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일시정지된 당신에게

잉잉이님 안녕하세요, 잉잉레터의 에디터 이모(emo)예요. 일주일이면 새로운 감정과 이야기로 잉잉이님을 찾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제 일상이 그만큼 다채롭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어떤 날은 한 주의 숙제를 마친다는 기분으로 글을 써내기도 했는데, 꾸역꾸역 쓴 편지를 잉잉이님께 부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고민 끝에 잉잉레터의 발행 주기를 격주에 한 번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레터는 11월 30일 수요일에 발송될 예정이에요.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깊어진 글로 돌아올게요. 잉잉레터를 펼쳐주심에 오늘도 감사한 마음 전하며, 지난 주 질문 '무서워하는 게 있나요?'에 대한 잉잉이들의 답변을 나누는 것으로 오늘의 레터를 시작해 볼게요😊

잉잉이A

1. 지난 5월 대학동기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돈을 빌려줬지만 그 동기는 카톡을 탈퇴하였고 결국 대여금 반환소송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그때가 일 년 내내 준비하던 큰 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나 싶었습니다. 내가 선의로 남을 돕고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생각이 제 마음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2.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떤 짓인들 못할까요. 누군가에게 어떤 못된 행동을 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행동이 다가 아니라 다른 못된 행동들도 서스럼없이 해도 된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은 일은 상대방의 채무불이행이었지만 저는 다른 종류의 온갖 범죄들에 대해서도 공포를 느끼게 됐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 온갖 뉴스에는 인하대 성폭행 사건이 보도됐는데 상대방을 존중해야 할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안의 구조가 제가 겪고 있는 일과 겹치듯 느껴졌습니다. 온갖 범죄를 상상하면서 저의 공포감은 더욱 불어났습니다.

3. 소송의 구조상 채권자(=저)의 주소가 채무자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채무자가 저희 집으로 찾아와 저와 제 가족들에게 해꼬지를 할까봐 공포스럽습니다. 현재 채무자가 곧 채무불이행자명부에 등재되는 상황인데 이 경우 제가 말소해주지 않는 한 채무자는 10년 동안 카드발급, 대출, 할부거래가 불가능해지고 기존의 대출 전부를 즉시 상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채무자는 아직까지 이 등재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절차가 완료되어 앞서 언급한 불이익들이 실현될 때 그제서야 당황한 채무자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에게 그런 데미지를 준 저의 집으로 찾아와 해꼬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이래저래 채무자가 저의 집으로 찾아오는 상황이 공포스럽습니다. 저 혼자 살면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족도 함께 삽니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찾아오면 대응할 수도 없습니다.

4. 가족들이 아직 이 사건을 모릅니다.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혹시라도 가족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다면 제가 올해 시험에 실패한 것이 이 사건 때문이라고 자기 일처럼 속상해할까봐 두렵습니다. 지나고 두고두고 속상해할 얼굴을 그려보는데 그게 너무 두렵고 또 올해 저의 실패가 그 사건 때문인 것으로 평생 규정되는 것 역시 두렵습니다.

5. 내년에 시험을 한 번 더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내년 시험을 준비할 때도 지금 겪는 법적 다툼으로 방해 받을까봐 두렵습니다.

6. 살면서 여태 그런 적도 없었고 평소 성격과 워낙 거리가 먼 일이라 의아한데 제가 올해 시험 당일에 잠을 2시간도 못 자고 갔습니다. 당일 아침에는 물 빼고 뭘 먹어도 토를 했고요. 저도 모르게 몸이 얼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 15분 전까지 토를 하다가 그대로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내년에도 그럴까 봐 두렵습니다. 이런 일을 처음 겪고부터 잠에 들 때 자꾸 트라우마처럼 의식하게 되네요.

7. 내년에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면 시험범위가 존재하는 시험이라면 그 범위를 공부해서 풀면 되는데 시험범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지능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경쟁자 풀 자체가 다른 시험에 비해 너무 높습니다.

8. 반면 시험에 대한 내부와 외부의 인식차가 너무 큽니다. 이 인식차도 종종 숨을 막히게 합니다.

9. 영화에 삶을 투신할까 고민한 적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로 하였는데 영화를 자꾸 나중으로 미루다가 영영 영화와 멀어질까봐 두렵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주어진 여건 속에서 참 발버둥치듯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이 공포감의 존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10. 가족들이 모르는 생활비 대출이 존재하고 그 액수가 상상 이상으로 상당합니다. 오직 이를 변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외 1개를 내년에 병행할 생각인데 만에 하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감당할 수 없을까봐 겁이 납니다.

11. 해결되지 않은 군대 문제가 늘 골치를 아프게 합니다.

12. 지나온 제 삶의 선택들이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부과되는 영수증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참 무섭습니다.

