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라는 하나의 정원"
vol.77 정원을 만들고, 이야기를 더하고, 숲을 읽는 사람들
정원이라고 하면 잘 다듬어진 잔디와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 가지런히 심어진 나무부터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정원의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다랑논도, 바람이 지나는 숲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길도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하나의 정원이 될 수 있다.
남해에는 이미 그런 풍경이 곳곳에 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마을이 이어지고, 바다 가까이 오래된 숲이 남아 있다. 산과 들에는 계절마다 다른 식물이 자라고, 사람이 일군 다랑논과 돌담도 자연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아도 남해를 천천히 바라보면 섬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정원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번 호에서는 남해의 자연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을 만났다. 세 사람이 바라보는 정원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정원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 안에 이야기를 더하고, 누군가는 이미 존재하는 자연을 읽는다. 하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는 한곳에서 만난다. 좋은 정원은 새로운 것을 많이 더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미 있는 풍경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어쩌면 남해가 하나의 정원이 된다는 것도 그런 의미일지 모른다. 새로운 꽃과 나무를 심는 것만큼 이미 남해에 있는 숲과 바다, 다랑논과 마을, 그 안에 쌓인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 이번 호에서는 세 사람의 시선을 따라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남해라는 정원’을 천천히 걸어본다.
* 남해로ON 뉴스레터는 남해의 사람과 공간, 그리고 이곳에서 새롭게 써 내려가는 여행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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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를 만들던 사람이 정원을 만들게 된 시작은 작은 연못 하나였다. 파주 헤이리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한 차명호 대표는 텅 빈 마당에 다리를 하나 놓고 싶었다. 다리를 놓으려면 물이 필요했고,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식물을 심었다. 하나를 만들면 또 다른 풍경이 필요해졌다. 그렇게 시작한 정원은 어느 순간 그의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더 큰 정원을 만들기 위해 다시 땅을 찾기 시작했다. 제주를 비롯해 여러 지역을 돌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이전에 잠시 여행했던 남해를 떠올렸다. 다시 찾은 남해에서 계단처럼 이어진 다랑논을 만났다. 차명호 대표에게 그것은 평범한 농지가 아니라 이미 수많은 선이 그려진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지금의 섬이정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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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이 보물처럼 보였습니다
원래 여성 의류 쪽에서 일했습니다. 명동과 돈암동에서 정장을 만들고 니트 같은 제품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오래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10년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늘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파주 헤이리에 입주할 기회가 생겨 2003년부터 전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집을 짓고 보니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림에서 본 것처럼 다리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놓으려면 연못이 있어야 하잖아요. 연못을 만들고 주변을 자연스럽게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는 원래부터 연못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좋아했습니다.
그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식물을 심고 잡초를 뽑는 일도 내가 노력한 만큼 눈앞에서 결과가 보입니다. 정원 일을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계속하게 되는 이유가 그런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파주의 정원은 처음부터 전체 계획을 세우고 만든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만들다 보니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계획한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제주를 비롯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땅을 찾았지만 쉽게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예전에 잠깐 여행했던 남해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다른 지역으로 가던 중 시간이 남아 남해를 찾았고, 어디를 가면 좋겠냐고 관광과에 물었더니 보리암과 미조항을 추천해줬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좋았습니다.
다시 남해에 와서 땅을 보다가 지금의 자리를 소개받았습니다. 딱 보니 다랑논이었습니다. 속으로는 ‘땡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다랑논 자체가 보물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계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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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처음부터 전체 그림을 그리고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정원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어디에 무엇을 심을지까지 미리 계획했습니다. 그때 그렸던 큰 틀은 지금의 섬이정원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원이 계획대로 완성되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고, 정리하고, 다시 손보는 일의 반복입니다. 결국 정원은 계속 관리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정원 일이 한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겨울에 힘든 일을 많이 합니다. 꽃과 잎이 무성할 때 하지 못했던 큰 작업을 겨울에 해야 하거든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정원을 손보는 날도 많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화단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손이 가고, 눈이 가고, 직접 만지는 감촉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장갑도 끼지 않고 흙과 식물을 만집니다. 자연을 거창하게 생각하기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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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정원을 설계할 때 많이 참고한 것이 우리나라의 궁궐이었습니다. 건축 관련 책도 많이 찾아봤습니다. 궁궐에 가면 전각이 있고 담이 있고 문이 있습니다. 문을 지나야 비로소 그다음 공간이 나타납니다. 그 방식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섬이정원도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다음 정원이 한눈에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길을 걷고 모퉁이를 돌거나 문을 지나야 새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미리 다 보여주기보다 걸어가는 동안 계속 작은 전환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남해를 돌아다닐 때 느끼는 재미도 비슷합니다. 길이 구불구불해서 커브 하나를 돌면 조금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납니다. 바다가 보이다가 마을이 나타나고, 다시 산과 논이 나타납니다.
