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OUND Vol.94 〈대부분 오래 쓸 수 있는 것〉

조금 비뚤어진 상태로

님, 한 해의 허리춤에 다다랐습니다. 연초에 들이마신 큰 숨과 단단한 다짐은 벌써 힘을 다했는지 요즈음 괜스레 무기력하고, 무탈한 하루의 고요함을 따분한 것으로 여기고야 맙니다.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을 보내던 과거 혹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요. 이 헛헛함을 어떤 방식으로 무찌를지 고민하다가, 하던 것을 하지 않아 보기로 했습니다. 꾸준히 쓰던 일기장과 다이어리에는 빈칸들이 쌓여만 갑니다. 꾹 참던 모닝커피도 일주일에 몇 번은 마셔버렸고요. 십 년 만에 머리도 볶고 사진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고, 캔 맥주는 더 자주 비우고 있습니다(웃음). ‘삐딱선’이라기엔 비뚠 정도가 미약합니다만, 하나의 일상만 알던 저에게 반대편에 자리한 일상의 감각을 깨워보는 일이 소소하게 즐겁답니다. 오늘 님은 어떤 방식으로 조금 비뚤어져 보고 싶나요? 당찬 걸음에 힘을 싣고 싶은 마음으로, 《AROUND》 94호에서 유쾌한 작업 세계를 들려준 ‘혜원 세라믹’ 박혜원 작가의 이야기를 이어서 꺼내둡니다.

05.30. Another Story Here―책 너머 이야기
AROUND Vol.94 식탁 위에서(Time To Eat)

〈대부분 오래 쓸 수 있는 것〉 박혜원ㅡ혜원 세라믹


06.13. A Piece Of AROUND그때, 우리 주변 이야기

오늘 다시 보아도 좋을, 그때의 이야기를 소개해요


06.27. What We Like―취향을 나누는 마음

어라운드 사람들의 취향을 소개해요.

〈대부분 오래 쓸 수 있는 것〉

박혜원 ㅡ 혜원 세라믹

여느 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 문득 하나의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아주 ‘요상한’ 그릇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머러스한 이국의 사진 위에 놓인 접시는 알록달록하고, 그 이름이 아주 길거나 아주 짧았다. 접시 위에는 새빨간 토마토와 출렁이는 와인 잔, 노릇하게 구운 빵과 어느 날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놓여 있다. 이 요상한 작품을 완성한 이가 궁금해져 해방촌의 좁은 골목길로 향했다. 주렁주렁 늘어진 작업실의 문발을 밀고 들어서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세라믹 아티스트 박혜원이 보인다.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임정현 

접시와 냄비, 컵과 소서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 식기 위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어요?

시작은 조형 작업에 대한 매력이었어요. 꾸준히 하고 싶은데 작업을 위한 큰 공간이나 가마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고, 일상을 영위할 만한 돈을 벌면서도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 고민이 컸어요. 그즈음 우연히 미술관에서 피카소 전시를 보게 됐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피카소의 그림만 익숙하게 생각할 텐데 도자 작업물도 상당히 많거든요. 색감이 다채롭고 매력적인 회화의 느낌을 캔버스가 아니라 도자 위에서 구현해 낸 거죠. 제 고민에 답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어요.

 

직접 그리다 보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텐데요. 작품이지만 동시에 상품이니까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할 때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사람이 하는 거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혜원 세라믹을 구매하는 분들이 기계적으로 찍어낸 듯 전부 같은 모습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다만 색감 구현은 자로 찍어낸 듯 똑같이 유지하고 있어요. 색이 주는 기쁨을 보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주로 어떤 장면이 그림으로 남겨지나요?

그림들은 제 기록과도 같아요. 평범한 하루에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과의 대화, 떠오른 생각들을 일기처럼 남기는 거죠. 마음에 와닿는 장면이 있을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더니 어느덧 삼천 개가 넘었어요. 재미있는 장면을 수집하는 걸 좋아해서 사진을 찍거나 녹음해 둔 것도 무지 많고요. 처음에는 영감을 찾아 무언가를 응시하고 관찰하고 상상도 해봤다면, 지금 방식은 완전히 다르죠. 잊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 모았던 게 자연스레 작품이 되고 이름이 돼요.

