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에 읽은 책 -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얼론 앤 어라운드〉에서 야마구치 슈의 책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말에 그의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었습니다. 2019년 출간됐을 때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은 철학책으로 읽어도 되고, 비즈니스 책으로 읽어도 되고, 자기계발서로 읽어도 됩니다. 철학의 명제들을 우리 생활과 비즈니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물론 쉽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결국 삶을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니까요. 야마구치 슈는 철학과를 졸업하고 리더십, 조직 운영, 인재 육성 등을 강연하는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야마구치는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무엇(What)과 어떻게(How)의 물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제하고, 이 물음을 바탕으로 ‘프로세서’와 ‘아웃풋’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총 50명의 철학자를 통해 50가지 생각의 비밀을 전합니다. 사람에 대한 핵심 콘셉트, 조직에 관한 핵심 콘셉트, 사회에 관한 핵심 콘셉트, 사고에 관한 핵심 콘셉트로 주제가 나뉘어 있습니다. 꼭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니체, 칼 수스타프 융, 아리스토텔레스, 한나 아렌트, 막스 베버, 질 들뢰즈, 장 자크 루소, 프랜시스 베이컨 등을 만나봅시다. 그들로부터 우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삶과 일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을 들어봅시다.
- 책 속에서 -
교양 없는 전문가야말로 우리의 문명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다.
철학을 배워서 얻는 가장 큰 소득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얻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수많은 직장인과 경영자, 일반 시민들이 직시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남긴 생각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특히 실무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개인의 체험을 통해 얻은 편협한 지식에 의거해 세계상을 그리는 일이 많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상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갖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묵인할 수는 없다.
당연히 이러한 형태로 르상티망을 계속 해소한다 해도 ‘자신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르상티망은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판단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예속 또는 종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 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
사람의 인격은 다면적이어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장소에서 걸치고 있던 페르소나를 다른 장소에서는 또 다른 페르소나로 바꿔 쓰면서 어떻게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해 살아간다. 인간이 어느 정도 마음 편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일종의 다중인격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한 테크놀로지의 등장이 이를 무척 어렵게 만들고 있다. 바로 휴대전화다.
다른 사람에게 창조성을 발휘시키고자 할 때 성과에 대한 대가, 특히 예고된 대가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나 조직의 창조성을 파괴하고 만다. 그럴 때 대가, 즉 당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대비 개념인 ‘채찍’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또한 심리학적 견해에서는 아무래도 부정적으로 보인다. 원래 뇌에는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의 균형을 맞춰 주는 일종의 어카운팅 시스템이 있다.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행위이므로 이에 대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안전기지secure base’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진정한 의미에서 바꾸고 싶다면 설득보다는 이해, 이해보다는 공감이 필요하다. 논리 사고에 뛰어난 컨설턴트가 종종 일반 회사로 옮긴 후 고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가 사람이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잘못 알고 있어서다.
로고스logos는 논리를 뜻한다.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한편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획이 사람들의 찬성을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다면 주장이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요건이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로고스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논리만으로 사람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논리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는 토론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토론에서는 상대를 꺾어 이기면 그만이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이 같은 행동을 하면 꺾인 상대는 겉으로만 따르는 척할 뿐 속으로는 반발심을 품고 전력을 다해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결코 논리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에토스ethos다. 에토스는 에식스ethics, 즉 윤리를 뜻한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해도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투입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점에 호소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설파했다.
마지막으로 파토스pathos는 패션passion, 즉 열정을 가리킨다. 본인이 신념을 갖고 열정을 드러내며 말해야 비로소 타인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일본 에도 시대의 격변기에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가 아무 감정도 없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신의 중요성을 호소했다면 개혁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또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을 이끈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의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마지못해 차별 철폐의 꿈을 호소했다면 어땠을까? 그의 의지는 절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파토스, 즉 열정을 가슴에 안고 미래를 이야기했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학습 심리학에서 이미 ‘예고된 대가’가 오히려 동기 부여를 감퇴시킨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인간의 동기라는 것이 ‘노력 → 대가’라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할 때는 노력한 사람과 성과를 낸 사람이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고, 즉 인과응보의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추구했던 대로 잘 실현되고 있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이 부정할 것이다. 오히려 인사 평가의 결과를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는 사람보다 승진하거나 출세하는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심지어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예정설이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얼 위해서 막대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들여 인과응보를 실현하려는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하고 운용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로크가 도달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즉 현실 세계에 관한 이해는 직접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에 의해 이끌리든가 아니면 간접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요소가 바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하게 들린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철학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용하다. 과연 로크는 무엇을 부정했을까? 로크는 두 위대한 철학자의 사고를 부정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앙가주망에 따라 참여하는 두 번째 대상인 ‘세계’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시간, 즉 인생 자체를 사용해 어떤 계획을 실현하는데, 이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 계획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르트르는 “사람의 일생에서 ‘우발 사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그 예로 들었던 것이 전쟁이다.
사르트르는 전쟁을 인생의 외부에서 닥쳐온 사건으로 여기는 것을 잘못이라 보았다. 전쟁은 ‘나의’ 전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반전 운동에 몸을 던지거나 병역을 거부하고 도망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자살함으로써 전쟁에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의 이목을 생각하거나 단지 겁이 많아서, 혹은 가족과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주체적인 의지로 이 전쟁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른 선택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상,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실로 냉정한 지적이지만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강조한 ‘자유의 형벌’에 처해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우리는 외부의 현실과 자신을 각각 별개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를 부정했다. 외부의 현실은 우리가 어떤 시도를 하느냐에 따라, 혹은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러한 현실’이 된 것이므로 외부의 현실은 곧 ‘나의 일부’이고 나는 ‘외부 현실의 일부’다. 즉 외부의 현실과 나는 결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현실을 자신의 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태도, 즉 앙가주망이 중요하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어떤가? 사르트르의 직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엄격한 지적으로 들린다. 사르트르는 우리의 목표가 자신의 존재와 자유(선택 가능한 범위 내)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회와 조직이 지시한 대로 행동하는 고지식한 사고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직업 같은 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텐데도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취직 인기 순위의 상위에 올라 있는 회사만 원하는 것은 전형적인 ‘융통성 없는’ 사고다. 소위 성공은 사회나 조직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기대받은 성과를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르트르는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은 사회나 조직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매슬로가 자아실현적 인간이라고 인정한 사람들은 고립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소위 인맥이 넓지 않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대개 지인이나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친구나 지인이 많으면 일을 소개받을 때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얻기가 수월하다. 그렇기에 페이스북의 친구 수나 트위터의 팔로어 수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매슬로의 고찰에 의하면 성공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자아실현형 인간은 오히려 고립 성향이 있고, 극소수 사람들과만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 매슬로의 지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점점 ‘얕고 넓어지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넓고 얕은’ 인간관계도 그러하지 않은가?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은 극소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매슬로의 지적은, 이제 우리가 이상적인 인간관계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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