섬이정원을 설계할 때 남해의 해안선을 참고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남해에서 살고 정원을 가꾸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남해의 풍경과 섬이정원에는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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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계획했던 것만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정원을 가꾸다 보면 우연히 본 장면에서 새로운 생각이 생기기도 합니다.
유리온실이 그렇습니다. 우연히 핀터레스트에서 한 건축물을 봤는데 벽돌과 바닥, 문이 모두 열리는 구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진 속 벽돌 개수를 하나씩 세어가며 크기를 짐작했고, 그 모습을 섬이정원 안에 직접 구현해봤습니다. 철을 다루는 장인의 도움을 받아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오두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섬이정원에서 만든 것을 다른 누군가가 다시 참고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손님이 거제에서 이곳의 오두막을 벤치마킹한 공간을 봤다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장소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도 별로 없습니다. 하늘연못 역시 사람들이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장소가 됐습니다.
제가 생각한 쓰임과 사람들이 발견하는 쓰임이 다른 겁니다. 정원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장면이 생길지까지 전부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예상하지 못한 변화도 정원의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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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정원 안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곳이 있습니다. 모네의 정원입니다. 다리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지만 물에 풍경이 비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물 위에 생기는 반영과 빛이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입구 쪽 작은 연못도 좋아합니다. 오후가 되면 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연못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장소인데도 빛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정원을 찾아가도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끝까지 갔다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걸어오기도 합니다. 시간도 달리해서 봅니다. 아침에 보는 정원과 오후에 보는 정원이 다르고, 가면서 보는 풍경과 돌아오면서 보는 풍경도 다릅니다.
남해의 길도 그렇습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곳은 설천 해안도로입니다. 선소에서 설천 방향으로 길을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같은 길인데 갈 때와 돌아올 때 보이는 풍경이 다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트럭을 타고 볼 때 풍경이 더 좋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다가 보이는 임도를 달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덕월리 쪽 임도에도 좋은 풍경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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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정원’이라는 이름에는 남해라는 섬 자체가 하나의 정원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원이라고 하면 흔히 꽃과 나무가 잘 가꾸어진 공간부터 떠올립니다. 하지만 꼭 꽃을 심어야 정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치 좋은 곳에 사람들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포인트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도 정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자가 최고의 정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 이미 훌륭한 자연이 있다면 굳이 많은 것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바라보게 할 것인지, 그 자리를 잘 잡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정자’라는 말이나 모습은 지금 사람들에게 조금 오래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현대적인 쉼터가 될 수도 있고 벤치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설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앉았을 때 무엇을 볼 수 있느냐입니다.
남해에는 이미 좋은 풍경이 많습니다. 바다와 산도 있고 다랑논과 마을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그 풍경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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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와 제주를 다녀보면 풍경의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남해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복잡하게 이어지는 해안선입니다. 길을 따라가다 커브를 하나 돌면 새로운 바다가 나타나고 또 다른 마을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지족해협을 따라가는 해안도로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요즘에는 설천 쪽을 자주 갑니다. 남해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달리다 보면 갑자기 좋은 풍경을 만나는 길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남해의 풍경을 제대로 보고 싶다고 묻는다면 설천 해안도로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선소에서 설천까지 천천히 가본 뒤 같은 길로 다시 돌아와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갈 때 봤던 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남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랑논도, 구불구불한 해안선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임도도 그렇습니다. 꼭 무언가를 새로 심고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좋은 풍경이 있다면 그것을 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섬이정원도 결국 다랑논이라는 오래된 풍경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 땅을 보고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이미 이곳에 좋은 선과 풍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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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원은 한번 만들어놓고 끝나는 공간이 아닙니다. 식물은 계속 자라고 계절에 따라 모습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생각도 바뀝니다. 그래서 섬이정원이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제 앞으로 5년이 어떻게 될지도 궁금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해도 하루가 그 생각대로 흘러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도 비슷합니다. 계획은 세우지만 식물이 자라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계속 달라집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다랑논 위에 제가 생각한 정원을 그렸습니다. 그 뒤로 식물이 자라고 새로운 공간이 더해지고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처음 그렸던 그림 위에 또 다른 시간이 쌓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완성된 모습을 정해놓기보다 계속 손보고 바라보면서 가려고 합니다. 정원이 나이를 먹는 만큼 저도 함께 나이를 먹을 테니까요. 남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좋은 풍경을 지키면서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를 조금씩 더해가는 것. 제가 생각하는 ‘정원 같은 남해’는 그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image ⓒ 남해로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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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정원 차명호 추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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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해안도로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남해의 매력을 만나는 길" |
설천해안도로
"같은 길인데 갈 때와 돌아올 때 풍경이 달라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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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오랫동안 조각가로 살아온 이승모 관장이 남해에서 처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함이었다. 울산에서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며 바쁘게 살아오던 그는 여행으로 찾은 남해에서 문득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14년 남해로 삶의 자리를 옮겼다.
