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상황이든 어쨌거나 시간은 갑니다.
SEP 4, 2026
10월에 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님에게만 먼저 말씀드리면, 2월에 제가 인턴으로 다녀온 스페인의 푸드 디자인 스튜디오가 전시와 워크숍을 하러 한국에 오는데 제가 로컬 매니저를 담당하게 되었거든요. 저에게는 꽤 특별한 의미인 게, 호기롭게 제가 먼저 제안해서 지금 이렇게까지 판이 커져 버린 일이라서요. 정말 너무나 잘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때는 패기 있게 질러버렸다! 정도의 느낌이라 크게 실감은 나지 않았는데, 일정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인 지금은 점점 늘어나는 실무에 조금(사실 조금 많이) 허덕이고 있습니다.

일단 하자고 돌격을 선언해 버리고는 다리가 찢어지고 잠 못 이루면서 어찌저찌해낸 다음에 성장통 겪듯 배워내는 게 일상인지라, 여지없이 이번에도 질러버린 이번 프로젝트는 관계자가 워낙 많은 탓에 조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금 딱 업무의 중간 지점이라 말을 얹기는 조심스럽지만 생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네요. 그 와중에 개인 업무도 해야 하고, 감정적으로도 평온하지 못하다 보니 집안일처럼 일상을 유지해 주는 긴급하지 않은 루틴들은 뒤로 밀리고만 있습니다. 작업방은 이미 뒤죽박죽, 외부 일정은 또 왜 이렇게 많이 잡아 두었는지 이번에도 저를 원망해 봅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일이 맞나? 돌아볼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영원히 파고들 이 질문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시간 내어 들은 외부 강연 덕이었어요. 그리고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의 유영국 작가 전시에서도 많은 위로를 받았구요. 이 감각을 잊기 전에 꼭꼭 씹어 소화하고 싶은데, 당장 닥친 일들과 소통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수면 시간도 불규칙해졌습니다. 사실은 한 삼일 정도 조용한 카페로 훌쩍 떠나서 아무 방해 없이 일기만 적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현실은 월말마다 블로그며 일기에 남기는 신변잡기 시간조차 9월의 첫 주를 마무리하는 이때까지 손 댈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동시에, 주어진 기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리광 부리며 징징거리고 있는 스스로가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일단 꾸역꾸역 일을 하긴 하지만 정리할 새도 없이 자꾸 마음이 둘로 갈라지고 있어서 참 엉망인 요즘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이든 어쨌거나 시간은 갑니다. 그 사실이 유일한 위로이자 공포이기 때문에 이 레터를 쓰며 일단 프로젝트가 성료할 때까지는 엉망으로 지내자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새삼스러운 다짐은 아니고요, 레터를 핑계 삼아 되새겨 보는거죠. 누구는 제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하고, 또 누구는 생각이 너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저는 터져 나오는 생각을 억지로 없애는 쪽에 가깝고요.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더 자신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야 합니다. 내가 흔들리면 그대로 무너져 버리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친구가 선물해 준 파스타로 요리를 했습니다. 얼마 전 행사 준비하다 남은 카포나타를 비벼서 후딱 완성했어요. 카포나타는 작게 썰어 구운 가지, 파프리카, 양파, 올리브 등을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이탈리아 요리인데, 숏파스타와 곁들이니 잘 어울리더라고요. 기교 없이 직관적인 맛이라 큰 생각 없이도 맛있게 즐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또 누군가의 마음으로 제 식탁이 완성되었네요. 답답할 때마다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걸 되새기려고 하는데요, 이 카포나타 파스타 역시 엉망인 요즘에 힘을 더해주었습니다. 뭐가 됐든 역시 맛있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카포나타를 곁들인 파스타
 재료 [1인분 기준]

(필수)
숏파스타 1인분 (90g 가량)
가지 1/2개
양파 1/4개
샐러리 1/3대
올리브 1스푼
[카포나타 소스]
*시판 토마토소스도 무방합니다!
완숙 토마토 1개 (또는 방울토마토 한웅큼)
양파 1/4개
마늘 1개
케이퍼 1작은스푼
화이트 와인 식초 1스푼
설탕 1/2작은스푼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선택)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파슬리
만드는 법

1. 모든 채소는 다지지 않고 작은 큐브 형태로 썰어줍니다.
2.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숏파스타를 포장지에 적힌 시간보다 1~2분 적게 삶아줍니다. 면수는 따로 남겨줍니다.
3. 180도 오븐에 모든 채소와 케이퍼를 넣고 노릇하게 구워줍니다.
4. 잘게 썬 토마토와 양파, 케이퍼, 마늘을 올리브오일에 볶다가 믹서에 갈아줍니다. 시판 토마토소스를 써도 무방합니다.
5. 구운 채소와 토마토소스를 잘 버무려 카포나타를 완성합니다.
6. 팬에 카포나타와 숏파스타, 면수를 적당히 넣고 자작하게 볶아줍니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 후, 취향에 따라 치즈와 파슬리를 뿌려주면 완성!
님, 오늘의 파스타는 어떠셨나요?
너무 길었나요? 레시피가 부실했나요?
듣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음 레터에 반영해 답장할게요.
제가 궁금하다면 아래에서 더 확인할 수 있어요!
R.DAM
artist.rdam@gmail.com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