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 노가리 클럽 is Everywhere : 덕질이 꽃피는 장소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는 유한한 그 거리가 상상 속에서만큼은 무한해집니다.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밤 비행기에서 읽을 때 그 재미가 극대화되는데요. 밤 비행기 탈 일이 요원한 요즘은 ‘온 방의 불을 끄고 촛불 하나만 켠 채로 읽기’를 추천합니다. 어두운 밤 하늘을 홀로 여행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이것이 노가리즈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도 직접 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콘텐츠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어디든 갈 수 있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도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덕질의 순기능이죠. 비록 내가 진짜 한 밤에 경비행기를 운전한 경험이 없더라도 그 엇비슷한 무언가를 느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뉴스레터에서는 각자가 사랑에 빠진 장소들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윻은 현실도피용 지옥행 티켓이 간절해 진 뮤지컬 <하데스 타운>, 희는 수풀 사이로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비밀의 숲>, 슬은 이 시국 우리가 더욱 눈을 떼선 안 되는 그곳의 이야기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세 작품은 이름에 특정 장소가 들어간다는 점 외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윤중로 벚나무보다 빠르게 노가리즈의 덕질이 꽃 핀 장소들로 떠날 준비 되셨나요? 노가리 클럽 두 번째 영업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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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하데스타운, 하데스타운입니다. 내리실 곳은 없습니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by 윻
티켓을 들고, 두터운 극장 문을 지나 무대만이 빛나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는 일련의 과정은 마치 여행을 떠올리게 합니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설렘은 그곳이 아니면 절대 경험할 수 없다는 점 역시 그렇죠. 그래서 어른의 현실이 힘들 때면 통장의 힘을 빌어 종종 극장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연차도 필요없고, 번거롭게 캐리어를 꾸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최근에 도망친 곳은 무려 ‘지옥’이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지옥같은 현실에서 진짜 지옥으로 도망을 치다니. 그런데 지옥문을 열어보니,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그리스더군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가는 *오르페우스와 봄과 여름은 지상에서, 가을과 겨울은 지하에서 남편 하데스와 함께하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펼쳐집니다.*그리스 신화가 낯선 분을 위해 부연 설명을 살짝 보태자면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으니까, 책임져” 짤에서 흥을 깼다가 다시 붙인 연주자가 바로 오르페우스입니다.
사실 저는 이 극을 볼 생각이 없었어요. 정말. 콘텐츠 고인물인 저에게 기원전 180년이라는 점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던데다 ‘성 스루(Sung-Through)’라는 점이 걸렸거든요. 대부분 뮤지컬에 대해 불호로 꼽는 부분이 연기를 하다 갑자기 노래를 한다는 점인데 노래로’만’ 진행을 한다는 게 아무리 저여도 선뜻 손이 안갔습니다. 하지만 성스루라는 이유로 이 작품을 포기하기엔 캐스팅이 너무 매력적이었죠(지나간 캐스팅은 뭐다?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반쯤은 꺼림직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에서 저 역시 에우리디케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 했습니다. 첫 넘버가 시작되자마자 마음을 모두 뺏겨버렸거든요. 하데스타운은 익숙한 신화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오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젊은 연인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조차 희미해진 오래된 연인으로 변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이야기 안에 의심과 불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물론, 때론 잔인하리만치 계속되는 삶과 희망까지 멋지게 노래하죠. 그리고 그 노래를 통해 말합니다. 이번엔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속 노래해야 한다고요.
노래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데스타운>의 인물들이 부른 노래들은 지쳐있는 지도 몰랐던 저에게까지 닿아 내일을 버틸 힘이 돼줬죠. <하데스타운>을 만든 브로드웨이의 연출가 레이첼 챠브킨은 토니상 수상 소감에서 권력이 우리를 어떻게 외롭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는데요. 한국 공연을 준비하며, 이 작품이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이어서 여러분께도 소개하며 영업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북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죠.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옆에서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끔찍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줄 겁니다”
하데스타운행 열차에 탑승하실 분은 서둘러 주세요. 올해 5월까지만 운행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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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여진(餘塵*)
드라마 <비밀의 숲> by 희
“뉴스를 보면 세상이 이렇게 나빠져도 되는 걸까 싶다. 거대한 구멍 하나가 내 발 밑에 있다.”*
근 몇년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합니다. 정의구현을 바라지만 나조차도 실천하기 어려운 세상이에요. 한때는 분노가 마치 연료인 것처럼, 땔감 삼아 활활 태우며 그 힘으로 움직이던 때도 있었어요. 얼마 안 가, 태운 건 땔감이 아니라 내 몸뚱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하얗게 타버린 나와 다르게, 세상은 한치의 미동도 없이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을 땐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줄기 빛처럼 한여진이라는 인물이 제 삶에 들어왔어요. 한여진(배두나 분)은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으로,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정이 아주 많은 강력계 형사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그녀의 명대사 한마디만 들으면 바로 성격을 알 수 있죠.
