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뷔하신 지 4년, 첫 시집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펴내시는 소회가 궁금합니다.
시집이 나오면서 최근에 새집으로 이사했어요. 저만의 첫 집이죠. 왜 인생의 나쁜 일, 좋은 일, 바쁜 일은 항상 떼로 같이 몰려다닐까요? 올해는 태어나 가장 바빴던 한 해였어요. 최악을 견디라고 최선이 주어졌고, 그사이 어지러운 간극에서 행여 길을 잃을까, 바쁜 일이 정신없이 생겼죠. 불꽃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던 시간—터널 끝 빛만 보면서 달렸어요.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장 시궁창에 있을 때 출간 소식을 전해들었어요. 그때, 시가 기어코 나를 건져올리는구나, 했어요. 이제 시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장을 탈고한 기분이에요. 노자가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말했듯이, 말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닐진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굳이 이름이 필요했어요. 세상에 하나의 이름이 생겼으니 나는 드디어 이 이름 아닌 모든 것이 될 수 있겠구나, 놓아줄 수 있겠구나, 작은 새야, 멀리 멀리 날아가렴, 그런 생각이에요.
2. 서울에서 태어나 뉴질랜드, 영국을 거쳐 현재는 호주에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Topology|토폴로지―바람」과 「Topology|토폴로지―Wind Wishes」처럼 한국어와 영어 시가 함께 시집의 문을 여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중 언어를 쓰시고,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시인님의 일상은, 그리고 글쓰기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제가 좀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친구들이 “어느 나라가 집이야?” 물으면 저는 “Pacific Ocean?” 그래요. 이동, 좌표, 방향, 경계, 장소, 이런 유목의 언어를 늘 체화하면서 살아왔어요. 집을 만들고 싶어서 건축을 했고요. 그건 물리적, 지리적인 의미를 넘어 제 정체성과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처럼 양쪽이 다 집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어느 쪽도 온전한 집이 아닌 사람들은 터가 아니라 길 자체가 집이 돼요. 제 집의 질료는 이 길을 걷는 저의 눈빛과 자세이고, 제가 찾은 집은 그 길 위에서 제가 만나 함께 텐트를 치고 모닥불의 온기를 나눴던 귀한 사람들이죠. 한때는 이런 저의 정체성을 경계인(Marginal Man)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바깥의 안쪽’(박술 시인 시 제목이기도 해요), 안쪽의 바깥이라고. 진정한 경계를 유지하려면 안팎의 극단을 충분히 오갈 수 있어야 하죠.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오롯이 견디면서 꼿꼿이 서 있을 때, 계속 흔들리고, 발밑을 의심하고, 다시 지반을 다지는 과정으로만, 나는 계속 경계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탄성이 다한 스프링이 결국 튕겨나감을 한번 경험한 요즘은, 생각이 다소 풀어졌어요. 가운데에서 버티고 있는 경계인이 아니라, 양극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텅 빈 공간의 좌표를 다 품고 훨훨 건너가는 사람, 중간자(In-betweener)로 나아가고 싶어요.
이중 언어의 시는 저의 이런 정체성과 발화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자 내용이에요. 번역시와 달리 출발어와 도착어가 없고, 동시에 창작이 일어나고, 순환되죠. 저처럼 이중 언어자의 언어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데요, 그래서 여기가 부서지면 저기에서 가져와 메우고 이런 식으로 종종 코드 스위칭이 일어나요. 이중 언어 시의 창작도 그렇게 진행되죠. 결핍과 과잉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진자처럼 왔다갔다하면서요. 언어와 언어 사이 이동이 일어날 때,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발생하는지, 어느 부분이 중첩되고, 어떤 틈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시면서 제 시를 읽어주시면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 피로한 여정을 그래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부서져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끝내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말을 저 스스로에게, 그리고 저와 비슷한 시간을 견뎌왔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3. 「물의 집」과 「크레바스 인 크레파스」 「크레파스 인 크레바스」 등을 읽어보면 건축가로서의 시쓰기란 무엇인지 엿보게 돼요. 시와 건축 두 분야에서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시 속의 공간, 공간 속의 시를 쓰고 싶다.’ 이 생각을 오래 간직하면서 집과 시를 지어왔는데요. 