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월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오호츠크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진서 편집장의 명을 받아 게스트 서평 뉴스레트를 쓰고 있는 저는 노정태라고 합니다. 칼럼을 쓰고 번역을 하는 등의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인문학 전공자 입니다.

지난 번 뉴스레터에서 서평을 했던 게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기대치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달까, 여러모로 부담이 없지 않은 상황이죠. 새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을 앞두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소 신선한 시도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아주 감명깊게 읽은 텍스트를 통해서, 최근의 정치, 문화, 환경 이슈들을 다뤄볼까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그 뭐냐... 인문학적? 영성적? 통찰도 조금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 공동번역


"바로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그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를 풀이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수는 육백 육십 육입니다."

- 요한계시록 13장 18절. 공동번역
    #정치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문형준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22)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흔히 D. H. 로렌스로 더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여기까지 말해도 모르신다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외설 작가.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인문서를 즐겨 읽는 사람들 사이에 작은 유행이 있었습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렌스의 소설이 아니라 산문들이 번역되고, 널리 읽히고, 각광받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죠.

    지금 거론하는 이 책 <아포칼립스>도 그렇습니다. 1930년 3월 2일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1931년 사후 출간된, 말하자면 유작인데, 2022년에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어야겠군요. 신약성경의 가장 마지막을 보면 '요한의 계시록'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한국말로는 '계시록'이지만 영어로는 Apocalypse죠. 세상의 멸망과 그 후에 도래할 천년왕국을 다루는 어떤 종교문학의 한 갈래가 바로 계시록, 묵시록, 아포칼립스 라고 하겠습니다.

    그 아포칼립스, 요한묵시록에 대해, 우리의 문학가 로렌스 선생이 내용을 거들떠보고 이러저러하게 본인의 사상을 끼워파는 것이 바로 이 책 <아포칼립스>인데요, 과연 그는 뭐라고 하고 있는가?

    휘황찬란하고 정신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 온갖 이미지로 떡칠이 되어 있는 그 비장한 텍스트, 그것이야말로 '민중의 기독교' 그 자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 "계시록의 어조 전체가 이러하다. 이 귀중한 책을 몇 차례 통독하면, 우리는 표면적으로 성자 요한이 선택된 자들, 요컨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모든 이를 모조리 쓸어 몰살시키고 그 자신은 신의 보좌로 즉시 오르는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비국교도인 신도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의 관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취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 곧 선택받은 자, 혹은 '구원받은 자'였다. 또 그들은 궁극의 승리와 선민들의 통치라는 유대인의 관념도 취했다. 땅바닥의 개였던 그들은 이제 승리의 개가 될 것이었다. 천국에서 말이다. 실제 왕좌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보좌에 앉은 어린 양의 무릎 위에 앉게 될 터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구세군이나 비국교 예배당, 오순절 교회 어느 곳에 가든, 그 어떤 저녁 예배에서든 들을 수 있는 교리다. 예수가 아니더라도 요한이 있다. 복음서가 아니더라도 계시록이 있다. 이것은 사려 깊은 종교와는 완전히 다른 민중 종교다." [18~19쪽]


    우리가 이 레터를 시작하면서 봤던 요한복음의 저 아름다운 문구는 정신의 '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로렌스는 주장합니다. 반면 이름은 똑같이 요한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완전히 다른 이유로 쓴 요한의 묵시록은 '평민', '천민', 혹은 '민주주의자'를 위한 텍스트죠. 로렌스의 설명을 좀 더 들어봅시다.


    > "오래 살면 살수록 기독교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점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 하나는 예수와 그의 명령 -- 서로 사랑하라! -- 에 집중하는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아닌 계시록에 집중하는 기독교이다. 부드러움의 기독교가 분명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기독교는 자기 예찬, 비천한 이들의 자기 예찬으로서의 기독교에 의해 완전히 옆으로 밀려나 있다." [22~23쪽]


    아, 이제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이미 가지고 있는 고상한 사람들의 종교가 있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주고, 남에게 내 생명까지 온전히 내어주는, 그런 고귀한 사랑의 기독교.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아니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죠? 뭔가 원한 감정이 가득하고, 악에 받혀 있고, 신의 이름으로 남을 저주하고 끌어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죠?

