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일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 엇비슷하다. 마감을 철저하게 지키고, 맥락을 빠르게 파악하고, 군더더기 없이 실행한다. 그런데 밥값을 못하는 사람은 제각각이다. 못하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하고 창의적일 수가 없다.
구태여 유형별로 분류해보자면 이런 식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마감 직전에서야 돌연 ‘아, 맞다!’를 외치는 사람. 스스로 발등에 불을 붙이는 이 감탄사는, 본인에게는 뒤늦은 발견이지만 주변에게는 갑작스러운 화재 경보다. 불을 지른 건 분명 자기 자신인데, 불을 끄느라 주변 동료들이 동원될 때가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팀원들 모두가 물통을 나르는 아수라장의 현장. 그 혼란 속에서 '아맞다'씨의 존재감만큼은 또렷해진다.
어제 분명히 공유한 파일을 오늘 또 보내달라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오늘 보낸다 해도, 내일도 같은 문서를 쫓아 발신자를 찾아올 것이다. 메신저나 메일의 검색 기능의 존재를 모르는 건지, 아는데 쓰기 싫은 건지. 같은 파일을 무한 반복 요청하는 이 사람을 나는 직장의 도르마무라 부르기로 했다. 끝나지 않는 루프 속에 타인을 가두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둘은 거대한 존재감을 뽐낸다.
한편, 말은 청산유수인데 막상 돌아보면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도 있다. 두 시간짜리 회의가 끝난 뒤, TO DO는 '다음 주에 다시 모여 논의'뿐인 그런 회의. 결론을 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회의를 했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한 퍼포먼스다. 나는 이런 부류를 회의론자라 부른다. 회의를 사랑하되 결론은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론자라 불리기에 마땅하다.
이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일을 잘하면 된다. 문제는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되지 않는다는 거다.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다른 것을 잘해야 한다. 나는 그걸 '밥값 증명 퍼포먼스'라 부른다.
회의실에서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옆자리 동료에게 귓속말을 건넨다. 내용은 별게 없다. '이거 아무래도 방향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정도의 하나마나 한 헛소리. 귓속말이라는 형식이 내용의 무게를 대신 들어주는 방식이다. 소곤거리는 순간 상대를 비롯해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괜히 긴장하고, 당사자는 뭔가 중요한 걸 포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존재감. 대단한 인사이트가 아니어도 된다. 귓속말이라는 행위 자체로 충분하다.
누구나 다 아는 문제를 굳이 꺼내는 방식도 있다. '이거, 타깃팅이 너무 넓은 거 아닌가요?' 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이미 인지한 사실이다. 대안은 없다. 그냥 언급만 한다. 그래도 '날카로운 지적'이라는 표정들이 돌아온다. 대안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지적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얼마 전 미팅에서 목격한 장면들이 꼭 그랬다. 어쩌다 미팅에 끌려온 사람들은 바쁘게 피드백을 쏟아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이 콘텐츠는 이러쿵 저러쿵….'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지난주에 발행이 끝난 상태였다. 다음으로 언급한 콘텐츠를 두곤 '이 제품은 해당 포인트보다는 날씨가 더워졌으니까…'라고 말해봤자 이미 컨펌 완료되어 1시간 뒤 발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늦은 피드백은 피드백이 아니라 공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회의실에 앉아있는 이상 무언가를 뱉어야 한다는 강박이 공허한 피드백을 쏟아내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부류를 시간을 달리는 직장인이라 부른다. 문제는 달리고는 있는데 방향이 과거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주엔 AI로 업무를 자동화했다며 으스대는 경우도 봤다. 이걸로 업무효율이 늘었다고. 자신이 쉬는 동안 자신을 복제한 AI가 일하고 있다며.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의 메일을 보내면 돌아오는 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알맹이 없는 말뿐, 문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은 없다. 자동화한 건 업무가 아니라 '메일을 회신하는 행위 자체'였던 거다. AI가 대신 '잘 읽었다'고 말해주는 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다른 곳에서 자동화 성공담을 설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나 자세히 아느냐면,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맞다씨도, 도르마무도, 회의론자도, 모두 과거 내가 지나온 모습의 일부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연을 비롯한 주변 인물 대부분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싫어서, 남을 헐뜯는다. 아무리 주인공이래도 그런 짓을 일삼으니 정을 붙이기 쉽지 않다. 남을 씹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만큼 비겁하고 궁색한 짓도 없으니까.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정확히 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 회의에서 귓속말을 건네고, 대안 없는 지적을 남발하고, 잘 읽지도 않은 메일에 '잘 읽었습니다'로 답하는 사람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던 거다.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척, 대단한 일을 해낸 척. 나는 아닌 척.
오늘도 불 켜진 사무실에선 누군가의 밥값 증명 퍼포먼스가 한창이다. 타이밍을 한참 놓친 피드백이 쏟아지고, 아무 의미 없는 자동 회신이 오가고, 내용 없는 귓속말이 오간다.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라고 했지만, 틀렸는지도 모른다. 밥값 못하는 사람도 결국 엇비슷하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똑같이 밥값을 하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