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2연평해전 20주년, 우리에게 남겨진 것



수습위원 최윤혁  

  2002 6월 우리는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쳤다. 거리 곳곳은 월드컵의 열기로 행복의 외침이 가득했지만, 서해바다에서는 총포와 화염 속에서 울려 퍼지는 슬픔의 외침이 가득했다. 슬픔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매년 우리에게 돌아오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점점 잊히기에 메아리도 점점 작아진다. 나는 그 슬픔의 외침을 기록하여 메아리를 기억하고, 생존자의 또 다른 외침을 전하고자 한다.

<1연평해전>

 북한은 예전부터 북방한계선(NLL)[1]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시로 넘나들며 우리를 도발했다. 특히 제2연평해전이 벌어지기 3년 전인 1999, 꽃게잡이 철에 북한 어선들이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조업을 펼치자, 북한 경비정이 자국 어선 보호 명목으로 감시활동을 벌이며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우리 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척을 출동시켜 경고방송과 차단기동[2]을 실시했다. 차단기동 과정에서 충돌 받은 북한 고속정은 무력을 사용했고, 이후 우리측에서 대응 사격을 하며 교전이 발생했다. 교전 결과 북한군은 2척이 침몰하고 남은 3척도 큰 파손을 입으며 수십 명이 사망했지만, 우리 군은 장병 9명의 경상 정도로 끝이 났다. 이것을 1연평해전이라고 명명했으며 승전으로 기록됐다.


[1] 1953년 정전 직후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설정한 해상경계선.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NLL'이라고도 한다. 북한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북방한계선의 무효를 주장하고 무력 도발을 일으키고 있다.

[2] 선체를 직접 이용해서 적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적에게 붙어서 작전을 펼치기 때문에 공격에 취약하다.

  

<불합리한 교전수칙>

 제1연평해전 당시 합동참모본부[1]의 해상 작전 지침은 '경고방송시위기동[2]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5단계였다. 이 지침은 북한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와서 대치 중인 상황에도 먼저 공격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경고 방송이나 시위기동 등 사격을 제외한 수단을 쓰라는 의미다. ,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고 뚜렷한 공격징후가 관찰되더라도 우리측은 선제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무방비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단계는 "차단기동"이다. 당시 합동참모본부는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들에 선제사격을 금지하고 근접해서 부딪혀 밀어내는 차단기동을 지시했다. 이런 차단기동은 오래전부터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군 수뇌부는 제1연평해전 당시 북한 해군을 큰 피해 없이 격파한 결과, 이런 불리한 교전수칙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2002629일 대한민국과 터키의 월드컵 3, 4위전이 있던 날 북한은 철저한 준비 속에 북방한계선을 다시 침범했고, 대한민국의 청년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 육 · 해 · 공군의 지휘를 통합하고, 국군의 통수에 관해서 군의 최고 통수권자를 보좌하기 위한 참모기관.

[2] 적의 움직임에 제한을 주기 위해 우리의 유효사거리 안에 적을 넣어두는 기동

  

 

<제2연평해전 참전 및 생존용사 이해영 예비역 원사님과 인터뷰>

Q. 전역하고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A. 해군 전역 후에 바로 바다에서 선장 일을 했다. 바다 생활을 연장해서 하다 보니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제2연평해전 당시 트라우마가 겹쳐서 바다 생활을 접게 됐다. 지금은 제대군인 지원센터에서 연계해준 대기업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Q.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사전 징후가 있었나요?

A. 며칠 전에 첩보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다. 첩보를 받은 상부의 지시로 탐색을 하던 중에 629일 공격을 받은 것이다.

 

Q. 조심스럽지만 교전 당시 탑승하고 계셨던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당시에 꽃게잡이 철이라서 어선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북방한계선 이전에 [1]어로한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임무는 어선들이 어로한계선을 넘지 않게 통제하고 어선들을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 6299시쯤에 총원! 실전 전투배치!”라는 신호와 함께 출동 임무가 하달됐다. 출동했지만 북방한계선을 넘은 북한 경비정에 선제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당시 교전수칙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하지 못하고 차단기동을 하고 있던 상황이다. 편대 선두로 참수리 고속정 358정이 나섰고 우리 357정은 뒤따라가면서 선회하던 도중, 북한 경비정이 우리 357정을 향해 모든 포를 겨누고 있는 것을 식별했다. 공격징후를 관찰했지만, 교전수칙에 따라 선제공격 하지 못했다. 결국 방어 태세만 갖춘 상태에서 북한군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격 받은 우리 357정이 대응 사격을 하면서 약 30분간 치열한 교전이 시작됐다.