    지금 뿐 아니라 로렌스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전자는 '진짜 기독교'고 후자는 '가짜 기독교'라는 식의 이야기가 퍽 많았어요. 하지만 로렌스는 공정하게, 혹은 올바른 방식으로 삐딱하게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숫자로만 따지면 후자가 더 '진짜 기독교' 아니냐고 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정서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고귀하지 않고, 그럴 수가 없으며, 우리의 마음 속에는 뭔가 메시아가, 백마 탄 초인이, 권좌에 앉은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긴 커녕 네 이웃의 목을 싹 다 쳐주기를 바라는 그런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으니까요.

    축하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저... 혹시 D. H. 로렌스가 쓴 <아포칼립스> 아세요?'라고 소개팅 자리에서 물어본다면 적당히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게 한국 정치랑 뭔 상관? 놀랍게도 상관이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어졌던 소동을 떠올려 봅시다. 회담을 세 시간 앞두고 트럼프가 트루스 소셜에 올린 게시물. 한국에서 '숙청과 혁명'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며 질책하는 그 문구.
    '큰 거 온다'는 말을 되뇌이며 '윤 어게인'을 외치던 윤석열 지지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열리고 유황불이 쏟아지며 묵시록의 네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듯한 희열이 느껴질 순간 아니었겠습니까?

     

    바야흐로 우리의 기도가 통했구나. 이제 트럼프가 CIA인지 FBI인지를 동원해서, 이재명을 관타나모 수용소에 처넣고 진짜 대통령 윤석열을 옥에서 꺼내어 권좌에 다시 앉혀주겠구나!

     

    제가 지금껏 인터넷에서 정치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온 역사가 벌써 20년이 족히 넘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정치 토론의 장이 이토록 순수하게,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휴거를 앞둔 종말론적 기운에 휩싸인 것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 기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예수의 재림, 휴거, 천년왕국의 도래, 기타등등을 바라던 수많은 실패의 역사에, '트럼프가 델타포스를 데려와 이재명을 체포하고 윤석열을 석방한다'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추가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1994년 이후 또 한 번의 휴거 사태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 "기독교의 숨은 측면으로서 아포칼립스는 거의 2000년 동안을 이어져 왔고, 그것의 과업은 거의 달성되었다. 즉 아포칼립스는 권력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그 책은 권력자를 살해하고, 약자인 자신들이 그 권력을 쟁취하길 원한다." [36쪽]

     

    휴거 사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이제는 트럼프마저도 좌파라는 둥, 트럼프가 다른 인물로 바뀌었다는 둥, 심지어 한강에 미군 항공모함이 정박해 있다는 둥, 아직도 '종말이 머지 않았다'고 외치는 광야의 선지자들이 여전히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미움의 기독교적 정신이 아닌 사랑의 기독교적 정신이 충만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아참, 그리고, 관세 협상이 알찬 디테일로 잘 진행되기를...


    (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
    #문화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문형준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22)


    이쯤에서 여러분 중 적어도 일부는 로렌스의 논지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가졌을 법도 합니다. 로렌스는 인간을 귀하고 천한 존재로 대놓고 나누고 있죠. '귀족의 기독교'와 '천민(아니, 실은 '민주주의자')의 기독교'를 구분하고 있기도 하고요.

     

    사실 이것은 <아포칼립스> 뿐 아니라 로렌스의 문학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 의식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개인인 자, 개인이 될 수 있는 자, 그런 고귀한 존재가 드물게 있고,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도 언어도 표정도 갖지 못한 채 집단으로 뒤엉켜 함성을 지르는 '덩어리'일 뿐인, 그런 관점인 것이죠.


    로렌스는 그런 군중들이 세계를 구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파괴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 "왜 그런가 하면, 사실 모든 점을 고려했을 때 그저 파괴적인 존재들이며 총체적 개인성을 가질 역량이 없는 방대한 인민대중에게 개인적 자아실현을 가르친다고 한들, 결국 그들 모두가 부러움에 사로잡히고, 억울해하며, 앙심을 품은 존재들이 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공감하는 이라면 누구나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진 파편성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적 총체성을 획득할 수 없는 이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집단적 총체성에 빠져드는 권력 사회를 만들려 한다.[252쪽]


