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당연히'로 시작하는 문장

안녕 결, 민경이야. 

설날의 이른 아침, 편지를 쓰고 있어. 


한동안 고향에 갈 때 ktx를 탔었는데, 이번에는 새마을 열차를 예매했어. 꼬박 한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좌석 크기도 넉넉하고, 바깥 풍경 보기에도 적당한 속도고. 여행하는 기분이었어.


열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고, 잠깐 졸기도, 책을 읽기도 했어.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화도 보았지. <나의 해방일지>는 좋아하는 김지원 배우가 주인공인 작품이라 방영할 때도 관심이 있었어. 그런데 처음 20분을 보는데 마음이 가라앉아서 보기를 그만두었었지.


새해 들어서 매일 한 편씩 그 작품을 보았어. 퇴근하고, 책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꼭 한 편씩을. 그건 하나의 의식이었는데 말이지, 회사에서의 시간을 무사히 지나온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고, 이제 공부를 해야 하는 나를 달래는 방식이기도 했고, 다른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내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환기의 시간이기도 했어.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가 딱이었어. 


<나의 해방일지>는 보아온 드라마 중 가장 자연스러운 드라마였어. 서사의 극적임을 줄이는 대신 인물들을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묘사해. 그 집요함이 재미있었어. 드라마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리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마지막화가 마지막화 같지 않았다는 거야. 


드라마의 마지막화에는 어딘가 허무한 구석이 있지. 해피엔딩으로 꽉 닫아놓은 결말은 특히 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몰입도 끝나고, 그 드라마는 박물관 유리 안에 보관된 이야기가 되어버려. 그 순간이 늘 섭섭했어. 허무하기도 해서 허겁지겁 자리를 채울 다른 드라마를 찾기도 했지.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는 적당히 서사를 마무리지으면서도 어떤 단정적인 장면도 보여주지 않았어. 엄밀히 말하면 그다지 해피엔딩도 아니야. 그래서 그 드라마 속 삶이 더 현실 같고, 쭉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어.  


*


나의 삶이 드라마라면,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감독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꽉 닫힌 해피엔딩을 원하는 것을 넘어서 매 순간이 행복하길 바랐지. 그리고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조정해왔던 것 같아.


밝은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꼈어. 


언젠가, '기대' 또한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의 일부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 기대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 말을 단번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 기대가 대체 왜 나쁘다는 거야..(글에서 나쁘다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통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이렇게 느꼈어.)라고 생각하며 기대를 통해 생기는 힘과 생기 같은 것을 떠올렸었지.


그치만 요즘은 기대에 내포된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 기대가 통제하고 싶은 마음의 일종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특정 사건에 대한 기대는 미래를 통제하고픈 마음일 거고, 특정인에 대한 기대는 그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 있겠지.


통제하고픈 마음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해.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욕망은 삶의 확실한 연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가진 기대가 '통제하고픈' 마음인지 '당연히 통제되어야 한다는' 마음인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앨버트 앨리스라는 심리학자에 대해 공부하다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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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앨리스는 '합리적 정서행동 치료'를 고안해 낸 심리학자야. 앨리스는 심리적 문제들의 '인지적'인 측면을 강조했어. 즉, 심리적 불편감은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생긴다는 거지. 현실 자체보다는 그 현실에 대한 개인의 해석을 중시한 거야. 그래서 그는 비합리적 신념과 사고를 정신병리의 원인으로 꼽았고, 치료 시 그것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정서와 행동이 건강히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어. 


앨리스가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꼽은 세 가지가 인상 깊었어. 


첫째, 자신에 대한 당위성

둘째, 타인에 대한 당위성

셋째, 세상에 대한 당위성


앨리스가 말하는 '당위적 신념'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이야기해. 가령 아래와 같은 신념 말이야.


