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일까 노력일까

성질 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영화 대 영화 김경식 씨 톤으로 안 읽는 법 있는지). 그래서 좋게 말하면 과감 나쁘게 말하면 섣부른 판단을 자주 내리고는 하지요. 그 와중에 생각 없이 정하기는 싫어서 몰아서 벼락치기식 고민을 많이 합니다. 갑자기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더니 나 퇴사하기로 했어, 17시간을 꼼짝 없이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헤어지기로 했어,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쿠키런만 하더니 취직을 해야겠어, …

저게 저의 취업 스토리입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날 쿠키런을 하던 중 벼락같이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당장 사람인(잡코리아였을까요?)을 켜고 ‘출판사’를 검색해서 첫 페이지에 뜬 곳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그게 아마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 26일 정도였을 겁니다. 이틀 뒤 면접을 봤고 사흘 뒤 1월 2일 첫 출근을 했으니까요. 알바도 그보다는 신중하게 고를 텐데 제 동생이라면 등짝을 퍽퍽 두 대는 때렸을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출발한 사회생활은 10년을 꽉 채워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로 11년차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핸들이 고장난 에잇톤 트럭 중에서도 제법 오래 달리고 있는 중 아닐까요… 아니 이젠 고장난 핸들에 익숙해져서 멀쩡한 차를 운전하라고 하면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1월 1일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돈 많이 벌어오지는 못하는 중

  

트럭 하니까 떠올랐는데 얼마 전 또 소소한 이벤트를 저질렀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운전 면허 따기인데요. 대충 이 기간과 이 날짜를 이용하면 학원 세 번만 가고 딸 수 있겠다 싶어서 바로 몸이 튀어나갔습니다. 합격하기는 했는데, 10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익 시험을 쳤던 때와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토익 성적하고 영어 실력은 아무 상관 없구나. 면허 시험 성적하고 운전 실력은 아무 상관 없구나.

하지만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계획한 대로 학원에 세 번 가고 땄고, 운전학원에 다녀온 날마다 바로 뻗어서 기절했고, 그게 양주까지 실려갔다 온 탓인지 운전하느라 긴장한 탓인지 모르겠고… 혹시 빠르게 면허를 취득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스케줄을 참고하십시오. 북부, 서부 수도권 직장인에게는 최단 시간을 투자해서 취득이 가능한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 가까운 면허시험장에서 필기시험 미리 치고 강북삼성운전면허학원 등록하기
  • 양주행 학원 셔틀에 몸을 싣고 학원 가서 장내기능교육 4시간+학과교육 3시간+장내시험 치기 (Tip! 학원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10시간을 꼬박 굶고 싶지 않다면 간식 꼭 챙겨가기)
  • 두번째 양주행: 도로주행교육 3시간
  • 마지막 양주행: 도로주행교육 3시간+도로주행시험 치기 (이때도 간식 꼭 챙겨가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외할머니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험 끝나자마자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할머니 나 운전면허 합격했다~~~! 대기실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고등학생들이 많았지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깔깔 웃더니 “너한테 어려운 게 세상에 어딨냐, 우리 ##가 못하는 거는 어디 있고, 안 되는 거는 어디 있겠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못하고, 안 되고, 어려운 것들이 수도 없이 머리 속을 스쳐가서 대가리 터질 뻔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외할머니에게 저는 그런 존재가 맞기 때문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지요…


일견 맞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재능이란 뭘까요? ‘노력도 재능’이라는 말이 한때 화제였고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명제에 동의하는 듯합니다. 노력도 재능이 맞다면 저는 아주 쓸모 있는 재능 하나를 타고난 셈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뭔가를 시작하는 재능, 웬만하면 한번 출발한 관성으로 시작한 뭔가를 그만두지 않는 재능.

일단 몸이 먼저 나가는 성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인생이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한번에 안 되고 또 하는 게 낫지, 원샷 원킬을 위해 준비만 오래 하는 건 정말 성미에 안 맞아요. 계속 잔잔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를테면… 꾸준히 CPU를 잡아먹는 어떤 프로그램을 계속 켜놓고 있기 싫은 마음과 가깝습니다. 그리고 섣부른 도전에는 가끔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기 때문에 그것까지 고려하면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식입니다. 결국 성질 급하다는 소리인데 길게도 하죠?

여기에 더해 깊은 생각, 상상, 공상, 차분한 고민 같은 걸 잘 못합니다. 어릴 때부터 눈 감고 반성하라고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딴 생각이라도 한다는데 딴 생각조차 안 나더라고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누군가 “무슨 생각해?” 물으면 “니 죽이는 생각”이라는 대답 밖에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니 죽이는 생각도 결국 니 생각♥

  

타고난 성격은 아니고 원래 성격이 싫어서 혼자 성격 바꾸기 훈련(?)을 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을 아시나요? 거기엔 생각만 너무 많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미쳐버린 ‘골방 철학자’라는 아저씨가 나오는데요. 열 살 때쯤 그 책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나 잘못하면 이 아저씨처럼 되겠네.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아차린 과거의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아직도 엑셀 파일 열고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 여행의 큰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백날 천날 계획만 짜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거라고 생각하면… 뭐 그래도 잘했다고 해줘야죠.

이제 절대로 어린 나이는 아닌데 가끔은 제 앞에 남은 세월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길어지기만 할까요? 물론 우리 할머니는 100살 넘게 살 거지만. 아무튼 막막한 시간 앞에 무릎이 꺾이려고 할 때 이 재능은 저에게 힘을 줍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빠르게 시도하고 아니다 싶으면 또 몸부터 튀어나가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진짜 이거 믿고 버팁니다.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생의 막막함에 비하면 이건 귀여운 반복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또 한 주를 시작하고 보내야 제 앞에 남은 세월이 조금이나마 짧아질 테니까 오늘도 힘내서 꿀잠을 자볼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평온한 밤 보내시길. 안녕!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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