    이 집단적 총체성 속에서 대중은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개인적 충족을 얻기 위해 애쓴다 해도, 그들은 본래 파편적이기에 실패할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서도 총체성을 얻지 못하기에 생긴 이 실패들은 부러움과 앙심으로 변모하게 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말했을 때 예수는 이 모든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범속한 대중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했으니, 이 대중의 좌우명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에 아무도 뭔가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253~254쪽]



    이 서슴없고 냉철한 대중 혐오는 당대에도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령 버트런드 러셀은 로렌스를 일컬어 '파시스트'라고 손가락질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사실 문언의 액면가만 놓고 보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기도 좀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어요. 실제로 다른 이를 '천민'으로 취급하며, 가령 투표권을 박탈하자던가 하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그건 좀 문제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주체'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틈에서 우르르 쓸려다니지 않을 거야' '나는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독립된 주체로서 살아가다 죽으리라', 이런 다짐을 하고 있는 게,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익숙하다못해 이제는 좀 식상해진 '영웅의 길' 같은 걸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신화학자 조지프 켐벨이 만들어서 헐리우드에 유통시킨, 그러니까 '영웅이 자신의 길을 떠나서 모험을 하고 더 나은 존재가 되어 돌아온다'는 그런 전형적 스토리를 생각해 보자는 거죠.

     

    로렌스는 이미 그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화적 양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 "오늘날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는 수천 마리의 작은 뱀들이 항상 그들을 물어 독을 푸는 반면, 위대하고 신성한 용은 무기력하다는 데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 용을 살려낼 수 없다. 용은 삶의 낮은 층위에서 깨어난다. 린드버그 같은 조종사나 뎀프시 같은 권투선수 속에서 잠시 동안 말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이 두 남자를 어떤 종류의 영웅적 행위로 이끈 것은 자그마한 금빛 뱀이다. 그러나 높은 층위에서는 위대한 용의 흔적도 어슴푸레한 빛도 보이지 않는다." [194쪽]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당연히 민주주의자로, 공화주의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좀 더 간지러운 표현을 쓰자면 영성의 차원에서는, 영웅의 길을 걸으며 귀족주의자로서의 어떤 꼿꼿함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요.

     

    요즘 (특히 MZ 세대 사이에) 불교와 참선, 수행 등이 유행한다는 것도 그런 맥락이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호흡을, 감각을, 망상을 '바라보며' 그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내가 되어, 어쩌면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로렌스의 용법을 빌자면 정확하게 귀족적이니까요. 적어도 그것은 묵시록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일 것입니다.

     

    >"예수의 기독교는 우리 본성 중 일부에만 적용된다.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큰 부분이 존재한다. 구세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이 부분을 계시록이 파고든다.

    >

    > 포기, 명상, 자기 인식의 종교들은 오직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본성 중 오직 일부에서만 개인적이다. 본성 중 또 다른 커다란 부분에 있어 그는 집단적이다.

    >

    > 포기, 명상, 자기 인식, 순수 도덕의 종교들은 개인을 위한 것인데, 그렇더라도 완전한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종교들은 인간 본성의 개인적 측면을 표현한다. 이 종교들은 본성의 개인적 측면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본성의 다른 측면, 즉 집단적 측면을 잘라내 버린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층은 언제나 비개인적이므로, 종교가 다른 측면에서 작동하는 것을 알기 위해선 그곳을 들여다보면 된다." [31쪽]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둘 필요가 있겠네요. 로렌스가 무조건 '귀족의 기독교'를 옹호하고, '평민의 기독교'를 멸시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라면 지금껏 이토록 오래 사랑받는 작가로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평민의 기독교, 그 우악스러운 익명의 함성의 기독교, 속에서도 뭔가 우리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뭐가 있긴 있다 이런 이야기죠. 우리는 뭘 놓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묵시록 속에서 어떻게 발견될까요?



    #환경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문형준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22)


    묵시록은 '거대한 힘'과 합일하여 '저 나쁜 새끼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은, 작고 시시한 존재들의 집단적 열망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텍스트입니다. 적어도 로렌스가 보기에는 그런 책입니다.