'나는 당연히 유능한 사람이어야지'

'너는 당연히 나를 인정해 줘야지'

'세상은 당연히 아름답고 밝은 곳이어야지'


어때? 너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니? 나는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무수히 쌓인 '당연히'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목격하게 되었어. 그게 나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하지만 한편으론 아무런 기대 없이 사는 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 스케치도 안 하고 어떻게 물감을 짜...라는 마음이었지. 그 걱정에 응답이라도 하듯, 앨리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당위적 신념들을 건강한 소망으로 바꾸어야 한다"


'소망'이라는 말이 좋았어. 기대하지만 그것이 당위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는 말.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말. 그 말이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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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서든, 너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은 없다는 거. 통제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거. 다만 기대할 수는 있다는 걸, 그 소망을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겨두고 싶어. 


그럴 수 있다면, 내 기대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또 일이 기대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 아예 손을 놓아버리는 일도 적어질 것 같아. 


*


결, 네 마음속에도 '당연히'로 시작되는 문장이 있니?


*


명절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는 '당연히'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유독 더 많은 것 같아. 그 문장들 옆에서 네가 괴롭지 않길 바랄게. (이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해.)


*


이제 설도 지났으니 꼼짝없이 2023년이야.

새해 복 많이 받고, 늘 건강하길 소망해.



2023.01.22. 민경

추신. 새마을 열차에서 찍은 사진을 동봉할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43-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의미가 바뀐 일이 있는지 물었어. 
"그냥 너한테 오랜만에 답장하고 싶었어"

안녕 거의 1년만에 다시 답장을 쓰는 것 같아서 미안해. 끈기와 지구력 있게 너는 꾸준히 편지를 보냈더라구. 고마워. 그리고 부럽다. 나는 꾸준히를 참 못하거든, 이 답장쓰는거 보면 알겠지? ㅋㅋ
나도 요가 자주 해. 유튜브 뭐 보는지 다음에 알려주면 안될까. 나는 요가소년과 에일린 요가로 수리야나마스카라를 주로해. 숨이 찰때까지 하고나면 뿌듯하달까. 차투랑가 라는 자세는 가능한 자세인걸까.. 차투랑가에서 업독으로 넘어가는건 대체 언제될까? 혹시 너는 돼? 비법이 있다면 알려줘 꼭! 다시 돌아가서, 내가 요가소년 보라고 하면 친구들은 다들 소년아닌데? ㅋㅋ 로 시작하는 대답을 해서 요가의 성취감을 나누기 어려운데 요가 이야기 해줘서 많이 신났었어. 나는 의미가 변한건 없고, 그냥 너한테 오랜만에 답장하고 싶었어. 새해 복 많이 받고 새로 시작한 일들도 잘 되면 좋겠어. 잘자!
"까치 발만 하여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unfamiliar familiarity 라는 상호의 카페에서 답장을 쓰고 있어. 일주일이나 벼루고 벼러서 쓰는 답장인데 아주 신기한 공간에서 쓰게 되어서 기뻐. '낯선 익숙함'이라니 알듯 말듯 하여 그 카페 앞길을 지날 때마다 들어 가보고 싶었었는데 오늘 드디어 입성을 하였어. 문을 열자 확 전해오는 특이한 향이 낯선 공간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주었는데 자리를 잡고 앉아 차근차근 들여다보니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들, 사람들, 온풍기 바람에 흔들이는 데코레이션, 장식용으로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인형, 우리를 반기듯 맞춤형으로 틀어 놓은 빔프로젝트 위로 흐르는 영상 까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 특히, 여러가지 움직임을 느낄 수 있어서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어. 우리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잖아. 걷고 말하고 냄새 맡고 보고 바람을 느끼고 끊임없이 호흡하면서 숨을 쉬고, 살아 있다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너의 질문은 의미가 깊은 것 같아.

늘 해오던 일이나 매일 하는 행위가 그 의미가 바뀐 일이 있느냐고 물었었지? 너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의미가 바뀌는 경우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특정 행위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색다른 의미 부여를 하여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함으로서 특정 상황을 버텨 나가 수 있는 힘이 비롯될 테니까? 혹은 그거 알아? 까치 발만 하여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시선을 달리하여서 똑같은 환경을 특별하게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아.

