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게도 지난 레터 이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왜 그런가 짚어보니 우선 외출 약속을 줄였고, 소설책을 틈틈이 읽기 시작했고(추리소설 너무 재밌어요…), 특히 조금씩이라도 매일 하는 작업이 큰 것 같네요.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무섭고 재밌습니다. 할 때마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요.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데, 실제 내 손을 통해서는 느리게 드러나는 속도가 답답하기도 하고요. 그것조차 100% 구현이 되지 않는 느낌이 들 때는 조금 절망하기도 합니다. 어떤 작가든 작업을 이어간다는 건 새롭게 세계를 만들어 내는 창조와 같다고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언어화시켜서 세상과 연결해야 하고 내보여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작업에 관한 생각이 커지는 모습에서, 드디어 이 작업자의 생활을 조금씩 본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가 싶습니다.
어느새 이 삶을 시작한 지도 반년을 훌쩍 넘어갑니다. 본업존잘이 유구한 추구미인지라, 회사원이었을 때는 항상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과란 곧 타인의(특히 회사에서의 윗사람) 인정이었죠. 그러다 언제나 사이드 프로젝트로 밀렸던, 제가 진짜로 원해 마지 않았던 회화 작업을 본업으로 삼자고 다짐했을 때 이걸 ‘직업’이라고 말해야 하는 시점에서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저조차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저는 자신을 위할 줄 몰랐고, 자존감인 줄만 알았던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니 사실 그건 자존심이었습니다. ‘본업’의 스트레스와 불만족감을 작업으로 풀었었는데 작업이 본업이 되니 온통 뒤죽박죽에, 기껏 나눠둔 페르소나가 억지로 뭉쳐지면서 둥둥 떠버리다 못해 줄줄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진득하게 안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끊이지 않고 일을 벌이는 천성과 사회생활이란 곧 밖으로 향해야 한다는 회사원의 관성이 자꾸만 새치기하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충돌이 일어났죠. 다행히도 그런 과정에도 적응해 가면서 시간 관리 시스템을 다듬고, SNS 시간을 카운트해서 조금씩 줄이고, 하루 할 일의 개수를 손에 꼽게 줄이는 대신 각각의 업무에 걸리는 시간을 더해주면서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하루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있습니다. 일이 마음에 들지 않게 흘러갈 때 의식적으로 일단 잊고 넘기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물론 작업을 본업으로 스스로 인정해 주기 위해서 실제로 손도 움직이고 있고요. 대다수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또 어느 하루는 지겹도록 길 때가 있습니다. 무탈하게 긴 하루는 흔치 않아서, 유수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런 하루를 마주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상을 유지할수록 이런 하루를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일상에 심플한 식사가 빠질 수 없겠죠. 요즘은 파스타도 냉장고에서 잡히는 재료들만 볶아서 금세 해 먹곤 합니다. 간은 소금으로만 하고 가끔 페페론치노나 새우젓으로 맛에 재미를 더하기도 하고요. 각 재료를 볶을 때마다 소금간을 하고, 파스타를 적당한 시간에 간간한 면수로 삶기만 해도 충분히 맛있는 파스타가 만들어 집니다. 간단하고 쉬워요. 그렇지만 배고프다고 너무 빨리 볶아도 맛이 덜 들고, 면수의 양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질척이거나 뻑뻑한 식감이 되어버리죠. 자칫 삐끗하면 ‘역시 사먹는 게 맛있다’의 집밥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일상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씩 해보는 거예요. 파스타를 삶는 시간 동안 채소를 여유 있게 볶는다거나, (설거지거리가 늘어나는 건 예외로 하자구요) 마늘이 없다면 오일에 파를 약하게 오래 볶아서 파의 감칠맛을 대신 뽑아낸다거나, 소금 대신 발효 조미료와 간장을 써본다거나… 한꺼번에 많이 시도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으니까 한 번에 하나씩이요. 그게 오히려 더 빨리 성취할 수도 있는 길이라는 걸 지금 제가 어렴풋 깨닫고 있거든요. 저도 그래서 한동안은 같은 레시피의 파스타만 해 먹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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