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아티스트들에게 띄우는 딥한 러브레터

❇️ 질러 놓은 뒤 실행하는 여정의 끝엔

유튜브에서 부디 삭제되지 않길 바라는 라이브 연주 영상을 공유해봅니다. 토시코 아키요시는 일본계 미국인 재즈 피아니스트로, 1929년생, 현재 나이 만 92세의 살아있는 '재즈계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입니다. 기모노 차림의 여성이 50년대 미국 TV쇼에 출연하여 현란한 연주를 펼치는 이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경이로움으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습니다. 재즈를 듣기 시작한 이후로, 여성 플레이어의 라이브, 게다가 이토록 테크니컬한 연주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음악을 좋아한 후로 유독 친해지지 못한 장르가 있다면 재즈였습니다. 이 장르 저 장르 간잽하기를 즐겨하던 저에게 재즈는 끝까지 서먹한 친구의 친구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겸연쩍을 것 같던 재즈와 말을 트게 된 건 뜬금없게도 한 포스터 때문이었습니다. 올해 초, 저는 발품을 팔아 서울에 내 한 몸 누일 전셋집을 구하고, 계약 및 대출 등 각종 상담과 서류를 챙기는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립'이라는 키워드는 그런 모든 발동동의 역사를 오로지 혼자 떠안아야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달 수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 배지 같았습니다.

그나마 고통의 과정 속에서 기운을 내 볼 수 있었던 때는 '오늘의 집' 앱을 켜고 거실 인테리어를 꿈꾸며 아이템들을 닥치는 대로 스크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각종 형태의 쉐어하우스와 비좁은 원룸 몇 군데를 지나 서울살이 처음으로 '내 거실'을 갖게 될 예정이었던 저는 거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자리에 둘 액자 고르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거실 한 면의 아트월이 그레이라는 이유로 톤다운 된 모던한 컨셉을 잡고, 포인트가 될 액자를 찾기 위해 스크랩을 거듭했죠. 



그렇게 픽하게 된 작품은 앙리 마티스의 미니멀한 전시 포스터였습니다. 단지 포인트가 되는 블루 컬러와 'JAZZ' 텍스트가 다인 디자인이었죠. 그전까진 재즈와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의 일상에 재즈가 형태적으로 비집고 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재즈가 흐르는 집이 되리라는 선언이기라도 한 듯 거실 한켠에 들여놓은 액자로부터 재즈 삼매경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르 탐닉 와중엔 늘 그래왔듯 그 장르에서 저명한 여성 아티스트를 찾고 싶어지게 마련인 저입니다. Bill Evans, Chet Baker, Keith Jarrett, Eddie Higgins, Ahmad Jamal 등 유명한 연주자들의 앨범을 밤낮으로 들으면서도 여성 재즈 플레이어를 알고 싶어 부족한 재즈 지식으로 찾아 헤맨 끝에, 오늘의 영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고, 계획에 없던 보람이었죠. 

이 값진 라이브 영상 하나를 만나게 되기 위해 뜬금없는 이사 계획부터 개연성 없는 포스터 초이스까지 이루어진 것만 같다고 하면, 제가 너무 운명론자인 걸까요? 하지만 진짜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행동은 무심결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때로 터무니없이 튀어나온 선언들에 의해, 뱉어진 순간 방향성을 잡은 것마냥 끌려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긴 편지를 써보았습니다. 흑백 화질을 뚫고 전해지는 토시코 여사님의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새해 인사를 대신하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흔해빠진 다짐이라도 노트 귀퉁이에 감히 선언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22년을 이끌고 갈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저도 적어봅니다. 내년엔 더 감각을 곤두세우고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리스트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무엇보다 함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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