색다른 공간에 앉아 있으니 주저리 할 말이 늘어졌네. 나는 요즈음 어떤 행위를 하고 있나 생각해보니 산책, 엄마와의 점심 식사, 낯선 사람 만나기, 나도 요가를 시작하였지, 노트북 사용하기 쯤으로 요약이 되네. //

처음 산행을 시작했을 때는 당연히 건강을 위해서라는 목표 한 가지였었는데 특별한 계기 없이 자연스럽게 요즈음은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을 정화시키는 행위가 되었어. /엄마와의 점심 식사는 엄마의 관점에서 의미가 많이 바뀐 일이야. 전에는 내가 엄마 집에 가면 좋고 안 가도 그만 이었지만 뇌쇠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고독하고 막막한 엄마는 나의 방문을 하염없이 기다리신다. 엄마를 위해서 기꺼이 점심 식사를 함께 맛나게 보내는 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어 주시던 엄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나는 처음부터 모험가로 태어났나 봐. 중세시대 즈음에 태어났었다면 돈키호테 쯤은 되지 않았을까?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대담한 도전이 요즈음은 사람으로 치우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 특별하게도 나에게는 외국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외국어 실력을 향상 시키고자 한번 두 번 만나다가 이제는 친구가 되었어. 교사 생활을 하는 그네가 긴 방학을 맞아 사흘을 멀다 하고 만나고 있어.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이 조금 슬프지만 친구로서의 예의를 다하고 싶어./

셀프 요가는 예전에 수강료를 내고 특정 장소에 가서 하는 요가 수업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누군가를 독려하기 위함이었지만 바닷가의 물이 들어 왔다 빠졌다 하면서 미묘한 변화가 생기 듯 몸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하자 약간의 필살기를 두게 되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트북 활용하기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어쩌면 필요하게 될 지도 몰라서 막연하게 선물로 받았었는데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어. 특히, 겨울이 추운 주택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아닐 까 싶어. 따뜻하게 데워 놓은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이 십 년도 넘게 벼뤄 오던 파워 포인트를 공부를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일기도 쓰게 되었지.//

해질 녁 카페문을 열고 들어와 지금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켜졌네. 배꼽시계가 정신없이 울려대니 이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한마디만 더 하자면

'갈고 닦지 않으면 변색 되고 뒤틀어진다'!

안녕!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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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요가소년 채널로 요가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세는 다운독이랑 나비자세야.(웃음) 매일한다던 25분짜리 영상은 나이트루틴 영상이구. 예전에 요가원 다닐 때 차투랑가에서 업독으로 넘어가는 자세해본 적이 있는데 부들부들거렸던 기억이 있어. 요즘은 주로 요근 풀어주고, 코어 힘 기를 수 있는 동작 위주로 하고 있어.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언젠가는 다시 요가원 가서 조금 더 고난이도 자세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어! 같은 채널을 본다는 게, 또 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게 반가워서 우다다 말을 쏟아내버렸네. 오랜만에 답장주어 반가웠어, 늘 건강히 지내고 새해 복도 많이 받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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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읽으면서 따듯한 이불 속에서 파워포인트를 공부하는 모습, 천천히 호흡하며 홀로 요가하는 모습, 모험을 하듯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과 마주 앉은 모습, 엄마와 도란도란 점심을 먹는 모습, 산길을 걷는 모습을 찬찬히 따라 떠올렸어.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모두 귀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어. 까치발만 하여도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이 좋아. 답장을 썼다던 카페의 이름처럼 까치발을 들고 들여다본 세상도 '낯선 익숙함'이겠지? 늘 익숙한 풍경에 기대어 편안히 지내길, 그럼에도 종종 까치발을 들고 바라보듯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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