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지만,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고통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무엇일까. 왜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압정을 밟았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압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계속 피가 나고 찔린 부위가 감염되고 파상품에 걸리게 된다. 심하면 다리 하나를 잃을 수도 있다.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호기심이 아무리 많은 아이라 하더라도 일단 뜨거운 것에 데이면 그 다음부터는 조심을 하게 된다. 그 고통스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탐구하려는 마음은 잃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고통은 그 순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고통이 없으면 우리는 시그널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시그널을 놓치면 배울 수 없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고통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 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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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신호'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고통이 주는 신호에 서로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둘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다. 매우 비슷하게 생겼는데 서로 다르다.
건강을 위해서 가장 많이 하는 결심은 러닝을 하는 것이다. 돈도 들지 않고, 누구와 같이 할 필요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운동화 한 켤레 뿐이다. 꼭 러닝화일 필요도 없다. 시간 당 소모되는 칼로리는 운동 중에 가장 큰 편이다. 여러 모로 러닝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생각처럼 느껴찐다.
나가서 뛰어보면 바람이 시원하다. 몸도 개운하고 '그래,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은 곧 사라진다. 처음 러닝을 한다면 길어야 3분 정도에 숨이 차기 시작한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지고 어딘가 찌르듯이 아프기도 한다. 몸이 내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안 하던 것을 하면 고통이 따라온다. 그 고통은 압정에 찔렸거나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와 매우 유사하다. 조심해야 할 것, 우리 몸을 보호해야 할 것과 닮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고통이다. 내 몸에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할 때에도 고통이 따라오지만, 내 몸을 위해 하는 행동에도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하면 러닝의 즐거움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첫 날은 어떻게든 러닝을 마치게 된다.
문제는 다음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하기도 어렵지만, 나간다 해도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겁다. 어제는 3분 정도는 지나야 고통이 느껴졌다면 오늘은 첫 발자국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무릎과 허벅지에 어제 느끼지 못했던 기분 나쁜 고통이 찾아온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이상하다.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일단 쉬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러닝은 내게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순간을 버티면, 계속해서 달리면 어느 순간 몸이 차츰차츰 나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음 날은 더 몸이 힘들지만 러닝을 하면서 몸이 풀리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되고, 그 다음 날은 더 힘들지만 달리면서 몸이 또 풀리고,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달리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운해지고, 비가 오거나 다른 일정이 있어 달리지 못하면 하루 건너 뛰어서 좋다는 생각 보다는 신발끈이 풀린 신발을 신고 있는 것처럼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자꾸 밖을 쳐다보게 되고 얼른 나가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뛰다 보면 또 다른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즐거운 러닝이었는데 어느 날 또 다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무릎이나 장딴지, 허벅지에 찾아오는 고통이다. 이미 극복한 줄 알았던 예의 그 기분 나쁜 고통이다. '아, 너네 알고 있다고!'하고 무시하고 다시 달려본다. 달리다 보면 또 어느 새 없어지기도 하지만, 훨씬 더 심각해지기도 한다. 무리해서 러닝을 했을 때에 나타나는 고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쉬어야 할 때 더 달리게 되면 정말로 몸이 아프게 된다.
고통은 그렇게 양면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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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하든 처음부터 막 재밌는 것은 잘 없다. 안하던 것을 하면 여기저기 고통이 느껴진다. 익숙하지 않고 재미도 없다. 재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순간을 견디면 일이 손에 익는다. 즐거워진다. 계속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지 못한 고통을 느끼게 되고, 한 번 더 집중을 가하는 순간 어딘가 탈이 나게 된다. 그 때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고통을 돌아보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과 내게 위험을 알리는 고통은 무엇인가.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마법같은 비법은 없다. 책으로 배울 수도 없다. 고통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해 보고, 느끼고, 구분하면서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고통이 시작할 때마다 피해 버리면 '일의 즐거움'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무식하게 노력만 하면 탈이 나게 된다. 쉬어야 할 때 계속해서 고통을 무시하게 되면 몸이 배겨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잘못된 방식으로 노력만 계속하는 경우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있고,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몸이 내게 주는 '신호'라고 인식하게 되면 고통이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일을 하면서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을 받아들일 지, 그리고 어떤 고통을 경계해야 할 지를 면밀히 살피게 된다. 고통과 친해지게 되고,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로 고통을 무시하지 않게 된다.
'일은 원래 즐거운 것'이란 말은 일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중간중간 고통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일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 견뎌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발전이 없다. 원래 일은 굉장히 즐거운 것인데 뭔가 방해하는 것이 있을 때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들여다 보고, 견뎌야 하는지 조절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계속해서 성장하고,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일할 수 있다.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삶을 바꾸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