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흔들림을 수용하는 갈대 (reed) 리드예요. 한국은 무척 덥다고 들었는데,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지금 체감 온도 40도에 육박하는 뙤약볕의 비포장도로를 걷고 있는 중이에요. 

구글 지도를 확인해 보니 오늘의 목적지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이 남았다는군요. 아득한 시간에 잠깐 절망했지만 숨을 후- 내쉬고, 무거운 배낭을 고쳐 매고, 조용히 염불을 외우며 다시 길을 나섭니다.

"인절미 빙수, 우렁쌈밥, 에어컨, 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의 쾌적한 침대…" 

한 달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는, 너무나 그리운 한국의 것들이에요. 아! 한국에선 왜 이들의 소중함을 몰랐을까요...

산티아고, 생각의 길

📱내 손에 쥐고 싶은 것

순례길을 걸으면서 인상 깊었던 몇 장면들이 있어요. 휴식을 취할 겸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읽고 계시던 할머니 순례자, 숙소 로비에서 한참 동안 수첩에 글을 써 내려가던 청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도 프랑스에 들렀는데, 파리 뤽상부르 공원에서 오케스트라에 맞춰 다 같이 손뼉을 치며 평화롭게 음악을 감상하던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나요. 

마치 '스마트폰'이라는 매체가 출시되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 듯,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죠. 

이런 장면들을 마주하며 저는 굳게 다짐했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우선 핸드폰부터 바꾸겠다고요. 폴더폰이나 슬라이드폰, 즉 카카오톡은 가능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핸드폰으로 바꾸겠다고 말이에요. 진짜 내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책이었고, 인터넷에 뺏기는 신경을 주변 풍경으로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전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순례길에 와서야 굳게 다짐하게 되었네요. 

Tip) 꼬박 한 달을 걷는 순례길이기에 배낭 무게를 줄여야 해서 이북 리더기를 챙기지 않았는데, 가장 후회되는 지점이에요.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휴식 시간에 읽기 좋은 책 한 권, 또는 이북 리더기를 가져가시는 걸 추천해요! 

💡순례길 역시 선택의 기로

순례길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제 체력을 과신해 첫날부터 스틱을 버렸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발목이 살살 아파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머리로는 쉬어야 함을 알았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함께 저녁을 먹던 동행인들과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저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찔리는 듯한 통증을 겪은 이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하루를 더 쉬게 되었답니다. 

  

한국에서도 저는 제 자신을 자주 혹사시키는 사람이었는데, 외국에 와서도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몰아치다가 후유증에 빠져버려서 참 서러웠어요. 역시 순례길을 걷는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군요! 아픈 발목을 끌고 쉴 수 있는 마을을 찾아가며 생각한 건 단순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더 오래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하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저를 달달 볶을 때마다 마음 한켠에선 '이러다가 또 중도에 쓰러지는 거 아냐?' 하는 우려가 늘 존재했거든요. 꼬박 한 달을 매일 걷기 위해 80%의 에너지만 써야 하는 순례길처럼, 제 남은 인생도 소진하지 않고 현명하게 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Tip) 순례길은 장기전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약을 처방해가요.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소염제, 항히스타민제, 그리고 트래킹용 스틱! 자신의 몸을 잘 살피면서 걷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일상도 그렇게 갑시다!

🥾어느덧 3주를 남기고

먼저 순례길을 다녀온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도착지를 하루 남긴 날엔 너무 아쉬워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울려나' 싶었는데, 벌써부터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현실의 많은 것들에 속박되지 않은 채 걷는 지금의 저는, 걸으면서도 훨훨 나는듯 합니다. 한 번도 이렇게 오래도록 평온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