 

그러고 보니 유머러스한 이름이 많아요. 올리브를 가득 그린 접시는 ‘올리브를 좋아하시나요?’, 방을 그린 건 ‘냅다 독립’, 가장 최근 작품의 이름은 ‘좋다 이 말이야였죠.

배 속에 있었을 땐 우리도 이름이 없던 것처럼, 작품을 굽기 전보다는 가마 밖으로 태어났을 때 즉흥적으로 떠올려요. 이름이 길든 짧든, 외국어나 특수 기호가 들어가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고요. 스스로 정형화되거나 틀을 짓고 구분하는 걸 경계하는 편이고, 그게 제 작업이 지키고자 하는 지점이에요. 그런 결에서 작품 뒤에 사진을 배경으로 두게 됐어요. 그릇만 찍어서 올려둔다면 누가 봐도 어떻게 쓰이는 지가 명확한 그릇인데, 사진 위에 올려두니까 페인팅이 먼저 눈에 들어와 회화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배경 이미지는 친구나 제가 찍어서 현상한 사진들이고, 색감이 맞거나 분위기가 어울린다 싶은 것들로 골라서 넣어요.

 

식재료나 음식, 와인 잔을 자주 그리곤 해서 한편으로 요리나 먹는 일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그림에 등장한 적 없는 감자탕에 소주 한 잔인데요(웃음). 자주 먹는 것보다는 이따금 먹는 예쁜 요리들을 그리게 돼요. 기분이 좋은 날과 기록하고 싶은 날은 조금 다른가 봐요. 평소에 요리도 좋아하지만 할 만한 여유가 없어요. 주업과 부업으로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대식구가 머무는 본가에 사는 터라 그곳에서의 요리는 노동에 가까운 생존 활동이거든요. 대신 맛있게 먹는 걸 잘해요.

 

복스럽게 먹는다는 뜻인가요?

맛있게 먹기 위해 무언가를 가미하는 걸 잘한다는 뜻이에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레시피는 평양냉면인데 국물에 소금과 후추, 겨자만 살짝 뿌려서 먹으면 감칠맛이 확 살아나요. 그리고 사이다에 녹차를 냉침해서 먹는 것도 별미고요.

 

새로운 비법인데요(웃음)? 혜원 씨에게 식사 시간은 어떤 의미예요?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하면… 그렇게 기다려지는 시간은 아니에요. 간단히 때워도, 서서 먹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함께 먹는 식사는 좀 달라요. 음식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와 먹을 걸 나누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거라서요. 어딘가에 있는 맛집에 가자고 약속을 잡는 것도 제가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넘어지면 보이는 세상

혜원 세라믹을 끌어 나가는 박혜원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날, 제 귓가에는 ‘재미’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들렸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중요한 요소로 꼽는가 싶어 물어보니, 지루하지 않은 걸 좋아하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듭 도전해 본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그로 인해 “그릇이 가마에서 깨져서 나오거나 그림이 이상하게 그려졌다고 해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영향력 없는 실패”일뿐이라고 덧붙였고요. 과감하게 넘어져 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독특하고 재미난 그의 작품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명주

동그랗지 않아도 괜찮아,

‘찌그러진 원 내 모습 그대로’

양손 위에 가볍게 얹어질 것처럼 가로로 긴 접시, 그 위에 버터 색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는데요. 어떤 건 완벽한 동그라미에 가깝지만, 그 옆에 있는 건 울퉁불퉁한 감자를 닮았고 또 다른 건 샐쭉해서 레몬을 닮기도 했습니다. 모두 다 원을 그렸다지만 전부 똑같은 모양은 아닌 거지요. 작가 박혜원은 김창완 선생이 라디오 디제이로서 사연자의 고민을 듣고 쓴 답장에서 영감을 얻어 이 접시를 완성했습니다. 선생은 일을 하며 얻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사연자에게 동그라미를 잔뜩 그려 보여주며 이 중 완벽한 원은 단 몇 개뿐이라고 하셨대요. 우리의 일상도 찌그러진 원이 될 때가 있으니 매일에 집착하지 말라고요. 번잡한 일상에 허덕여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눈앞에 괴로움 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가 큰 스님으로부터 죽도를 시원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을까요? 깨달음을 얻은 작가 박혜원은 작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매일을 동그랗지 않기로, 나아가 찌그러져 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 ‘찌그러진 원 내 모습 그대로’를 바라 보니, 완벽한 동그라미뿐 아니라 감자도 레몬도 다 우리의 면면같아 괜스레 반갑고 안심이 됩니다.

