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통폐합도 좀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많아서 숫자를 못 세겠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 발언을 계기로 공공기관 통폐합과 기능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공공기관의 유사·중복 기능을 점검하고 역할을 재설계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기관이 많다’는 진단이 곧바로 기관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은 국민에게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가의 산업·사회정책과 국민 안전, 지역균형발전 등 시장에 맡기기 어려운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통폐합·기능개혁은 몇 개 기관을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공공서비스와 국가의 책임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동자의 고용과 노동조건, 지역사회와 국민의 서비스 접근성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와 양대노총 공공부문 노동계는 공공기관 구조개편에 관한 공식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노동계는 정부가 대상기관과 개편방향을 먼저 정한 뒤 의견을 듣는 방식이 아니라, 구조개편에 적용할 공통 원칙과 절차부터 노정이 합의해야 한다며 3대 원칙·10대 요구를 제시했다.
숫자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
공공기관 개혁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몇 개를 줄일 것인가”가 아니다. 해당 기관이 왜 설립됐는지, 어떤 공공서비스와 국가 전략기능을 수행하는지, 통폐합이 국민과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기관 수나 외형적인 기능 유사성만으로 통폐합을 추진하면 전문성과 정책 수행 역량이 훼손되고, 업무 공백과 서비스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국민 안전, 에너지·교통·환경, 사회보장, 산업 육성, 지역균형발전은 단기적인 재무성과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따라서 구조개편은 예산절감, 조직축소, 인력감축 같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기관의 설립 목적, 산업적 특성, 국민 안전, 지역경제 영향, 국가 전략기능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추진해야 한다.
첫 번째 원칙: 공공성 강화 중심의 구조개편
노동계가 제시한 첫 번째 원칙은 공공성과 국가 전략기능을 강화하는 구조개편이다.
대상기관을 정하기 전에 공공서비스 접근성, 국민 안전, 기관 전문성, 지역경제, 노동자의 고용과 노동강도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통폐합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전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기관 간 협업, 공동사업, 기능조정, 인력과 기능 보강으로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이를 우선 검토해야 한다.
기능개혁이 민영화·시장화·외주화로 이어져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필수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시스템 통합과 교육훈련, 노동조건 조정에 필요한 비용도 기관 자체 재원이나 기존 사업예산에 전가하지 말고 정부가 별도로 지원해야 한다.
두 번째 원칙: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
구조개편의 정당성이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통폐합과 기능개혁을 이유로 한 직·간접적인 인력감축과 인위적 구조조정을 금지하고,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직, 자회사, 협력업체, 민간위탁, 용역·도급 노동자까지 총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기존 기관의 총정원도 유지해야 한다. 인력 재배치가 필요하다면 인력이 부족한 현장과 신규 공공사업에 우선 배치하고, 직무·근무지·소속 변경 시 당사자의 의견수렴과 노동조합의 사전협의를 보장해야 한다.
고용만 유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임금, 복리후생, 근속, 승진, 직급·호봉 등 기존 노동조건이 후퇴해서는 안 되며, 기관 간 격차는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로 해소해야 한다.
기존 단체협약과 노사합의도 포괄적으로 승계해야 한다. 통합 이후의 노동조건은 정부의 일방적인 지침이 아니라 노사 간 자율교섭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세 번째 원칙: 실질적·중층적 노정협의
대상기관과 개편방향을 사실상 확정한 뒤 노동계에 설명하는 것은 실질적인 협의가 아니다. 정책의 검토·결정·이행·평가 전 과정에 노동조합과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중앙에서는 정부와 양대노총·산별연맹이 기본원칙과 대상기관 선정기준, 고용·노동조건 보호원칙을 협의해야 한다. 산업·부문 단위에서는 산업정책과 공공서비스 영향을, 기관 단위에서는 통폐합 필요성과 사전 영향평가,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기관별 노사교섭에서는 구체적인 고용과 노동조건을 합의해야 한다.
노정 합의문과 기관별 이행계획, 고용·노동조건 보호협약을 마련하고, 통폐합 이후에는 노정이 참여하는 사후점검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정부 답변, 선언을 넘어 제도로
정부는 이번 통폐합·기능개혁이 예산절감이나 인력감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총정원을 유지하고 노동조건 변화를 최소화하겠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관 운영체계와 기관장 자리, 공통 조직·업무 조정도 검토하고 있으며 민영화나 외주화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 답변은 아직 구두 또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고용안정, 총정원 유지, 노동조건 상향평준화, 단체협약 승계, 재정지원, 총인건비 특례와 기관별 노정협의가 공식 문서와 제도로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약속이 실제 권리로 이어지려면 노정 합의문과 기관별 보호협약, 재정지원 계획, 사후점검 체계로 구체화해야 한다.
공공연맹의 시사점
공공기관 개혁은 몇 개 기관을 줄였는지, 조직과 기관장 자리를 얼마나 조정했는지로 평가돼서는 안 된다.
첫째, 개편의 최우선 기준은 공공서비스와 국가 전략기능의 강화여야 한다. 통폐합은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협업과 공동사업, 기능 보강이 더 적절하다면 이를 우선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은 부수적 고려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숙련된 노동자의 고용과 권리가 안정적으로 보장돼야 기관의 전문성과 공공서비스의 질도 유지할 수 있다.
셋째, 구조개편은 정부의 속도전이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정보공개와 중층적인 노정협의를 통해 추진돼야 한다.
공공기관 통폐합·기능개혁의 기준은 숫자가 아니다. 공공성과 국가 전략기능을 강화하고,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가가 진짜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