그가 지금 관장을 맡고 있는 바람흔적미술관도 남해의 조금 특별한 풍경 속에 자리한다. 바다 대신 산과 내산저수지가 둘러싸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잔디밭의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이승모 관장은 이곳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과 토크를 열며 자연과 예술이 만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에게 정원 역시 꽃과 나무만으로 완성되는 공간이 아니다. 문학과 음악, 미술과 역사, 그리고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할 때 비로소 남해만의 정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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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처음 왔을 때 참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으로 왔는데 이 고요함 속에서 그냥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 6월 남해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전에는 울산에서 2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미술협회 일도 하고 조각가로 순수예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기도 했고 아파트 같은 공간에 들어가는 조형물 작업도 했습니다. 작가에게 큰 조형물 작업은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닌데 운이 좋게 여러 의뢰를 받아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도시에서 작업하다 남해에 오니 삶의 속도가 달라졌습니다. 조용히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좋았고, 지금까지 남해에서 작품 활동과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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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흔적미술관 초대 관장님과는 20년도 넘은 인연이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재미있었던 것은 남해인데도 섬에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원도 어느 깊은 골짜기에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내산저수지가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저수지라고 하면 조금 인공적인 느낌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곳은 편안한 호수처럼 느껴졌습니다. 물과 산이 이어지는 풍경이 고요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미술관이 있습니다. 제대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전시장이 있다는 것도 이곳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전시장 안에서는 작품을 보고 밖으로 나오면 잔디와 나무, 저수지와 산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미술관 건물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 보기 어렵습니다. 주변의 자연까지 함께 봐야 바람흔적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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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원래 바람이 많이 붑니다. ‘바람흔적’이라는 이름도 그 바람과 연결되어 있고, 미술관 앞의 바람개비 역시 이곳을 상징하는 풍경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전시장 안에서 그림만 보고 돌아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밖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고 잔디밭에 머물며 천천히 주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도시의 시끄러운 환경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 때만큼은 마음이 조금 고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작품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남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미술관이라고 해서 조용히 작품만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람흔적미술관에서는 작품과 자연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음악이 들리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모두 이 공간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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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는 수많은 마을이 있고 마을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풍경만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래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남해의 자연을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길이지만 그곳에 문화적인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전혀 다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을을 지나면서 그 마을의 설화를 듣거나, 길 위에서 작품을 만나거나, 그곳과 관련된 음악과 문학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길을 ‘추억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름만 붙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왜 이 길이 추억의 길인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주제와 어울리는 미술과 문학, 역사 같은 요소들이 길 안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콘텐츠를 만들려면 미술, 음악, 역사,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정이 계획을 세우고 전문가가 잠깐 참여하는 방식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충분히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다시 행정과 연결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오래 고민해야 합니다. 짧게 열리고 끝나는 행사도 필요하지만, 오랫동안 남아 사람들이 계속 찾아올 수 있는 이야기와 콘텐츠를 연구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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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관광을 생각할 때 ‘마을’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남해의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설화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내 하나의 콘텐츠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마을을 한꺼번에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지역마다 이야기가 분명한 마을을 찾아 하나씩 시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을의 이야기를 따라 걷는 코스를 만들고,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를 공예품이나 굿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짧은 음악이나 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서 나온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잘된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이어져 지역에서 수익을 만들 수 있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여행자가 찾아오고, 주민이 참여하고, 예술가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면서 다시 마을에 도움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해 여행도 ‘여기 하나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여행’에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도 가보고 싶고 저곳도 가보고 싶어서 하루 더 머물게 되는 남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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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도 단순히 나무와 꽃을 심는 공간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원에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있습니다. 작은 꽃 하나를 심어놓고 언제 피어날지 기다리는 마음도 정원이 주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절을 기다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꽃과 자연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모두 다릅니다.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추억을 떠올립니다. 그런 마음까지 세밀하게 생각해 하나씩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정원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해가 정원을 이야기한다면 각각의 장소에 주제와 이야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어떤 곳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어떤 곳은 그리움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꽃과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와 연결된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작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학에서 발견한 꽃을 실제 공간에서 만나고, 그곳의 역사와 주민의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도 있습니다. 미술과 음악이 더해질 수도 있고요.