“저 사람들이 죄다 처음부터 잔인하고 악마여서 저러겠어요? 하다 보니까…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눈 감아주고 침묵하니까. 누구 하나만 제대로 부릅뜨고 짖어주면, 바꿀 수 있어요.”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며, 개썅마이웨이를 척척 걷는 이 멋진 여성은 등장과 동시에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드라마가 시즌 2를 맞이하면서, 한여진이 한줄기 빛처럼 여기는 롤모델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이름마저 찬란한 최빛(전혜진 분)이죠. 최빛은 경찰청 정보부 부장으로, 강한 야먕을 드러내는 능력캐입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여진의 마음은 왜 무너졌으며 최빛은 그를 어떻게 끌어올렸는지…를 다 설명하려면 여러분의 메일함이 터질 수도 있으니 과감하게 생략하겠습니다. 드라마로 확인하세요. 다만 이 둘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긴 꼭 해야겠어요. 최빛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마지막까지 여성 후배를 위해 강한 연대를 보여줬습니다.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직장에서 손가락질 받을 게 뻔한 후배를 위해, 힘을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어 여성 후배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죠.
어쩌면 제가 무력감의 구렁텅이에서 금세 빠져나와 다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주위의 언니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여진이 빛을 따라 걸은 것처럼, 깜깜한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 들 때마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 밑을 비춰주며 손을 잡아준 언니들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죠.* 우리 주변에, 직장에, 세상에 더 많은 최빛과 한여진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그래야 쫄래쫄래 언니들의 뒤를 따라 걷는 어린 여성들도 많이 생겨날 테니까요. 😁
*餘塵 남을 여, 티끌 진: 옛사람이 남긴 자취라는 뜻으로, 고전시가에서는 활용에 따라 ‘타인의 뒤를 잇다’는 뜻이로 쓰이기도 함
* 책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저)> 중 인용
* 책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황선우 저)>’ 중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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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시국일수록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by 슬
선거가 끝나고 많은 언론사가 이런 헤드라인을 걸었더군요. ‘혐오가 이겼다.’ SNS 비공개 글에서나 끼적일 만한 저열한 주장들이 광장에 울려 퍼지고, 심지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무력감을 느낀 요즘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치 드라마를 소개하는 게 맞나 고민도 됐어요. 짜증 나는 세상, 스크린 안에서만은 편하게 즐거워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잖아요? 그런데요. ‘세상은 망했어’를 읊조리며 절망 속에 푹 담겨 있을 때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 위로가 되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함께 나눠보고 싶어요.
이상 성욕 이슈로 공석이 된 문체부 장관 자리. 사격 금메달리스트 출신이자 전 보수 야당 국회의원 이정은(김성령 분)이 어쩌다 이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거수기 노릇만 하던 초임 의원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이 있습니다. ‘체수처(문화체육예술계 범죄 전담 수사처)’를 설립해 폭력과 비리로 피해 입은 체육인, 예술인들을 돕는 것이죠. 하지만 어디 정치가 좋은 뜻만으로 되나요. 이목과 지지를 한꺼번에 끌어낼 수 있는 ‘그림’이 필요하죠. 그림을 만들려면 라인도 적당히 타야 하고, 가끔은 적과 손도 잡아야 하며, 듣는 사람의 마음이 웅장해지는 언변도 요구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리스크도 없어야 한 대요. 가능합니까, 휴먼?
무엇보다 정치판과 그 주변엔 자기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득실댑니다. 극우 유튜브에 출연해 가짜 뉴스를 정성스럽게 퍼다 나르는 기자, 본인의 촌철살인에 자아도취 돼 있는 진보 논객, 음모론을 퍼뜨리며 집회를 주관하는 목사 등등. 지독한 하이퍼 리얼리즘이죠? 이들에게 정치 초짜 이정은은 찜 쪄 먹은 후에 뼈까지 발라 자신의 마이크에 걸어놓기 딱 좋은 제물입니다.
이들이 각자의 욕심과 명분으로 선택한 결과들이 얽히고설켜 난장으로 치닫는 모습은, 인류학자가 울고 갈 정도로 현실적인 동시에 광대뼈가 아플 정도로 웃깁니다. 더불어, 그림의 뒤편에서 나름의 직업윤리로 뛰어 다니는 ‘어공(어쩌다 공무원)’과 ‘늘공(직업 공무원)’들의 수습-탄식의 무한 루프까지 생생하게 펼쳐지죠.
보다 보면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 쓰리 샷 넣은 블랙 코미디의 결론은 정치 무용론이 아닙니다. 난세를 구할 영웅의 탄생 설화도 아닙니다. 얼떨결에 문체부 장관 자리에 오른 이정은이란 사람이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깨달아가며, 비로소 야망을 구체화한 한 문장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마지막 장면, 사격 금메달리스트인 그녀가 타깃을 조준하듯 청와대를 쳐다봅니다. 그 순간 짜릿했던 마음에 이제는 일종의 책임감도 함께 깃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정말 청와대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어제가 아닌 내일로 가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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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입엔영
여성서사 처돌이를 슬프게 한 허위매물 by 희
오징어 무침을 먹다가 “와 오징어다!”하고 한입 크게 씹었는데 도라지였을 때의 기분.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멜로가 체질>의 40대 버전이 나올 거라 기대했으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여성 셋을 모아 놓고 이런 서사밖에 못 만드나요? 내연녀로 의심받아 조강지처 부대에게 머리채 뜯기는 손예진, 본인이 하는 건 불륜이 아니라 사랑이라며 현실을 회피하는 전미도, 사랑 없인 못 살아 동네 식당을 기웃거리는 김지현이라니… 저기요, 지금 2002년 아니고 2022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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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날이 풀리는 걸 보니, 봄이 오려나 봅니다.
날은 따스해지고, 바람은 달콤해지고, 시선마다 꽃이 피어나는 계절...
네, 노상까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아싸!)
노상맥주가 제철인 봄에도
우리 함께 노가리 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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