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작하고 본다.’
첫 줄을 이렇게 써본다.
보통 ‘이렇고 이런 주제로 써 주세요.’ 하는 청탁을 받아 원고를 쓴다. 매일 아침 보내는 레터는 메모장을 뒤적이며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정말 난감하다. 그래도 뭐라도 써야 한다. 마감을 해야 하니까. 마감이란 좋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물론 좋은 글을 쓰면 좋겠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매수의 글을 써내는 것이니까.
오늘처럼 막막할 때는 그냥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스프레소에 초콜릿을 씹어 먹으며, 요가 음악을 틀어놓고(요가를 하는 건 아니지만, 요가 음악을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 요가와 글쓰기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걸까?) 무작정 첫 줄을 쓰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일단 시작하고 본다’라는 문장부터 다짜고짜 썼다.
자, 그다음은 뭘 써야 할까? 모르겠다. 그래서 ‘첫 줄을 이렇게 써본다.’ 하고 다음 문장으로 썼다. 그다음은 또 뭘 써야 할까? 여전히 막막했다. 그래서 ’보통 이렇고 이런 주제로 써 주세요’ 하는 문장을 이어 썼다. 그렇게 겨우겨우 여기까지 써왔다. 와! 그러고 보니 벌써 500자를 넘었군. 잘 쓴 글은 아니지만(사실 엉망이지만), 중요한 건 일단 여기까지 썼다는 거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떻게든 문장이 나아간다. 마치 아이스 피켈로 빙벽을 찍으며 겨우겨우 올라가는 클라이머 같다. 어쨌든 이만큼 써놓고 보니, 글쓰기의 괴로움, 첫 문장의 아득함에 관한 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써왔으니까, 오늘은 ‘글도 처음엔 우격다짐이 필요하다’라는 주제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베란다로 나가 희미하게 밝아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이럴 땐 담배가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앞에 썼던 문장을 읽어 보니, ‘그래, 글쓰기엔 우격다짐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글쓰기나 연애나, 비즈니스나 처음엔 우격다짐이 필요한 법이다. 완벽한 계획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어느 만큼은 전진시켜 놓은 다음, 그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시작해야만 보이는 것이 있으니까. 시작도 하지 않고, “아직 정확한 계획도 없고, 확신도 없어.” 하고 말하는 건 어떻게 보면 비겁한 태도일 수도 있다.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니까 일단 밀어붙이고 봅니다! 이런 각오와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시작 단계에서는 더더욱. 하다 보면 보이는 것이 있고, 그때 그때 약간씩 방향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시작 단계에서는 손해 볼 것도 적다.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몇 문장만 지워버리는 되는 것이다.
연애도 그렇지 않을까? 저녁 여덟 시, 콜택시를 불러 보내드리는 것도 좋지만, 어떨 때는 “한 잔 더 할까요? 근처에 근사한 위스키 바가 있어요.” 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상대방은 “그때 당신이 너무 강력하게 밀어붙여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하는 변명을 준비해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음, 이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고.)
다시 첫 문장으로 가본다. ‘일단 시작하고 본다’라는 문장이 맨 앞에 있다. 그렇군, 거기서 시작해, 벌써 여기까지 왔군.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는데? 제법 그럴듯한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