남해 전체를 정원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해에 이미 있는 자연 위에 그 지역의 이야기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른 지역에서는 만날 수 없는 남해만의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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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남해는 숲 그리고 예술입니다
남해에는 이미 좋은 자연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꽃무릇이 피는 시기의 앵강다숲을 좋아합니다. 숲 사이로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섬이정원도 지인들이 남해에 오면 꼭 데리고 가는 곳입니다. 민간에서 오랫동안 정원을 잘 가꾸어놓은 곳이고 남해에서 보여줄 만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건방조어부림도 좋아합니다. 오래된 나무가 이어진 숲 자체가 가진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고르기 어려울 만큼 바래길 전체도 좋습니다. 걸으면서 만나는 전망과 마을, 바다의 풍경이 계속 달라집니다.
제가 이런 곳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꼭 화려해서는 아닙니다. 남해의 좋은 장소에는 가만히 머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 장소가 가진 이야기를 조금 더 발견하고 알려준다면 여행자는 풍경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곳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해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남해미술협회에도 서양화와 한국화, 서예,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창립회장으로 참여하면서 전공자만의 모임보다는 실제로 창작활동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문턱을 넓히려고 했습니다.
문화예술은 관광과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해의 자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좋은 작품을 만나고, 공연을 보고, 마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여행할 이유가 하나씩 늘어납니다. 볼거리뿐 아니라 마음에 남는 ‘감동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행자가 찾아오고 지역에서 소비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이 남해에 관심을 갖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자연만큼 문화와 예술 역시 남해가 가진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image ⓒ 남해로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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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흔적미술관 이승모 추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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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다숲
"꽃무릇이 피는 계절이면 더욱 아름다운 숲" |
섬이정원
"남해에 지인이 오면 꼭 함께 찾아가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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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는 숲에 들어가면 먼저 풍경을 본다. 높이 솟은 나무와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며 걷는다. 하지만 조혜연 해설사는 조금 다른 것을 본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 귀를 기울이고, 아침 숲을 채우는 새소리를 듣는다. 나무에 맺힌 열매를 살피다가 자신의 마음과 닮은 열매 하나를 찾아보기도 한다.
오랫동안 남해 곳곳을 걸으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온 그는 문화관광해설사에서 숲해설가와 자연환경해설사로 활동의 폭을 넓혀왔다. 처음에는 남해의 역사와 문화재를 이야기했지만, 금산의 나무와 바위에서, 바닷가의 작은 생물과 길가의 야생화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렇게 하나씩 알아갈수록 자연은 사람의 삶과 닮아 있었다. 이제 그가 들려주는 숲 이야기는 나무의 이름이나 생태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작은 생명에서 우리의 삶을 발견하고, 숲에서 찾은 위로를 다시 사람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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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몇 년만 살려고 왔습니다
남해는 남편의 고향입니다. 저는 원래 연극을 전공했고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습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조연출을 하기도 했고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뒤에도 관련 일을 계속했습니다. 남편은 먼저 남해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광고 일을 하다가 남해에서는 출판과 지역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2001년 10월, 아픈 강아지를 데리고 저도 남해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몇 년 정도 살다가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남해군에서 문화관광가이드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권유도 있었고, 이왕 남해에 살게 됐으니 남해를 제대로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관광도우미 일을 시작했습니다. 해설사들을 위한 자료를 보면서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씩 공부했습니다.
