 접수된 서류와

그가 마지막으로 열고 나간 문의 침묵 사이에는

꽤 긴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길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못 본 척 스쳐가는 몇 초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고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순간이었지만

아릿한 슬픔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고

 

종이 위의 결별과

길 위의 결별 사이에는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이 들어차 있는지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변명

때늦은 사과의 말

예의란 헤어진 뒤에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손에서 으깨진 나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찢긴 날개에 대해서는

진액과 인편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에 대해서는

그날의 나비와 오후의 햇빛에 대해서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전을 뒤져 “진액관 인편”에서 ‘인편’의 뜻을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짐작은 갔지만 정확히 보고 싶었습니다. 鱗片. 비늘의 조각. 또는 비늘 모양의 얇은 조각. 한때 빛나던 이것이 지금은 손가락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아주 선명했습니다. 과거의 빛나던 어떤 순간이 그렇게 보이는 순간이 아마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한테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첫 행으로 돌아갔습니다. 시를, 아주 산문적으로 열어주고 있는 구절. 이 건조한 질문은 뒤에서 다시 한번 독립된 연을 구성합니다. 이 질문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고, 이 두 번의 질문을 계기로 화자의 마음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집니다. 아니, 이런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 행으로 구성된 또다른 연. “결혼에서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다른 질문과 마찬가지로 물음표 없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역시 없습니다. 그리고 방향 없는 진술들은 마침표를 부여받지 못한 채 떠돕니다. 사실 나희덕 시인은 마침표를 무척 아껴서 사용합니다. 어림이지만, 마침표를 사용하는 시를 다 꼽아봐야 열 편에서 스무 편 사이일 겁니다. 그런데 이 시는 생각의 흐름이 툭툭 끊어져 있어서 그 끊어진 끝을 동여매는 마침표가 없는 게 유난히 의식됩니다.

이 시 다음에는 두 편의 시가 더 이어집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들은, 시집의 구성으로 보자면, 시인이 여행에서 돌아온 곳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저는, 당분간은 따로 떼어둬야 할 것 같은 이 세 편의 시를 읽으면서 ‘어른의 시’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이 시들에는 살아온 현실과 그 안에서의 사건들이 있고, 그 사건들에 밀착해서 그것들을 현실적으로 감당하고 관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떨어져서 세상의 다른 일들을 바라보듯이 바라보는 눈이 있고, 그리고 그것들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그러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 무거운 입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입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렇습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으로 독자분들을 찾아온 고명재 시인입니다. 사랑을 쥐고 용감하고 겸허하게 시를 써내려가는 시인이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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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눈썹 시를 읽고 투명 망토처럼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몸의 은신처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도 살짝 숨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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