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요즘엔 비가 많이 내린다. 장마철에는 샤워를 두 번 하게 된다. 퇴근하고서 젖은 머리를 감으며 한 번, 출근하기 전 뜨거운 물에 정신을 깨우며 두 번. 습도가 워낙 높은 계절이라 샤워를 하지 않으면 몸 구석구석 물방울이 맺혀있는 느낌이거든. 

비 오는 날 샤워를 마치고 뿌리는 코롱만큼이나 기분 좋은 루틴이 없다. 나는 항상 ‘조말론의 와일드 블루벨 코롱’을 뿌린다. 이슬 맺힌 블루벨 꽃을 담은 향이라고 하는데, 내가 블루벨의 향기를 직접 맡아본 적이 있어야지. 그것보단 달콤한 물 향기에 가깝다. 굉장히 은은해서 샤워코롱처럼 사용하라고 ‘조말론’에서 의도하고 출시한 향처럼 느껴진다. 인위적이지 않다는 점은 이 코롱의 최대 매력이다. 하루 종일 향이 잔잔하게 남으면서, 비 오는 날 거리 한복판의 비릿한 흙 향기와 뒤섞여 오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나는 최근 몇년 간 이 항수만 고집했다. 비가 올 때마다 뿌려댄 탓인지, 우리 집에는 벌써 텅 빈 공병만 셋이다.

우리 집에는 절대 잃어버려선 안될 우산 하나가 있다. 제일 친한 친구가 선물한 검정 우산. 한 여름날에 태어난 나에게 준, 무려 생일선물이다. 매년 내 생일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무자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친구는 비가 내리는 생일날을 ‘낭만’이라고 일러준 사람이었다. 자기는 비 오는 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우산 쓰고 걷는 시간이 좋다면서.

보통은 편의점에서 사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투명우산을 쓰지만, 나는 특별한 날이면 친구가 선물해 준 이 우산을 들고 나선다. 가령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속이 좁은 투명우산을 택했다간 기껏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이 빗물로 엉망이 될 테니까. 그리고 조금은 별나고 유난스럽지만, 머리 위로 느껴지는 우산이라는 존재가, 마치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는 친구의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 친구와 마음을 주고받는 기분이라서 말이다. 

퇴근하고 주차장에 도착하면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온다. 온몸이 젖은 수건처럼 늘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집은 다를 거라고. 푹신한 침대와 뽀송한 이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걸음을 재촉하여 집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회사에서 한시바삐 업무를 볼 동안, 우리 집에도 바쁘게 일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제습기. 뽀송한 이불을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여름마다 쏠쏠한 역할을 해주는 녀석은, 쳐진 빨래에 숨을 불어넣어 주며 쭈글쭈글해진 벽지 또한 매끈하게 펴준다. 오늘은 내가 자리를 비운 그새 물을 한 통이나 채워냈다. 물이 짤랑이는 소리를 들으면 일 잘하는 직원을 둔 것 마냥 뿌듯하기도 하다. 아무튼 습기만 없앴는데 이런 가뿐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제습기만 있다면 장마의 무거움 따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우리 집 인덕션 위에서 수시로 달궈지는 건 전기포트가 아닌 주전자다. 보리차를 즐겨먹는 탓이다.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종종 밥알이 목에 막혀 안 넘어가는 때가 있는데, 그때 함께 마시는 보리차는 억지로 삶을 삼키게 도와주거든.

오늘도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인다. 보글거리다가 어느 순간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그게 기쁜 소식이다. 보리가 우러나올 때까지 잠깐 뜸을 들이고, 가장 좋아하는 컵에 부어서 따라 마시기. 집에 놀러 온 지인들은 왜 아직도 전기포트를 안 쓰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보리차가 끓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고. 느리게 호흡하고 느리게 걷는 게 편한 것처럼, 주전자의 물이 서서히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일이 너무나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