Monday Point Day!


언제나 어라운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는 정기구독자분들께 감사함을 담아, ‘AROUND Point’ 혜택을 준비했습니다. 혹시, 홈페이지에서 [MY PAGE]를 확인해 보셨나요? 매거진 정기구독 또는 온라인 구독 등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한 정기구독자님들에게 포인트를 지급해 드렸답니다. 이 포인트로는 정식 오픈된 어라운드의 작업실 ‘발견담’ 예약, 굿즈 구매, 토크 행사 및 이벤트 참여 등 어라운드 내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기존 구독자뿐 아니라 새로이 함께해주시는 분들께도 포인트 선물을 드릴 테니, 아래 버튼을 눌러 원하는 구독 방식과 지급되는 포인트를 살펴보세요.


포인트 지급과 더불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될 또 하나의 이벤트도 준비했는데요. 바로 ‘Monday Point Day’입니다. 매주 월요일,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되는 특정 상품을 한 주 동안 포인트로 품에 안을 수 있는 이벤트예요. 결제 금액 전부 또는 일부를 선물로 드린 포인트로 대신 지급할 수 있답니다. 6월 3일(월)에 문을 열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AROUND Note 01

‘Monday Point Day’를 통해 만나볼 첫 번째 굿즈가 궁금하신가요? 바로 어라운드의 작업실 ‘발견담’을 통해 여러분께 선보인 노트입니다. 단정한 겉면과 한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크기 덕에, 어디든 마음껏 함께하기 좋아요. 《AROUND》 90호 ‘수집가들(My Favorite Things)’에 담긴 한수희 작가의 에세이 조각도 새겨두었으니, 품에 지니며 작은 기록을 남겨보세요.

아워플래닛 X AROUND Talk Review


‘발견담’이 구독자분들을 처음으로 맞이한 5월 3일에는 94호 인터뷰이로 함께했던 ‘아워플래닛’과의 토크 행사도 열렸어요. ‘지속가능한 식탁의 발견’을 주제로 아워플래닛이 생각하는 지속가능성을 나누고, 환경을 생각하는 한 끼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를 다뤘답니다. 그날의 즐거운 만남이 궁금하다면 아래 버튼을 통해 어라운드 에디터가 직접 쓴 리뷰를 만나보세요.


Vol.95 관계의 모양(Being Together) Preview


짝수달이 되면 여러분 곁에 어라운드 신간이 도착하는데요. 맛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던 94호에 이어, 어느새 95호도 세상에 나올 모든 준비를 마쳤답니다. 나와 가까이 놓인 관계 안에서 저마다 답을 찾아가 보는 《AROUND》 95호의 주제는 ‘관계의 모양’이에요. 이번 레터에서 여러분께 살짝 들춰 보여드릴 테니, 6월 4일에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과 어라운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될 95호를 기대해 주세요.

올해의 어라운드는 겨울과 봄을 거쳐 ‘작업실’, ‘먹고 나누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어요. 다가올 여름에는 95호를 통해 ‘관계를 만들고 지탱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드릴 텐데요. 어라운드와 함께 우리 가까이에서 반짝이는 의미를 발견하셨나요? 남은 한 해 동안은 마음에 닿을 장면들을 더 많이 안겨드리리라 다짐하며, 이번 레터를 닫습니다.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신간 소식과 더불어 지나간 어라운드의 이야기도 들려드릴게요. 그럼, 다다음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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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엘리자베스 시사회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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