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중시하는 너는 ‘내가 먹은 곳이 곧 나다’라고 말하고, 쇼핑을 좋아하는 나는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다’라고 말한다. 재택근무의 시대에는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곧 나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비염, 천식에 시달리는 나는 휴지 쓰레기를 유독 많이 배출한다. 고양이 똥, 택배 상자, 밀키트 비닐도 나를 대변하는 쓰레기 중 하나. 나라는 인간이란 ‘식단’과 ‘영수증’과 ‘쓰레기’로 해설되는 아주 단순한 존재.
요즘은 이 해설지에 새로운 챕터가 추가되었는데, 바로 알고리즘. 집에 놀러 온 동생이 내가 로그인해 둔 유튜브 메인 화면을 구경하는데 왠지 부끄럽고 불길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없는 치부도 드러날 각이다. 그래, 맞아. 나는 ‘연예인 브이로그’를 관음하다가 범죄, 살인 사건 예능을 보고 흥분하다가, 매불쇼를 보며 얕은 지식을 얻는 인간이다. 밖에서 아는 체 하는 많은 것들이 고작 이런 짧은 영상들을 침흘리며 보다가 얻은 거라는 걸 동생이 알아버렸다. 이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거지. 나는 그 와중에도 자주 보는 수사물을 따라하며 상황극을 시작한다. “너,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사라져줘야겠어.”
알고리즘이 참 무섭다. 범죄, 사건 관련 프로그램을 자주 보다보니, 어느새 내 알고리즘이 모든 살인마와 음모론과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그날 현재에 존재 하지 않았다. 2022년에 내가 속한 사회에 무슨일이 일어나는 지는 알지도 못하고 과거만 탐닉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은 내가 하고싶은 걸 다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같다. 내가 먹고 싶고 잘 먹는 것만 계속 주면서, 나를 살찌우는 부모다. 그렇게 전세계 모든 인구가 알고리즘이 먹여주는 ‘취향’을 먹으며 고립된 각자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며칠 전 우리 가족은 1박 2일 한옥에서 잠을 잤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눈을 뜬 우리는 각자의 유튜브에 접속했다. 아빠는 자신의 알고리즘 최애 1호 뉴방을 틀었다. 바로 ‘가세연(가로세로연구소)’이었다. ‘가세연’으로 대표되는 그의 세계에는 나의 세계와 전혀 교차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즈넉하고 작은 한옥에 같이 있지만 다른 세계에 접속해 있다. 그의 ‘알고리즘’은 아버지에게 ‘가세연을 좋아하는구나? 그럼 비슷한 거 계속 먹여줄게’하고 웃으며 말하고 있겠지.
얼마 전 20학번 친구와 대화할 일이 있었다. 어쩌다 알고리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는 알고리즘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 알고리즘에게 역으로 ‘먹이’를 준다고 했다. 하루에 한 번 씩 아예 맥락 없는 단어들을 검색한다는 거다. 예를들면, ‘사슴’, ‘눈동자’, ‘게으름’, ‘구름’ 같은 단어들. 연예인의 이름도 정치인의 이름도 예능 프로그램도 음식 이름도 아닌, 느닷없는 보통명사. 그렇게 자꾸 이상한 단어를 입력해야 ‘알고리즘’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아, 이것이 밀레니얼과 젠지의 차이구나. 나보다 10살 넘게 어린 그녀가 또박또박 설명하는 ‘알고리즘 파괴 방법’을 들으며 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녀의 ‘알고리즘 파괴’는 단순히 파괴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슴’을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을 보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훌륭한 이야기를 만나기도 한다는 거다.
알고리즘의 기본 원리는 ‘예상 가능한 흐름’을 만드는 데 있다. 그 알고리즘을 통해 나는 예상가능한 것을 보고 예상가능한 취향을 가진 예상가능한 사람이 된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틀어놓고 있지만, 이번 주 안에는 꼭 ‘다리’, ‘보라색’, ‘가위’라는 검색어를 입력해보겠다. 이유는 없다. 이유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할 일이 생겨 기쁘다. 그 일이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 생각하면 더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