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38회 (2022.01.12)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입니다. 신경숙 작가님의 『리진』 『바이올렛』과 황석영 작가님의 『수인』, 박상영 작가님의 『대도시의 사랑법』 등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과 영국에 출판하였습니다. 한국문학을 세계로 내보낸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오늘도 서울 구로구에 있는 작은 작업실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안톤 허 번역가가 사랑한 첫번째 시💕

짐과 집 (김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짐이 많아서 이사 가기가 힘들다. 이 짐을 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단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빼고. A가 와서 소파를 가지고 갔다.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B가 와서 티브이를 가지고 갔다. 이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이다. C가 와서 냉장고를 짊어지고 갔다. 저 또한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D가 와서 책상과 의자와 책꽂이와 그리고 산더미 같은 책을 트럭에 싣고 갔다. 아까워해봤자 더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남아 있는 물건이 하루하루 줄어들수록 나의 고민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드디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할 수 있는 날이 다가왔다. 이삿날 친구들이 나의 이사를 돕겠다고 찾아왔다. 짐이라곤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으쌰으쌰 힘을 모아서 새집으로 나를 옮겨놨다. 나는 얌전히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다. 너무도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또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을까?
제가 소개해드릴 첫 시는 김언 시인의 「짐과 집」입니다. 시는 대개 은유의 언어인 만큼 「짐과 집」 또한 단순히 이삿짐에 대한 시라고 보면 너무 시시하겠죠? 시집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에 나오는 시들은 우리가 평상시 접하는 시보다는 작은 이야기의 느낌, 즉 서사의 무게가 사뭇 느껴지는데, 「짐과 집」에서도 역시 시에서 소설로 가는 과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시라는 집에서 소설이라는 집으로 이사가려고 자신의 이삿짐을 최소화하죠. 전통적으로 시에서는 화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갖지만, 소설에서는 사건이나 인물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의 화자는 소설의 화자가 되기 위해서 짐을 버리고 또 버려야 하고,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야 합니다. 「짐과 집」의 이사가 시인에서 소설가로 전환하려는 시도에 대한 은유라고 본다면, 마지막에 던지는 질문에서 말했듯이, 시의 화자를 꼭 소설이라는 새집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처럼 「짐과 집」은 소설을 쓰다가 시가 되어버린 서사로 읽힐 수 있는데(왜냐하면 「짐과 집」은 결국 소설이 아니라 시니까요), 저는 번역가로서 번역에 대한 글로 읽고 싶네요. 제가 김언 시인의 작품을 번역했을 때, 김언 시인이 제 번역시 안에서 편히 누울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보고 자신까지 지워달라고 할까요? 김언 시인을 지우는 것이 번역을 빈집으로 만드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번역을 완성하는 행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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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허 번역가가 사랑한 두번째 시💕

혼자 있는 사람과 아무도 없는 사람 (김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둘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혼자 있다는 건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 아무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없어진다는 것. 정말로 혼자 있다면 그 누구를 지우기 전에 관계부터 지워야 한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관계가 문제였으니. 관계부터 지우자. 너라는 대상이 아니라 너라는 관계. 그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라는 관계를 통째로 지우기 위해 나는 혼자 있다. 너도 혼자 있다. 둘 다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서로 만날 일은 없다. 혼자 있기 때문에. 혼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관계를 삭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은 그래서 없다. 아무도 없는 마을. 아무도 없는 마을에서 혼자 있는 사람과 혼자 있는 사람이 걸어다닌다. 도무지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끼리 걸어다니고 돌아다니고 쉬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도 관계. 내 곁에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쉬고 있다는 생각도 일종의 관계. 그래서 생각을 지운다. 생각을 지우기 위해 나를 지워야 하는 것. 그것이 혼자 있기의 정수. 혼자 있기의 진실. 혼자 있기의 불가능한 실현을 돕기 위하여 죽음이 있고 자살이 있고 때로는 타살도 필요하다. 그렇게도 혼자 있고 싶어했으니 누군가라도 도와줘야 한다. 혼자 있도록 영원히 그리고 완전무결하게 혼자 있는 상태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죽음. 누가 관여했건 무엇이 원인이 되었건 어떤 사건이 발단이 되었건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아무도 없는 죽음이 혼자 있는 나를 돕는다. 결정적으로 돕는다. 혼자 있는지도 모르는 나를 실현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는 혼자 있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너도 혼자 있다. 둘은 만나봐야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각자를 생각하지도 못한다. 각자의 생각조차 씨가 마른 곳에서 아무도 없는 몸이 태어난다. 혼자 있는 생각이 만개한다.
두번째 시는 역시 김언 시인의 「혼자 있는 사람과 아무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시는 제가 번역하면서 종종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는데요, 번역하고 나니 모든 퍼즐 조각이 스르륵하며 맞춰졌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과연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혼자 있는 순간 없는 사람이 생기고, 없는 사람도 사람인 만큼 혼자 있으려면 없는 사람도 없애야 하는데, 있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상한 말장난 같지만 읽다보면 완벽하게 논리적인 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래도 언어가 있는 한, 인간은 진정으로 혼자 있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서도 자아, 화자, 인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스스로를, 그 스스로를 듣는 또다른 스스로를 만들죠. 시인은 시의 화자를 만들고, 소설가는 소설의 화자를 만들고, 말하고 행동하는 등장인물을 만듭니다. “아무도 없는 마을을 만들면 그 마을에는 혼자 있는 생각이 만개합니다. 우리는 시의 화자가, 혹은 김언 시인 본인이 혼자 앉아 화자를 만들고 마을을 만들고 등장인물을 만들고 만개하는 혼자들을 만드는 상상을 하게 되면서, 혼자 있는 독자도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도 결국 시의 매력인 것 같아요. 만개하는 혼자 속에서도 혼자이고, 혼자 시를 읽으면서 혼자가 아니게 만들죠.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루나파크' 홍인혜 작가님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루나파크' 홍인혜 작가님입니다. 카피라이터이자 만화가, 시인이기도 한 홍인혜 시믈리에가 들려주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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