13. 제가 겪고 느끼는 이런 것들 중 조금의 일부라도 누군가 이해한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거기서 비롯되는 아득함은 정체를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되 분명 저에게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14. 우리는 죽음에 밀접하게 노출돼있다고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느끼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상상하면 예전에는 못 다 누린 내 삶이 나 스스로 원통해서 슬펐는데 요즘은 그보다는 가족들의 원통한 표정이 더욱 버겁습니다.

15. 제가 혹시 부모님보다 먼저 죽을까봐 무섭습니다.

16. 반대로 가족이 나 때문에 죽는 일을 상상하면 가끔 무섭습니다.

17. 사람이 무섭고 세상이 무섭고 삶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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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토막 이야기

자존감이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패턴을 주기적으로 경험해요. 땅으로 떨어진 시기에는 단지 무언가를 해낼 힘이 나지 않을 뿐더러, 무엇을 보고 들어도 감정을 느끼거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웠죠. 그런 저를 위로하려 가까운 사람들이 좋은 말과 마음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스르르 투과시켜버리고 말 때 저는 스스로가 다 타버린 나무처럼 느껴졌답니다.

맞아요. 실은 요즘도 그래요. 요즘 저는 까맣게 탄 나무 토막이에요. 나무 토막은 어젯밤에도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책 한 권을 펼쳤어요. 목차에는 갖가지 암울한 감정들이 나열돼 있었죠. 나무 토막은 눈으로 그것들을 천천히 훑다가 '무감함'이라고 적힌 313페이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곳엔 온통 까만 배경 가운데 새하얀 문장 한 줄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어요.

마음이 일시정지된 당신에게

페이지를 한 장 넘기니 의자에 앉아 축 늘어진 토끼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가슴과 등받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무엇인지 모를 거뭇한 액체가 흘러내렸어요. 사람들의 호의를 흘려보내던 제 모습처럼 보였죠. 바로 옆에는 무감함을 주제로 쓴 글이 적혀 있었는데요. 문장을 조금 가져와 볼까요? “이 시기의 저는 소파에 앉아 있는 돌멩이였습니다.” 당신은 돌멩이로군. 나무 토막은 동질감을 느끼며 책을 계속 읽어내려 갔습니다.

무감함에 대해 말할 때, 느끼지 ‘못한다’가 아니라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겉으로 보면 자신을 방치하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고 나니 마음의 작동을 멈춰서라도 어떻게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겨울잠이라고 여겨도 좋습니다.

겨울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날아와 살포시 앉았어요. ‘겨울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포근하게 잠을 자는 곰이나 다람쥐가 그려져요. 내가 지금 겨울잠을 자고 있는 거구나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입니다. 조급함이나 자책감 같은 마음들이 천천히 녹아 내렸어요.

나무 토막이 읽은 책은 설레다 작가님의 <The Black Book 검은 감정>이에요. 외면하거나 덮어두고 싶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 책에서는 ‘검은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감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가 많아서, 특정 감정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곤 했는데요. 제게는 꼭 그런 사전 같은 책이었어요.

잉잉이님은 덮어두었거나 외면하고 있는 감정이 있나요? 잉잉이님의 검은 감정을 나눠주세요. 오늘 이야기를 나눠주신 분들 중 10명을 선정해서 <검은 감정> 책을 보내드리려고 해요. 잉잉레터가 잉잉이님의 검은 감정을 수면 위로 띄워주었다면, 책을 읽으면서 그 감정을 다스리는 시간 보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이야기 나누기

📘 무감정은 얼어붙은 고통의 표현이다

1. 분노나 우울, 불안 등의 감정은 ‘살아있음’의 강력한 증거이며, 이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2. 하지만 무감각, 무감정은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어 타인과 교류할 수 없으며, 나의 고통에 다가가지 못해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돌보지 못한 채 방치하게 만든다.

3. 단 한 번의 큰 사건으로 이렇게 되는 경우 '트라우마'라고 부르는데, 일상의 작은 상처가 반복되어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반복되는 고통을 대처할 방법이 없어, 더 이상 도망가거나 대항하지 못하면 고통이 얼어붙게 된다.

4. 모든 생명체는 선천적으로 위험한 자극이 오면 ‘투쟁/도피’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거나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급격히 ‘부동성 이완’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5. 부동성 이완 상태는 생존에 유리하다. 맞서 싸우거나 도망갈 수 없다면, 우리 몸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신경계가 고통(감각)을 차단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6. (그러므로) 무감각, 무감정은 아주 오래된, 얼어붙은 고통의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7.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고통을 겪은 끝에,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최선이었다.

8. (다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겠으나, 무감각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신경계가 균형 잡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9. 희망적인 사실은 시간이 지나 얼어붙은 고통을 바라보면, 그때보다 훨씬 견딜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함께할 안전한 장소와 훈련받은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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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땐 울어요, 잉잉잉💦

잉잉레터는 감정에 대해 다루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스튜디오 잉〉에서 발행합니다.

스튜디오 잉은 어른들도 마음 편히 울 수 있는 세상을 꿈꿔요.

언제 어디서나 잉잉이님의 감정을 껴안아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 주에 또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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