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나기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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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주말, 산책을 나섰다. 가장 볕이 뜨거운 한낮에 굽이굽이 90여 분을 걸었다. 왜 그런 짓을? 지겨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년 내내 터무니없이 적었던 강수량과 가뭄 또는 단수 뉴스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장마가 찾아온 지난주에는 옥상에 고인 물이 거실로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비가 멎자 생전 처음 보는 벌레가 짝짓기 하며 날아다니기에 이집트에 재앙을 알린 메뚜기 떼를 생각하며 밤낮으로 창틀을 소독했다. 무섭도록 가물다가 무섭도록 쏟아붓고 마침내 신종 벌레 집단을 출현시키는, 내가 손쓸 도리 없이 벌어지는 자연의 일들. 기후 변화라는 거대하고도 막연한 공포를 모처럼 실감하며 무력하게 집 안을 쓸고 닦았다. 장마와 벌레 떼에 이어 찾아온 폭염의 날에 밖으로 나선 것은 그런 무력감을 깨보려는 야심이었다.

산책은 잠시 기분을 괜찮게 해주었지만, 과연 자연은 상냥하지 않았다. 그사이 더위를 먹어 사흘 정도 빌빌거렸다. 평소 잘 견디던 온도에서 계속 열이 솟았고, 그런데도 이상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가만있지 못하고 부산을 떨었다. 틈만 나면 바닥을 쓸고 닦고, 배수구를 소독하고, 온 집 안의 제습제를 갈아 끼우고 주방 전자기기를 분해해 기름때를 빼면서 땀을 쏟아냈다. 지구가 더 이상 나를 여기에 살게 해줄 것 같지 않은 감각 속에서 이 15평 공간만이라도 닦고 닦아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였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신에게 바치는 공양의 노동이었는지 모르겠다.

먹은 더위가 며칠에 걸쳐 소화되면서 천천히 제정신을 찾았지만 폭염만 문제가 아니었다. 뉴스 속 정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고,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하고 전염병 재유행이 돌아올 거라고 했다. 유례없는 물가 상승이 보도되고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었으며, 식량 위기가 예견됐다. 잔잔한 불안이 폭염처럼 나를 에워싼 채 쭉 곁에 머물렀다. 동네에서 사랑받는 매운 냉면집은 오후 4시에도 만석이었다. 이상고온 시대의 사람들은 점심 먹고 커피 마신 뒤 냉면을 먹기 시작한 것일까? 겨우 배를 차갑게 채웠지만 가게를 나오는 순간 푹 익은 대기가 또다시 나를 포위했다. 무력한 채 구원을 바라듯 중얼거렸다. 더, 더, 더 차가운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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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춥다는 러시아 야쿠츠크로 피서를 시도했다. 봄에 읽다가 “한여름에 다시 읽을래”라고 메모해 둔 책을 펼쳤다. 야쿠츠크의 겨울은 영하 45~50℃ 정도로, 날아가던 작은 새가 얼어서 떨어지는 기온이다. 커다란 생선들을 바게트 빵처럼 세로로 꽂아두고 판매하는데, ‘상온’에서도 완전하게 얼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민들은 식수로 호수의 얼음을 녹여 먹는다. 호숫가에 쌓인 얼음덩어리에는 주인이 있어서 남의 얼음덩어리에는 서로 손대지 않는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이들은 자신의 얼음덩어리를 갖게 되는 걸까? 얼음덩어리라는 다섯 음절을 반복해 읽는 동안 조금 숨쉬기가 편해지는 듯했다.

그다음은 북극의 빙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북극은 결코 하얗지 않다. 책에는 수많은 빛깔을 내는 얼음들의 정경이 펼쳐진다. 수줍은 빙산과 단호한 빙산이 있다. 그 빙산을 낳는 빙하가 있다. 늙은 얼음과 어린 얼음이 공생하는 이 세계는 빛을 왜곡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시각보다 청각을 신뢰한다. 고위도 지방의 긴긴밤과 긴긴 낮, 극야와 백야. 백야의 계절 러시아에서는 서산에 걸리자마자 다시 동쪽으로 떠올랐다는 태양이 북극에서는 지지 않고 하늘을 돌고 또 돌았다. 

그 차이만큼 내가 북쪽으로 더 도망쳐 왔다는 걸 알았다. 비교적 굳건한 지구의 자전축, 인간이 멸종해도 영속할 땅을 생각하니 허깨비 같던 불안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동시에 극지방으로의 짧은 피서를 중단했다. 지금 나의 불안은 폭염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며, 피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인간의 지구 착취로 만년설이 녹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디딜 곳을 찾아 헤엄치다 지쳐 죽는 이야기를 아는 채로 얼음의 땅에서 위안을 구할 수는 없다. 러시아 호숫가에는 얼음덩어리가 얼마든지 평화롭게 쌓여 있겠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인간은 이웃 나라를 불사르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애초에 폭염을 핑계 삼은 내 불안과 위기감은 도망칠 수 없는 업보에서 왔다. 출퇴근에 이용할 수 있는 차가 있고, 집과 사무실에 에어컨이 있는 환경에 살면서 덥다고 엄살을 떠는 이유도 같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고 있기에 폭염의 죄의식에 압도당한 것이다. 

