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의 감시원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섞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남쪽 할머니들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이들도 따라 춤을 추었다. 여기에는 조동걸 교수 일행도 끼어 있다가 춤을 추었다. 이것이 대동춤이다. 이들 춤에는 분명히 이념과 체제가 없었다. 남루하거나 화려한 차림의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뒤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담벽 밑으로 가서 한참 울었다.
우리는 암흑의 시기에 창립을 보았습니다. 어두움 속에 비치는 한줄기 빛은 그 찬란함을 더해줍니다. 우리는 ‘한 줄기 빛’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은 기울여왔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땅에서 불모지였던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대중화할 것을 표방해왔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10년의 세월을 쌓았습니다. 10년은 안정된 사회에서는 짧은 세월이겠지만 격동의 시대에는 아주 긴 터널일 것입니다.
세상 잘못 돌아가는 일에 하실 말씀 많겠지만 이제는 모든 근심 우려 다 거두시고 평안히 가십시오. 그렇게 좋아하던 술 담배도 이제는 끊으시겠지요. 그래도 선생은 오래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아무리 강단이 좋아도 선생 말씀처럼 인명은 재천인가 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빈자리를 남기고 선생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활달하고 격정적인 모습, 환한 웃음을, 뜨겁게 사셨던 선생의 삶·정신과 함께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선생이 좋아하시던 개나리 진달래 꽃 온몸에 맞으며 화창한 봄날 모든 것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그토록 열정적이지만 막막한, 또 쇠처럼 의지적이지만 무모한 날들을 술과 함께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무르익은 열정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 그리고 ‘연구소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이었다. 경기대학교 근처 충정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이이화 선생과 몇몇 ‘無謀漢’들은 이를 통해 연구소의 새로운 ‘역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꾸밈없고 진솔한 분이셨다. 아이 같은 면도 있었다.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시국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나, 전봉준 동상 만드니 기부 좀 하라 하셨을 때나, 동상 만드는 일 도와주는 아들이 대견하다 하셨을 때나, 타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딸내미 자랑할 때나, 아닌 척 꾸미거나 속마음을 감추는 일이 없었다."
"그가 1996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집필한 『한국사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 사학사에서 역사관의 일관성이나 분량 면으로 볼 때 한 개인이 집필한 한국전사(韓國全史)로서는 그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그가 그 전에 거의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민중의 존재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를 두고 ‘민중사학 개척자’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빨갱이 타령을 입에 달고 사는 수구세력들의 극렬 탓인지 한국전쟁 피해 유족들이 주관하는 모임에는 여야를 떠나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참석을 꺼리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의지할 데 없는 저희로서는 궂은일에 항상 앞장서 주시는 선생님을 모셔 덕담을 듣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살아온 유족들에게 선생님은 곧 아버지 같았고 형님 같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립습니다 선생님. 어떤 세상에 가시더라도 선생님 방식대로의 치열하고도 흥겨운 삶을 사실 것을 알고 있지만, 선생님의 부재는 역시나 큰 상실을 불러옵니다.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뜻과 활동을 닮아갈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 그리고 애주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