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084_26.09.18.
모호 성원 / 모순 영인

살면서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음악, 사진 하나씩만 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2층에서 계단 하나를 올라가면 옥상이 있다. 덕분에 옥상에 습관처럼 올라가곤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항상 열려 있는 옥상 문 한쪽에 말벌이 몇 마리쯤이 가만히 모여 있었다. 날이 더워서 그늘에서 쉬는 건가 싶고 딱히 날아다니거나 공격성이 있어 보이지 않아서 그냥 두고 지나갈때마다 친밀감을 쌓아가던 차였다. 그런데 어제, 겨우 세 마리 남짓처럼 보였던 무리가 스무 마리 넘게 늘어나 있었다. 역시나 날아다니거나 나를 공격하진 않았지만 도대체 얘들이 왜 이러는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아뿔싸. 8월부터 9월 사이, 말벌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모여 집을 만든다고 한다. 겨우 세 마리 정도 보이던 건 문과 벽 틈새에 집을 만드는 벌들의 보초를 서는 녀석들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하나 한참 고민하고 검색하다가 결국 119에 전화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난생 처음 불러보는 119가 말벌집 제거라니.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옥상에 말벌집이 생겼다고 말했다. 10분도 되지 않아 골목에 큰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너무 큰 소방차가 출동해 소방대원이 네 명이나 차에서 내렸다. 어쩐지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머쓱하게 옥상으로 안내했다. '잠시 내려가 계시죠' 하는 듬직한 말과 함께 얼마 뒤 불을 뿜는 소리가 들리고 금방 넷이 내려왔다. 집에는 얼려둔 짜요짜요 밖에 드릴 것이 없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를 두고 소방차는 골목을 떠났다. 소방차가 떠나고 조심스레 옥상으로 올라갔다. 벌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집에서 집을 몰아내버린 기분이었다. 말벌도 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미안한 일만 생기는구나. 


by 모호

1. 금주의 다큐멘터리
<블루> by 모호

2. 금주의 음악 앨범
<3>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사진찍자> by 모순
금주의 다큐멘터리

블루

by 모호

제목  블루

감독  데릭 저먼

공개  1993

길이  1시간 19분

관람  유튜브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다. 교양 만화책에서 강아지가 보는 세상과 파리가 보는 세상 사진을 보고 난 이후부터였다. 붉은색은 붉은색이 아니고 파란색은 파란색이 아니고. 연필은 연필의 모습이 아닐수도 있고 물컵은 물컵의 모습이 아닐수도 있고. 그런 의심이 들면 아주 무서워져서 주변의 것들,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나 필통 같은 것들을 한 번 꼭 쥐고 다시 놓곤 했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며 수업 시간에 눈에 상이 맺히고 색이 나게 보이는 이유를 전부 배웠지만, 나는 마치 음모론자처럼 아직도 어렸을 때 하던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자고 일어났을 때 세상이 강아지가 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당황하지 말자고. 당연한 일이 아닐수도 있다고. 

극장에는 스피커도 있고 객석도 있고 영사기도 있지만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스크린 쪽을 바라보고 있다. 데릭 저먼은 그런 영화를 만드는 영화 감독이었다. 하지만 데릭 저먼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끝내 시력을 거의 잃었다. '블루'는 어렴풋한 파란색 계열의 색 말곤 보이지 않던 데릭 저먼의 마지막 영화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파란색 화면만 나온다. '자연적'인 색이 아닌 이 블루의 쨍한 채도에 화면이 꽉 차고 어둠도 이내 파랗게 된다. 그리고 음악과 목소리들이 나온다. 데릭 저먼과 절친했던 배우들의 보이스 오버는 파랑으로 가득 찬 화면 아래에서 데릭 저먼의 회고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을 감은 것만 같은 파랑 속에서 영화의 이야기들을 조립하고 있으면 데릭 저먼의 삶과 그가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다시 구축하는 '나'에 대해 상상하게 되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음이 놓여서였다. 파랑 속에서도 기어코 존재와 진실을 보는 데릭 저먼의 용기와 사랑 때문에 더 이상 무언가를 꼭 쥐어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든다.
금주의 음악 앨범
3
by 모호
트랙리스트
1. 주의사항
2. 탐구생활
3. 재건축
4. I Give Good Energy
5. 핫소스
6. 느낄거야
7. 누구보단
8. 어른에게
9. 싸움났어
10. 하느님 내일은 날 도와줘
11. 없는세상
12. 바이러스의 편지
앨범  3
아티스트  향니
발매  2019
길이  40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향니 2집 '3'의 티셔츠를 가지고 있다. 가슴팍에 작고 네모낳게 앨범 아트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흰 티셔츠. 이 티셔츠를 입고 4년 전쯤의 펜타포트를 갔던 기억이 난다. 고백하자면 향니 티셔츠는 사려고 산 건 아니었다. 국내 인디 가수들의 MD를 파는 어느 브랜드에서 다른 아티스트의 티셔츠를 주문했는데 향니 티셔츠가 잘못 배송왔다. 티셔츠와 동봉된 이 앨범의 싸인 씨디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옷을 뜯어봤다가 뜻밖의 싸인 씨디를 받아들고 크게 당황했다. 고객센터에 바로 교환을 문의했다. 고객센터에선 내가 원래 주문했던 티셔츠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럼 이 향니 티셔츠와 씨디는 어쩌면 될까요? 가지셔도 됩니다. 예?
그렇게 내가 가지게 된 첫 아티스트 친필 사인 씨디는 향니의 '3'이 되었다. 여태까지도 가지고 있는 싸인 씨디는 사전 구매해서 친필 싸인이 들어있던 안다영 1집과 이 앨범 뿐이다. 어쩐지 향니의 광팬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티셔츠를 오배송 받고 난 이후로 향니의 음악을 조금 열심히 들었다. 막상 배송받은 원래 주문한 티셔츠는 묘하게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이 향니 티셔츠는 어쩐지 몸에 착 감겨서 기분에 상관없이 꽤 자주 입고 다니곤 했다. 얼떨결에 향니에 감겨버린 나는 이 앨범에도 조금 중독되었다. 아직도 핫소스를 먹을 일이 생기면 머릿 속에 5번 트랙 핫소스가 자동재생된다.  

어느덧 7년이 지나버린 지금, 향니 티셔츠는 행방불명이다. 분명 내가 버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오래 되어서 프린팅이 연해지고 낡은 이 티셔츠는 버릴 수가 없어서 언제부턴가 집에서 잠옷으로 입곤 했었다. 오배송 받은 티셔츠와 얼떨결에 중독되어버린 핫소스. 이런 우연이 좀처럼 요새는 없어서 그런지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을 티셔츠와 앨범이 그리워졌다.
금주의 사진
사진찍자
by 모순
어린이들은 카메라를 들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외려 찍어달라고 카메라 앞에 뛰어든다. 그리고 해사하게 웃는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자아를 인지하고, 세상은 사람들만큼 자아들로 가득채워져 있으며, 그것들이 반드시 순수해야할 당위는 없고, 때로는 좋은 취지가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된다. 그렇게 카메라 앞에 선다는 행동이 단지, 오늘의 내 모습을 나중에 보고 싶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될 때 점점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나는 한술 더떠서 이제 카메라 뒤로 숨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는 이제는 유령의 말이 되어가는 것 같다. 테레비도 힘을 잃고, 자아도 힘을 잃어만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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