북극 꼭대기까지 가보고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서울의 7월이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환경 부담을 줄이는 미약한 실천을 이어가면서 자고 깨고 일한다. 좋은 글을 찾고 책을 만든다. 그리고 가끔 또 인간답게 도망간다. 우주로 가면 인간이 이론으로 가정할 수 있는 가장 차가운 온도인 절대영도(-273.15℃)를 만날 수 있다. 절대영도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것은 부메랑 성운으로, 지구에서 500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Writer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 <엘르> 2022년, 8월호 발췌



도망친 엄마들_요주의여성 #67
<로스트 도터>가 전하는 '엄마'에 관한 진실 

영화 〈로스트 도터〉

그리스 외딴섬으로 혼자 휴가를 온 중년의 대학교수 ‘레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눈에 어린 딸을 가진 젊은 엄마 ‘니나’가 들어옵니다. 보채는 아이를 돌보느라 지친 니나를 보면서 레다의 심연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니나의 딸이 아끼는 인형을 숨기고 돌려주지 않는 이상한 행동도 합니다. 20년 전 레다의 과거가 차차 드러나며 관객은 알게 됩니다. 그는 두 딸을 버리고 ‘도망친’ 엄마라는 것을.
 
매기 질렌할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 〈로스트 도터〉가 국내 개봉했습니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아이〉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작가가 영화 제작을 허락하며 내건 조건이 바로 “매기 질렌할이 직접 연출할 것”이었다고 하죠. 그렇게 메가폰을 잡게 된 매기 질렌할을 필두로 탁월한 여성 배우들이 합을 맞춘 영화는 묵직하다 못해 얼얼한 감동을 전합니다.
 
‘눈빛’만으로 흔들리고 무너지는 마음을 표현하는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니나’로 분한 다코타 존슨도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을 비치며 그를 새로 보게 합니다. 올리비아 콜맨이 직접 추천했다는, 젊은 시절의 레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는 그야말로 이 영화의 ‘보석 같은 발견’. 아이들을 응시하다 천천히 재킷을 입고 문을 열고 나서던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요.
〈로스트 도터〉의 다코타 존슨
〈로스트 도터〉의 제시 버클리

〈로스트 도터〉는 그동안 큰 목소리로 말해지지 않았던 ‘진실’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실은, 엄마들은,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걸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알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하루 24시간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작은 생명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된 일인지. 내 목표, 내 꿈과 미래가 멀어지고 내 존재가 흐릿해지는 것 같은 느낌. 숨 막히고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시간들. 영화 속 니나가 “지나가긴 하나요?(Is this going to pass?)”라고 묻는 질문의 뜻을.
 
영화 속에서 레다(올리비아 콜맨)는 말합니다. “나는 이상한 엄마예요(I’m an unnatural mother).” 이상한 엄마들의 고백은 예전에도 존재했습니다. 100여 년 전 나혜석은 〈모된 감상기〉에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했지요. 〈로스트 도터〉를 보면서 줌파 라히리의 책 〈저지대〉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저지대〉에도 ‘도망친 엄마’가 나오지요. 집에 아이를 혼자 두고 짧은 외출을 시도하며 해방감을 느끼는 ‘가우리’의 이야기. 두 작품 모두 엄마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변명하지 않습니다.
〈로스트 도터〉의 올리비아 콜맨

여성들은 긴 시간 동안 가부장 사회의 모성 신화에 짓눌려 살아왔습니다. ‘엄마’란 이름으로 출산과 육아의 굴레에 갇혀 영혼을 잃은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속박을 거부하고 자신을 찾아 나선 여성들은 ‘이기적’이고 ‘비정상’이라 비난받았지요. 도망친 엄마들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레다는 “너무 좋았어요(It felt amazing)”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란 걸 압니다. 20년이 지나고도 검은 바다 앞에서 휘청거릴 만큼 지독한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는걸. 남은 엄마도, 떠나간 엄마도, 완전한 해방은 없습니다.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로스트 도터〉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낍니다(매기 질렌할 감독 만세!). 제시 버클리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여성으로서 성장한 느낌”이라 말했지요. 저 역시 〈로스트 도터〉를 통해 딸이자 엄마, 여성으로서 내 안의 ‘일부’를 이해받은 기분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럴 거예요.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2년, 7월 웹기사 발췌



🌞여름나기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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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후덥지근한 올해 여름, 엘르보이스 구독자님들은 어떤 방식으로 무더운 더위를 물리치고 계시나요? 엘르보이스 담당자의 여름 나기 비결은 바로 1일 1빙수! 차가운 빙수로 몸을 식히고 집에 도착해 잠에 들면 한결 시원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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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신박한 여름나기 비법을 공유해 주신 3분께는 올 여름 머리가 깨질 만큼 시원한 투썸플레이스 오리지널 팥빙수를 보내드릴게요💚 
🔊지난 주 구독자 보이스🔊
매주 여러분의 목소리 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들의 소중한 피드백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으니 오늘의 <엘르보이스>가 어땠는 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 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우영우 얘기도 재밌었어요.

*으아 우정을 이렇게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문장으로 표현해 주시니까 아침부터 감수성이 확 살아나는 느낌이에요..!!! 구독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영우 리뷰 좋았습니다.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좋은 드라마가 시리즈로 제작되어 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앨리 맥빌 통한 의견에 공감했습니다.

*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반가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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