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핑이 좋아서 22 | 박찬은
내가 주말마다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하는 이유
그간 꾸역꾸역 목울대로 넘어 삼켰던 눈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드러나는 순간은 오랜만에 마주한 바닷가 앞이다. 고뇌를 쓸어갈 준비가 된 바다는 해결하지도 못할 문제에 버둥대는 나를 차가운 파도로 정신 차리게 한다. 오늘의 캠핑 장소는 서울에서 400킬로미터 거리의 해남. 워낙 땅끝 전망대로 유명하긴 하지만 땅끝마을에서 인증샷만 찍고 돌아선다면 정작 중요한 해남의 8할은 놓치는 것이 된다. 그 중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로 꼽히는 중리마을의 낙조도 있다.
해질 무렵 땅끝마을을 향해 77번 해안선 국도를 달리다 보면 '가던 길을 되돌아서게 하는' 낙조를 만난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면 서쪽 하늘이 시시각각 붉은 색의 농도가 달라지는 기교를 부린다. 수줍게 떨어져 있던 죽도와 증도 두 섬이 발갛게 물들자 이내 그 사이로 해가 고꾸라진다. 세상 일 다 내려놓게 하는 일몰이다. 마치 <마션>의 화성에 온 듯한 착각을 주는, 인간계가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무겁게 꾸린 배낭은 넘어진 김에 우는 것처럼 '옳다구나' 하고 털썩 모래톱에 몸을 내려놓는다.
중리마을은 바다를 향해 납작 엎드린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담장에는 향긋한 등나무와 선인장이 서 있고, 조붓하게 들어오는 파도가 중리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리면 중리마을 사람들은 조개와 고둥, 게를 주우러 나온다. 텐트 피칭을 마친 나도 그들을 따라 양동이를 들고 갯벌 체험에 나섰다. 하지만 촌스러운 서울 것의 눈으로는 검은 뻘 때문에 어떤 것이 바지락인지, 어떤 것이 돌인지 당최 알 수 없다. 이 통을 언제 채우나 싶은데,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주민들은 막 주워 담아도 어느새 한 통을 가득 채운다. 막 새 통을 받아 든 것마냥 빈약한 양동이를 들고 사이트로 터덜터덜 걸어온다.
홀로 바닷가에 테이블을 펴는 날 보며 지나가던 주민 한 무리가 수고롭게 잡은 바지락 한 무더기를 안겨준다.
- 한번 잡숴봐.
- 헉, 너무 많은데, 주셔도 되요?
- 집에도 많이 있어. 서울서 왔어?
- 네, 감사합니다”
- 캠핑 혀? 아따, 아가씨 솔찬하네잉? 먹을 건 있고?
바지락을 준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바지락 양동이를 안겼던 아주머니는 직접 담갔다는 알싸한 총각무와 막걸리까지 텐트로 가져다 주었다. 땅끝이라 막걸리 맛도 센가. 침낭에 들어가도 취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안되겠다. 좀 더 걸어야겠다. 다시 별을 보며 모래톱을 걷기 시작했다. 어선의 불빛이 밝다. 멀리서 흔들리는 플래시 불빛이 보인다. 내 텐트 주변이다. 덜컥 겁이 난다.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내 텐트에 누가 온 거지.
- 괜찮아요?
플래시의 주인공은 ‘여자 혼자 아무래도 걱정된다고, 괜찮으면 비어있는 딸 방에 와서 자라’는 말을 전하러 온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괜찮다고 겨우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보낸 후, 침낭에 누운 나는 예감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아주 오래 가슴앓이를 할 것임을. 조용한 마을에선 인심의 잔향이 더 오래 퍼지는 법이니까. 해남 땅끝마을의 떠들썩함과 송호해수욕장의 상혼이 싫은 사람은 중리마을의 고즈넉한 다정함에 안겨보는 것도 좋겠다. 대충 가서 뭘 해도 실패를 모르는 여행지들이 있다. 반면 굳이 장점을 뽑아내야 하는 여행지도 있다. 마주앉은 이들이 쓸데없는 말로 생채기를 내거나, 취한 이들로 시끄러운 캠핑장에서 마음 같지 않은 휴식을 억지로 취해야 할 때도 물론 있다. 솔로 캠핑을 할 땐 내 텐트 주변을 어른거리는 플래시 같은 불안함도 존재하지만, 중리마을 아주머니처럼 친절한 이웃을 만나는 일도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부산하게 찾아다니다 보면 도시에서 쌓인 얄팍한 불안들은 쉽사리 씻겨나간다. 혼술을 해도 이것저것 묻지 않는 적당한 거리의 심야 식당, 셔터 소리 말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책방, 또는 100% 완벽한 솥밥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캠핑장을 떠나 해남에서 유명하다는 솥밥집엘 왔다. 혼자 온 여행자가 별로 없는 식당 안. 솥밥은 20분 전 전화로 미리 주문했다. 밥공기의 이마를 열자 얼굴로 열기가 훅 끼친다. 잔뜩 팽창한 채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밥알들이 지친 혓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며 혀를 찜질하니 찬바람에 흔들리던 몸이 방금 닻 내린 배처럼 나부낌을 멈춘다. 보니 전날 400킬로미터를 운전했던 피곤함은 타노스가 핑거스냅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은 ‘반짝’ 멋진 풍경을 보러 5시간 동안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서 캠핑을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영혼을 위로하는 솥밥을 만나거나, 조용한 갯마을 사람들이 이방인 캠퍼에게 베푸는 묵은지를 먹어 보면 안다. 뚜벅뚜벅 걸어서 그 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낙조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와 타지인을 곤경에서 구해내는 이웃을 만난 나는 불안에 떨며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했던 나와는 단연코 달라져 있다는 것을. 중리마을의 낙조와 넉넉한 달마산, 반찬을 건네주던 사람들. 땅끝에서 만난 호위무사들은 나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해남, 끝인 줄 알았더니 시작이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