     

    여기서 '작고 시시한 존재들의 집단적 열망'은 끔찍한 것이죠. '저 나쁜 새끼들을 손 안 대고 코 풀고 싶다'는 허접하고 저열한 욕망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거대한 힘'과 하나가 된다는 그 자체는 어떨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로렌스는 '민중의 기독교'가 지니는 긍정적 측면을 발견하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 현대인은, 자연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는데만 익숙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옛 문명들이 태양을 봤듯이 우리도 그렇게 태양을 보고 있다고 상상하지 말자. 우리가 보는 것이란 뜨거운 가스 덩어리로 쪼그라든, 조그마한 과학적 발광체일 뿐이다. 에스겔과 요한 이전의 시대에 태양은 여전히 위대한 실제였고, 인간들은 그로부터 힘과 광휘를 흡수했으며, 그에게 경의와 찬사와 감사를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그 결합은 망가졌고, 감응의 중심부responsive centres는 죽어버렸다. 우리의 태양은 고대인들의 우주적 태양과는 지극히 다른, 훨씬 더 사소해진 사물일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라 불리는 것을 볼 수는 있겠지만, 헬리오스는 영원히 잃어버렸고, 하물며 칼데아인들의 위대한 구체球體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주와의 감응적 결합 관계에서 벗어남으로써 그것을 상실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주된 비극이다. 우주와 위대하게 함께 살면서 우주에 의해 영광을 입었던 고대에 비한다면, 옹졸하고 하찮은 우리의 자연 사랑 -- 자연이라니!! -- 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53쪽]



    감동적인 문장이죠. 하이데거를 비롯해 여러 철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고요. 모든 것을 합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만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말하자면 '존재자'에 눈이 팔려 '존재'를 잊었다는 그런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과, 문학의 모더니즘은 이런 지점에서도 서로 만납니다.

     

    아무튼, 이 감동적인 관점, 단지 관찰과 향유의 대상이 아닌 더 큰 무언가로서, 총체적인 힘과 권능의 발현체인 자연을 되찾다는 말은, 오늘날의 환경운동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요즘 일본인들이 한국에 등산을 하러 많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왜? 일본의 '자연'은 한국의 그것과 달리 정말 자연으로서의 거대함을 간직하고 있어서, 야생 곰이 많거든요.

     

    야생 곰에 의해 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아무리 큰 산이어도 기껏해야 멧돼지 정도가 한계이니, 언제건 어디에서건 마음 편히 등산을 즐길 수 있죠.

     

    이 대목에서 문학 애호가 노 모씨와 사회 평론가 노 모씨의 입장이 갈립니다. 분명 저는 로렌스가 말한 저 '우주의 회복'에 감동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구현될 때 그게 꼭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단 말이에요.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방에서 현대 문명의 정점인 노트북에 타자를 치며, 인터넷으로 음악 듣는 주제에, 내가 '우주와의 합일' 같은 소리를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럼 뭐 자연인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스스로에게 또 제기되는데...)

     

    이야기를 좀 수습해 봅시다. 우리, 현대인들은, 분명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렸습니다. 아마 그것을 진정, 고대인들처럼 되찾을 방법 따위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우주가 우주로, 자연이 자연으로, 동물이 동물로 살아 숨쉬던 그 존엄 뿐 아니라 그 위험까지도 이해해야, '지리산에 반달곰을 풀어주자' 같은 주장에 대해서도, 단지 '곰이 불쌍하다 아니다' 같은 차원을 넘어서는 논의가 가능해지지 않을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 한 권을 놓고 200자 원고지 45매 분량에 달하는 이야기를 떠들어 보았습니다. 그만큼 좋은 책이니 여러분도 꼭, 은 아니어도 많이 심심하실 때 한번쯤 읽어주세요. 판형도 포켓북 사이즈에 번역도 잘 되어 있는 좋은 책입니다.

     

    (이미 죽었지만) D. H. 로렌스 화이팅! 그리고 오호츠크 독자분들도 화이팅!



    #퇴근송
    Leonard Cohen - Hallelujah (1984)

    다양한 가사 해석 중 하나.
      오늘 게스트 레터를 쓰느라 수고해주신 노정태 님을 위해 editor@55check.com으로 의견과 소감을 보내주세요. 

      #이벤트

      오호츠크와 함께 하는 다큐 '송송송 가족여행' 서울 GV


      2025년 9월 10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영화상영 약 90분)
      서울 명동 CGV 시네라이브러리

      토크: 송진욱 감독 & family
      사회: 조진서 (오호츠크 리포트)

      오호츠크 리포트 야구모자, '노플라잇 세계여행' 책 등 경품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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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설명: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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