 

Q. 전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군인으로서 말하기 어려웠던)
A. 해전을 치른 지 45일 후에 고속정을 인양했는데, 내부에 펄(해저 진흙)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해전으로 인한 부상과 트라우마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속정 내부에 있는 펄을 치우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불만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고속정 내부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썩은 펄이 피부에 닿아 피부병이 생겼다.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컸다. 병원에서 돌아와 처음 참수리에 들어갔을 때 해전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상당히 힘들었다.

 

Q. 안보교육관을 하게 된 계기와 안보교육관으로서 진행한 활동은 무엇이 있나요?
A. 2002년에 예비군 교육대에 있으면서 예비군들이 해군 소속임에도 제2연평해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에서 당시 상황을 숨기려고만 하고 여러 다른 이슈에 묻혀 해전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강의를 다니며 제2연평해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안보 의식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Q. 제2연평해전 생존자 전우회의 활동

A. 유가족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2002년도에 내가 최고 연장자로서 전우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유가족분들과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가족 입장에서 자기 가족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데 우리는 살아 돌아왔으니까그 마음은 백번 천번 이해한다. 이런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모이면 자주 식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을 하다 보니까 유가족분들도 이제 마음을 열어 주시고 자기 자식같이 보듬어줬다. 이렇게 유가족과의 관계 형성과 더불어 전우들 간에 교류도 원활히 하고 있다. 전우들이 슬픈 일이 있을 때는 힘이 되어주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전우를 더욱 빛내 주는 그런 교류를 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가 나이가 많이 들어도 전우회만큼은 유지하고 싶다. 우리 후세대에 전우회를 넘겨주면서 이끌어가게 하고, 2연평해전과 전사자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게끔 할 것이다.

 

Q. ‘연평해전’영화를 보고 느낀 점 혹은 변화된 점

A. 영화를 관람했을 때의 그 심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배에 함께 탄 전우가 내 앞에서 전사하고 다치는 상황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고,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당한 것에 몇백 배 응징했으면 한다.

 

Q. 서해가 평화의 바다가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A. 북한이 계속 미사일을 쏘고 도발하는 등 정전협정이 잘 이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정전협정만 믿지 말고 철저한 도발 억제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인데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국방력의 상당 부분이 육군 전력에만 쏠려 있다. 전쟁을 억제하려면 해군력, 공군력을 더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Q.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에 전운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해전을 겪은 당사자로서 전쟁의 잔혹성에 대해 생각이 많으실 텐데 이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현재 푸틴이라는 사람이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선량한 시민이 죽어 나가고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고 있다. 전쟁이 가장 잔혹한 점은 남아있는 구성원 모두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식을 잃은 유가족의 마음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생 불행 속에서 살아간다. 전쟁은 정말 잔혹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제적인 압력을 통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Q. 건국대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
A. 인터넷으로도 제2연평해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렇게 전쟁을 겪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를 느끼는 것은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건국대학교 학생들이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느꼈으면 한다. 이제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대한민국에 인공기(북한의 국기)가 올라가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북한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국방력과 경제를 키우고 나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국민 개인으로서 애국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애국의 기본은 우리의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태극기는 우리의 존엄성을 나타내고, 태극기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태극기를 사랑하고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하는 것이 바로 애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1] 고기나 수산물 따위를 잡거나 거두어들일 때, 일정 지역이나 구역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범위가 되는 선.

  

<2연평해전 이후 해군의 변화>

 제2연평해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겪고 나서야, 합동참모본부는 해상 교전 수칙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규정된 교전 수칙에서 차단기동과정이 삭제되었으며, 시위기동과 경고방송을 동시에 하도록 하여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3단계로 단순화되었다. 또한 현장 지휘관의 권한을 강화하여 돌발상황에서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연평해전에서 활약한 참수리급 고속정윤영하급 미사일 고속함으로 대체하면서 화력과 보호력을 강화했다. 이 미사일 고속함 명칭에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용사의 이름이 들어갔다. 故 윤영하 소령, 故 한상국 상사, 故 조천형 상사, 故 황도현 중사, 故 서후원 중사, 故 박동혁 병장 제2연평해전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6명의 용사는 미사일 고속함으로 부활해서 다시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생존자의 외침을 듣고>

 제2연평해전 생존자와 유가족은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매년 외쳤지만, 우리는 귀 기울이고 있었는가? 당시 해전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정부와 군 수뇌부 그리고 언론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대학생들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메아리가 작아지지 않도록.

  
왼쪽 사진 : 이해영 원사의 명예로운 순간을 담은 공간 

오른쪽 사진 : 제2연평해전 당시 참전했던 용사들과 참수리 357정 (출처: 라미 현 작가, 2019)

20년 전 오늘, 서해의 별이 된 6인의 용사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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