저는 시와 건축이 사실상 세계와 나 사이를 잇고 관계 짓기 위한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하나(건축)는 매크로한 렌즈로 보고, 하나(시)는 마이크로한 렌즈로 본다는 차이일 뿐이죠. 둘 다 허물기 위해서 구축하고, 구축하기 위해서 허물어요. 둘 다 벽을 세우지만, 정작 짓고 싶은 것은 사이의 빈 공간이고요. 사실 저는 scaffolding(비계)으로 뒤덮여서 이제 막 발생하기 시작하는 상태의 어린 건축, 그리고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자연으로 사라지는 상태의 늙은 건축을 완성된 건축보다 더 사랑하는데요. 그 이유는 전환의 시점에 놓인 공간에서, 시공간이 가진 운동성의 에너지가 가장 극화되기 때문이에요. 텅 빈 곳에 아직 기운으로 머무는 것. 안개처럼 서리는 것, 이슬처럼 맺히는 것…… 그것이 시 같아요. 어떤 마음이, 공간이 의미 있는 장소로 호명될 때, 그곳은 그에게 시가 되어 날아오르죠. 좋은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땅에 스며든 시를 고요히 듣는 것, 그 위에 사람의 이야기를 lightly, gently 얹는 것, 묶인 것을 풀고, 숨긴 것을 드러내면서 서로의 레이어가 조화롭게 공명하도록 조율하는 것일 뿐이에요. 저에게 시는, 여기에서 ‘땅’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바꾼 것과 비슷해요. 건축과 시의 이야기는 제가 만약 다음 책을 낼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더 진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4.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는 감각과 정서 면에서 마음을 파고드는 시였습니다. “나는 나를 씻고 씻길수록/ 하얗게 더러워졌어요 재미있었어요”라는 구절이 잊히지 않아요. 시집의 표제시가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그 밖에 마음이 가는 시 한 편이 있다면 꼽아주세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부끄럽지만 이 시는 저의 어릴 적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예요. 어릴 때 “넌 그렇게 조용하게 엉뚱한 아이였다” 하고 엄마가 종종 말해줬어요. 자신을 정화하고 싶어 계속 씻는 것이 자신을 결국 훼손시키는 것임을 아는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고개 돌릴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시작했어요. 어릴 적에 저는 텅 빈 방에서 계속 어두워지는 어둠을 골똘히 보곤 했었는데요. 크고 나서는 아, 내가 본 건 어둠이 아니었구나,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발광하는 사물의 빛이었구나 생각했어요. 이번 시집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슬픔을, 고통을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였어요. 제목을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로 정하면서, ‘씻기기’인가? ‘시키기’인가? 잠깐 헷갈렸는데요, 둘이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게 저는 좋아요. 무속에서 종이 인형은 액운을 막거나 망자의 영혼을 인도하거나, 부정을 대신 씻어내는 존재의 의미를 지닌대요. 저에게는 이 시집이 슬픔에 대한 씻김굿 같아서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표제로 정하고 싶었어요.
또 마음이 가는 시는 마지막에 실린 「탁본」인데요. 사실 시는 종이 인형을 씻기면서 어둠에 계속 담겨 있는 아이에게 어른이 된 제가 건네주는 이야기예요. 「탁본」에서 “이 세계의 피부를 한 겹 벗기고 싶어/ 벗기려다 한 겹 더 입히고야 말았지만”이라는 대목은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의 “나는 나를 씻고 씻길수록/ 하얗게 더러워졌어요 재미있었어요”라는 대목과 통하죠. 고통과 슬픔은 진술할수록 기억이나 개념으로 왜곡되어서 차마 말할 수 없어요. 감응이 없이 말한 고통은 이미 유적이 되어버린 부재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면, 살이 허물어지도록 씻어내야 한다면, 기어이 한 겹을 입혀야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제가 찾은 대답은 고통을 뚫고 건너가는 것이에요. 타인의 고통을 내 몸에 실어서 함께 아프고 견디는 것이에요. 언어 전에 삶이 선행할 것. 그래서 내 몸에 남은 흔적으로 말할 것. 구질구질한 삶을 기어이 뚫고 터져나오는 뾰족한 시로 말할 것. 그렇게 상처의 결을 만들어가겠다고 어린 그 아이에게 이제는 말해주고 싶어요.
5. 독자분들께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가 어떤 시집으로 가닿기를 바라시나요? 이 시집을 읽을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제 시의 집에 놀러와주셔서 고마워요. 여기 문턱에 서서, 당신을 오래 기다렸어요. 제 시집 『종이 인형 목욕시키기』를 읽으시면서 사라지는 것과 피어나는 것들에 다 눈 맞춰주세요. 시작과 끝이 아닌 ‘지금, 여기’를 포착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어주세요. 슬픔의 바다를 건너 당신에게 닿은 이 아이가 당신 옆에 앉아 계속 재잘거리기를, 당신의 세계를 통과하며 서로의 얼굴을 말갛게 씻기고 다시 태어나기를, 결국 우리가 끝없이 함께, 만 개의 종처럼 울리기를 믿고 바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