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150.3X150.3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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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몸통이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보다 뜨거운 햇빛을 등지고 잔바람에 몸을 기울여 조용히 떨고 있는 들풀에 하염없이 시선을 가져다 둘 때가 있다. 정오의 태양 광선을 피해, 지는 해에 붉게 물든 하늘이 눈 감고 어둠을 쏟아내는 광경을 경이롭게 바라볼 때가 있다. 4월 개천가 나무에 작은 이파리들이 밤새 돋아나면 주변이 온통 연두색 점들로 일렁이는 초저녁 풍경이 가슴 벅차게 온몸에 스며들 때가 있다. 1월 한낮에도 짙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시선 둘 데가 없는 메마른 겨울 대지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를 하나하나 손바닥 위에 받아 올려 사라질 때까지 본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육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물질 상태로 평평하게 가라앉았던 말할 수 없는 순간에 대해 기억한다. 우리는 언제나 거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면서 그 속에 있는 나를,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본다.
밤마다 꿈에서, 혹은 잠결에, “쿵”하는 거대한 소리를 듣고 놀라서 잠을 깨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떤 영화에서 봤다. 어디, 땅 속 근원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산과 산을 넘어 저 멀리 떨어진 어떤 허공에서 날아든 소리인지, 혹시 우리가 알 수도 없는 다른 시간, 다른 육체, 다른 만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동은 아닌지, 미지의 소리는 어떤 실체를 찾아나선 그를 삶과 죽음 사이에 유예된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갔다. 나는, 그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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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72.8X72.8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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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어느 날 오전이었는데, 전시장 안에는 이미 햇빛이 제법 들어와 있었다. 큰 창이 한쪽 벽에 격자 모양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그리 들어온 각각의 빛의 모양은 벽과 기둥에 반응하며 사방에 밝은 얼룩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무채색의 그림들이 밖에서 들어온 나무 그림자와 겹쳐서 어떤 건 빛과 그림자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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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Untitled>, 22X27.5cm, 장지에 금박기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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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에 금박을 입힌 <무제>(2019)는 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어 빛과 그림자의 파동에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지만, 스스로 얕은 빛을 내다가도 마주한 물체/사람의 그림자를 흡수하면서 제 형상을 흐릿하게 감추는 작은 요술을 부린다. 이영호는 얼굴 거울 만한 크기인 가로 22cm와 세로 27.5cm의 이 그림을 한쪽 벽에 떨어뜨려 놓고, 거기서부터 전시의 동선을 꾸렸다.
전시 제목은 《피부의 눈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로, 나는 신중한 보기를 다짐하며 눈 앞에 연속해서 펼쳐진 (한번쯤 미리 본 적 있는) 큰 그림들 앞으로 계속해서 다가가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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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성 <Islandness>, 140.2X194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2 /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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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체로 색을 뺀 무채색의 검은 점과 선을 사용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다. 네 개의 <섬성(ISLANDNESS)>(2022/2023) 연작은 세로의 길이가 2m에 가까운 큰 그림으로,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을 재료 삼아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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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72.8X72.8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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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그 빛과 그림자에 섞여 일부가 일시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그림들은 똑같은 재료를 써서 정사각형 모양의 종이 위에 그려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Interprète)>(2023)이라고 제목 붙였다.
두 개의 연작 모두 어떤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이상할 만큼 추상적인 형상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도 못한 채 이 형상들이 무언가로부터 혹은 어디로부터 떨어져 나온 미완의 이미지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자꾸 좇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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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성 <Islandness>, 140.2X194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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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섬의 이미지를 자처하는 <섬성> 연작은 거리를 두고 멀리서 봤을 때는 판화나 인쇄물처럼 얇고 평평해 보여서 무언가의 희미한 자국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 과연 저 이미지의 실체가 무엇일까 하고 다가가 그것과 더욱 밀착해 보면, 종이 위에 가해진 타격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점들이 빼곡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한 인상에 빠져 조금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최소한의 양감을 가진 덩어리들이 임의의 지지체 위에 덕지덕지 붙어서 거대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내가 봤다는 증언을 해주고 싶었다. 생각보다 이 둘 사이의 격차는 현실을 뛰어넘어 상당한 거리를 벌려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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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130.3X130.3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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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도 마찬가지로, 흰 색 바탕 위에 어떤 불확실한 흔적처럼 “남겨진” 추상의 점과 선들이 흩어져 있는데, 검은 색 그림과 흰 색 바탕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시선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보기를 시도하면서 이 흐릿한 이미지에 대한 “접촉”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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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성 <Islandness>, 140.2X194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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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의 <섬성>은 거대한 두께를 가진 오래된 침전물이 어떤 순간에 하나의 이미지로 목격된 순간의 정황을 반영한다. 도시의 인공 기물을 구성하는 투명한 유리판에 물과 먼지가 고여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섬, 그것의 평평함과 그것의 두께가 공존하는 임의의 형상, 이영호는 그러한 불확실한 대상이 현존하는 방식으로서 원대한 이미지를 사유해낸다.