막상 사람들 앞에 서보니 저와 참 잘 맞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공부해도 사람들 앞에서 별로 떨리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지도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무대에 섰던 경험도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아마 해설사를 하지 않았다면 다시 도시로 올라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남해를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만 살려고 내려온 남해에서 지금까지 살게 됐습니다.
현재는 남해향교 사무국장으로 향교·서원 국가유산 활용사업과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 문화관광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문화사업을 해왔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일들을 제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image ⓒ 남해로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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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역사와 문화재를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남해를 다니다 보니 역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금산에 가면 나무와 바위가 있고 바닷가에 가면 수많은 생물이 있습니다. 길가에는 이름도 모르던 작은 야생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남해가 가진 것 중 자연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샀을 때는 정말 바다만 보고 살았습니다. 돌아다니며 자연을 찍었고 제가 찍은 사진이 야생화 관련 책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됐습니다. 식물의 이름을 하나씩 알고 그 식물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게 되니 그 안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공부하다 보니 결국 숲해설까지 이어졌습니다.
자격증을 따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 숲 이야기를 어떻게 체험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여행과 연결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숲을 이야기하다 보면 나무 하나를 설명하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식물의 특징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의 삶과 연결하게 됩니다. 식물과 사람이 어떤 점에서 닮았는지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훨씬 재미있어합니다.
그런 과정이 저에게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공부한 것을 사람에게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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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해의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 보니 그 기반에는 언제나 자연과 숲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역사만 좇다 보면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의문이나 쓸쓸함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식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그 조용한 생명들이야말로 치열한 생존 전략을 펼치며 살아가는 삶의 스승이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서로 연대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숲의 생태에서 사람의 인생을 발견했습니다. 숲과 자연이 사람의 삶과 정말 많이 닿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아이들과 숲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린 나무와 오래된 나무가 함께 살아가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생명도 저마다 살아남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아이들의 고민이나 삶과 연결하면 자연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무와 숲, 들꽃이 보여주는 삶의 지혜를 통해 아이들과 청소년,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문화관광해설에서 숲해설로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남해를 더 알고 싶어 하나씩 들여다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숲까지 들어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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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남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해설을 시작했을 때는 정해진 관광지와 문화유적을 중심으로 남해를 바라봤습니다. 단체여행이 많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는 장소, 식사할 곳과 머물 곳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저 역시 ‘이런 곳이 있었네’ 싶은 장소에 더 눈길이 갑니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작은 단위로 움직이며 자신만의 장소를 발견하는 여행이 많아졌고, 저 역시 그런 여행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미조의 천하마을을 지나 상주은모래비치방향으로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유명한 관광지 하나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 사이에서 만나는 작은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남해웰컴센터가 있는 남해대교 주변으로 갈 때도 일부러 해안도로를 따라갑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이 좋습니다.
그래서 가끔 내비게이션도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길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남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 입니다. 10분을 더 달리더라도 바다가 잘 보이는 길, 작은 마을을 지나는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남해 여행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남해를 봐왔는데도 아직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해는 지금도 계속 새롭게 발견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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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리를 들으며 감각을 깨웁니다
숲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특히 바람 소리를 좋아합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에 따라 걷고 싶은 길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숲에 들어와 소리에 집중하면 잠들어 있던 감각이 하나씩 깨어나는 느낌이 듭니다.
이른 아침에는 새소리도 좋습니다. 유구마을 쪽 숲을 지나갈 때 들리는 아침 새소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의 음영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열매를 꼭 봅니다. 가시가 돋친 열매도 있고 동글동글한 열매도 있습니다. 가끔은 여러 열매를 바라보다 ‘오늘 내 마음과 가장 닮은 열매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밑으로도 내려갑니다. 작은 이끼와 낙엽 아래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작은 생명들을 살펴봅니다. 숲은 무작정 앞만 보고 걷는 곳이 아닙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열고 눈을 낮추면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나타납니다.
숲속 나무들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서로의 그늘을 가리지 않도록 나뭇가지 끝을 살짝 비켜가며 자라는 모습입니다. 이를 ‘수관 수줍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숲해설을 할 때 이런 생태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사람의 삶과 연결해 이야기합니다. “보렴. 저 나무들도 서로를 배려하며 저마다의 모양으로 살아간단다. 너도 너만의 근사한 모양으로 살아가면 돼.” 숲에는 자연의 이야기도 있고, 사람에게 건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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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숲은 조용하고 고요합니다
남해 숲의 가장 큰 매력을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조용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금산처럼 이름난 산도 있고 오래된 숲도 있지만 꼭 대단한 풍경을 만나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걷다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조용해야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도 있습니다.