그는 풍경 속에 자리잡은 미미한 형상들, 일상성이 구축된 삶의 시공간 속에서 채 길들여지지 않았거나 어쩌면 그것[시공간]의 균열에 작용하는 무명의 것이거나 아예 초월적인 것들, 게다가 태초 혹은 원형에 가까운 변화무쌍한 물질적 현존의 실체들에 눈을 돌려, 그것이 현재의 순간에 내포하고 있는 감각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을 모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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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72.8X72.8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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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에 관하여는, 수행의 주체가 모르는 사이에 변환되었다가 다시 되돌려지는 현상적 관계가 계속해서 조율된다. 눈 덮인 겨울 풍경은 죽은 식물의 “사체”를 오롯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재배치하여 그것의 (순수한) 물질적 형태 자체와 마주할 현실 공간을 제시한다. 단단한 지표면 같은 불순한 것들을 감추고, 죽음 혹은 (비가시적인) 어둠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들로 구별되는 순간을 그는 포착해내려 애쓴다. 이때, 이미지들은 누군가의 신체 앞에 나타난 것으로서, 마주한 형상[대상과 신체] 간의 “거리”를 긴밀하게 조정하면서 그것과의 접촉/만남이 성취된다.
열다섯 개의 동일한 제목을 가진 정방형의 그림들이 크고 하얀 벽 위에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듯 펼쳐 놓아졌을 때, 그것은 완성된 형태로 정지해 있기를 회피하고 여전히 빛과 그림자 안에서, 그 범주 안으로 들어온 신체 앞에서, 일련의 반응하는 물질이 되기를 감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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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280.4X194cm (2piece),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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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Untitled>, 회화, 다중매체, 오브제, 2019, 202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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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미지들과의 만남은 감각적인 접촉을 수반하는데, 말하자면 그것의 현존하는 “상태”에 다가갈 숨어 있는 시공간의 경로들에 대하여 (리듬 분석의 차원에서 르페브르가 말한) “감각적인 것의 복원”을 꾀한다. 이영호는 그가 주목해온 생태적인 풍경이 하나의 이미지로 드러나는 감각적인 순간에 대한 경험을 작업의 과정과 동기화 해서, 침전된 상태로서의 이미지에 다가갈 가능성을 좇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한국화 재료와 형식을 그가 다룰 수 있는 임의의 생태적 조건이라 생각했는지, 주로 장지를 사용해 아교와 호분, 돌가루로 지형(紙形/地形)을 다진 후에 목탄과 먹을 써서 신체의 흔적이자 발견된 형상이자 물질적 현존이 교차하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거의 보이지 않는, 움푹 파인 어딘가에 얼룩처럼 눌러 붙어 버린 수상한 침전물들처럼, 이영호는 불확실성을 함의한 물질들에서 이미지를 발굴해낸다. 그것은 “나”의 보는 행위와 “이미지”의 보여지는 수행성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이영호는 이를 작업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신체와 물질의 관계 속에서 반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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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Les Choses>, 가변설치, 폐 강화유리문, 유리가 파편화되며 서로 부대끼는 소리 채집, 2016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130.3X162.2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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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Interprète>, 162.2X130.3cm, 장지에 목탄, 먹, 돌가루, 아교, 호분,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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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층의 전시 공간 중에서 지하 층은 인공 조명과 조성된 소리가 결합해 사뭇 다른 분위기를 이끈다. 이영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에 퇴적해 있는 형상들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일에 열중해 왔는데, 그는 <섬성>에서 모티프가 됐던 고인 물의 흔적처럼 미미한 물질들이 오랜 시간을 지나 거대한 자연을 이루며 시시각각 변하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창의적 수행성에 가담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컨대, 가시적인 거리 안에서 (비로소) 발견된 추상적인 물질 상태의 언 바다의 표면 사진은, 아무런 차별성 없이 동일한 제목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을 부여함으로써 일종의 촉각적이고 심지어 청각적인 감각의 복원을 꾀하는 이미지로 소명을 다한다. 그것은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연작 안에서, 폐섬유의 추상적인 질감과 폐강화유리의 차갑고 날카로운 촉감으로 연쇄하면서, 이들을 포괄하며 공간을 회전하는 푸른 색의 인공 조명과 깨진 강화유리의 파동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증폭시킨 사운드 효과와 결합하여 어떤 형상, 어떤 이미지의 층위를 낱낱이 조명하는데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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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Lee Young ho (b.1985)
이영호 작가는 중앙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을 공부했다. 원앤제이 갤러리 개인전 (공식 후원: 주한 프랑스 대사관 주한 프랑스 문화원)과 뮤지엄 산,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장욱진미술관, 자하미술관, 단원미술관, 영은미술관, 한원미술관, 루벤미술관 뉴욕 외 다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기획 및 초대전시에 참여하였다.
2022년 주홍콩 한국문화원 한국 젊은 작가 선정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Korean Young Artist Series] Korean Cultural Center Hong Kong 국립현대미술관, 절두산박물관, 오산시립미술관 인천문화재단 등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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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mpt Project는 전시 공간이자 차세대 감각을 다루는 창작 인큐베이팅 플랫폼으로서 동시대 아티스트의 작업을 신선한 큐레이팅과 연출로 관객들에게 영감과 신선한 자극을 선사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공간명 프람프트 프로젝트에서 프람프트(Prompt)는 라틴어 'Promptus'의 어원에서 출발하여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빛으로 이끌어 세상에 드러내다(brought to light)라는 취지로 향후 지속적으로 예술에 대한 가치와 이를 다루는 창작가들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를 함의합니다.
프람프트 프로젝트의 약칭 PPP는 앞으로 참신한 관점으로 동시대 역량 있는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작가의 창작 코드와 창작물이 간직한 컨텍스트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업 방식과 작품이 지닌 의미를 새로운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며 작가와 갤러리 관람자가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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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RESS /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로 17길 28
HOURS / TUE - SUN, 11:00 - 18:00, Monday Closed
*건물앞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논현로22길 공영주차장] 이용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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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람프트 프로젝트
서울시 개포로 17길 28
28, Gaepo-ro 17-gil, Gangnam-gu, Seoul, Republic of 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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