남해의 숲은 바다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합니다. 다른 지역의 내륙 숲이 깊고 고요하다면 남해에서는 파도 소리와 숲의 숨소리가 함께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다를 품은 숲’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건방조어부림처럼 사람과 자연이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숲도 있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숲을 만들고, 다시 그 숲이 마을을 지켜왔습니다. 화려한 풍경보다 그런 곳에 더 마음이 갑니다. 해풍을 맞으며 휜 나무와 돌담 사이에 뿌리내린 풀꽃처럼 오랜 시간을 견뎌낸 것들이 보입니다. 오랫동안 남해를 들여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남해는 ‘견뎌냄과 포용의 풍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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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만이 아니라 사람도 함께 남았습니다
오랫동안 해설을 하면서 제게 남은 것은 남해에 대한 지식만은 아닙니다. 사람도 남았습니다. 예전에 다음에 ‘남해군사랑’이라는 카페가 있었습니다. 해설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이 하나둘 이어지면서 수천 명이 모였고, 저도 한동안 운영자로 활동했습니다. 여행으로 잠깐 만난 사람들이었는데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설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생각도 그때 많이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남해를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다시 자신의 남해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해설할 때 제가 줄 수 있는 감동은 다 주고 싶습니다. 남해의 역사 하나를 기억해도 좋고 작은 꽃 하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어도 좋습니다. 결국 여행을 마친 뒤 마음에 무엇 하나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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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한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숲해설은 나무의 이름이나 생태 정보를 많이 알려주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무 이름 하나를 더 외워서 돌아가기보다 ‘자연이 나에게 건넨 위로 한 조각’을 가슴에 품고 돌아갔으면 합니다. 치열한 생존 전략 속에서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숲을 보며 ‘나도 저 나무처럼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절과 시간, 그리고 걷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남해는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저에게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남해가 많습니다. 특히 남해에 남아 있는 역사와 이야기를 더 찾아 제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박물관이나 전시관도 사람들이 한번 둘러보고 나가는 장소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이 모이고, 그 장소와 관련된 새로운 프로그램이 계속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저 역시 여유가 생긴다면 지금까지 공부해온 역사와 문화, 자연과 숲, 관광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보고 싶습니다. 숲을 걷는 일이 하나의 여행이 되고 그 길에서 남해의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는 방식도 가능할 겁니다.
남해에는 아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그 이야기를 하나씩 찾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삶에 지친 누군가가 남해의 숲을 걸으며 신발을 벗고, 나무를 안고, 노을을 바라보다 잠시라도 자신을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따뜻한 시 한 구절 같은 해설로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길잡이가 되는 것. 그것이 제가 남해의 숲에서 계속하고 싶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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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연 해설사 추천 남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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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래길 9코스
"천천히 달릴수록 새로운 남해를 발견하게 되는 길" |
물건리방조어부림
"사람과 자연이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온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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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같은 남해의 자연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다랑논의 선을 살려 정원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자연에 미술과 음악, 사람의 이야기를 더했다. 또 누군가는 숲을 걸으며 바람 소리를 듣고, 작은 나무와 풀꽃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사람의 삶을 발견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원이라는 것이 꼭 꽃과 나무를 잘 가꾸어 놓은 공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하나도 정원이 될 수 있고, 오래된 숲과 마을길에 이야기를 더하는 일도 정원을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이미 그곳에 있는 자연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바라보면 남해에는 이미 수많은 정원이 있다. 바다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과 오래된 숲, 사람이 오랫동안 일구어온 다랑논과 돌담, 작은 마을의 풍경까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남해라는 큰 정원을 이루고 있다.
여행에서도 비슷한 발견을 할 수 있다.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기보다 조금 천천히 걸어보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귀를 기울이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나무와 길을 한번 바라보는 것이다. 같은 남해라도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이야기가 유명한 정원과 숲을 찾아가는 것을 넘어, 남해를 하나의 정원처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어쩌면 좋은 정원을 만나는 일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가는 것보다, 이미 곁에 있던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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