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2. 두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취향을 담아 상상 속의 공간 '땡비'를 만들어가는 뉴스레터
오늘도 땡비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땡비에서 나눠볼 이야기는 '며느리는 왜 나쁜 시어머니가 되는가'입니다. 한이 서릴만큼 힘들었던 며느리👩가 시간이 흘러 시어머니👵가 되면 여전히 며느리를 괴롭히는 형태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시가와 며느리의 관계는 유독 어렵습니다. 힘든 며느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거라고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이 구조를 세습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허난설헌으로부터 도착한 질문(@아난)

날 좋은 5월,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로 여행을 갔다. 강릉 최고의 문장가 집안답게 여러 칸이 연결된 꽤 큰 규모의 한옥이었다. 집 뒤쪽에는 굴뚝이 솟아있고 주변에 예쁜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화단 옆으로 어린 시절 이름인 ‘허초희’로 불리며 뛰노는 허난설헌이 보이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한옥 한쪽을 보니 일찍이 초희의 재능을 알아본 따뜻한 큰 오빠이자 첫 스승 ‘허봉’이 초희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 시선을 돌리면 허봉이 친구이자 천재 문장가임에도 서얼이라 벼슬길이 막힌 ‘이달’을 초희에게 새로운 스승으로 소개한다. 돌아 나와 마주한 방에는 허균의 초상화가 놓여있다. 시대를 앞서 평등을 부르짖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이 천진난만한 소년이 되어 초희에게 글을 배우고 있다. 다소 매서운 인상의 허난설헌 초상화가 있는 한옥 처마 아래에 앉아 쉬며 안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 세 사람이 시와 그림을 나누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 보인다. 집 뒤로 걸어 나가자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뚝 솟은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리며 선선한 바람을 탄다. 허난설헌이 어린 시절 그렸다던 ‘양간비금도‘가 떠오른다. 키 큰 나무 옆에서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 허초희가 활짝 웃고 있다. 

행복했던 강릉 친정에서의 삶과 대조적으로 비극적인 시집살이를 산 허난설헌은 ‘시집간다.’라는 말이 시작된 ‘친영제’의 1세대이다. 친영제는 17세기 이후 여자가 시가에 살며 시부모를 봉양하는 결혼생활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17세기 이전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에서도 주로 처가에서 결혼생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친영제가 시작되면서 허난설헌은 남자형제와 대등하게 교육을 받고 존중받던 강릉의 친정을 떠난다. 그녀는 당시 최고 권세가이자 보수적인 안동 김씨 김성립과 결혼하여 안동에 터를 잡게 된다. 그녀의 뛰어난 재주에 비해 과거 급제가 늦어지며 시기하는 남편, 시가와 갈등을 겪는다. 불행은 이어져 역병으로 어린 자식들까지 먼저 보내고 27세에 요절했다. 만약 허난설헌이 다시 태어나 지금 21세기에 환생했다면 세상살이 나아졌다고 할까?


세월이 흘러 고생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악습을 끊어주면 좋겠건만 안타깝게도 여전한 세상이다. 나 역시 결혼 전 ‘고부갈등’은 인터넷에 떠도는 일부의 과장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조선 시대와는 다르게 여성 인권 수준이 많이 올라가서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믿었으나 착각이었다. 결혼 후 시가에 가면 나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 이어질 때가 있었다. 나를 누르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시가에 갈 때마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시가와 남편으로부터 온갖 시기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 공간에 살아야 했던 17세기 허난설헌과 21세기의 내가 만난다면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펑펑 울며 위로했을 것이다. “허선배. 시어머니는 왜 이렇게 며느리에게 바라는게 많을까요?"


왜 한평생 힘들었을 며느리들은 김성립의 엄마와 같은 시어머니가 되어 대대손손 이어져 오고 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자의식 없이 ‘역할만이 남은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는 사는 동안 선택권이 없었다.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눈떠보니 어느 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시부모님의 뜻대로 하루가 종속된다. '이 삶이 내가 원하던 것인가?', '나에게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급급하기에 질문을 던지면 속만 시끄러워질 뿐이다. 일생의 목표는 ‘무탈한 가정’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허초희는 사라지고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한평생 김성립의 엄마도 그 의무와 무게가 힘들었을게다. 생의 끝자락에서 내가 행복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물음표를 지워버린 지 오래기에 이마저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마음 한쪽이 허무해져 온다. 


가부장제의 ‘며느리다움’이 대물림되는 두 번째 이유는 가부장제 안에서 사고가 갇혀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며느리 시절 힘든 기억은 그저 무용담이 되고 시어머니가 된 그녀는 이제 새로운 후임자를 찾을 뿐이다. 인간 허초희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다. 내 아들을 챙겨줄 사람, 내 아들의 자식을 낳아줄 사람으로서 자신이 그랬듯 며느리 역할에 충실한 사람만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에도 현대에도 김성립의 엄마에게는 내 아들의 출셋길을 위한 조력자로서 충실 할 때만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시대상이 변하여도 가부장제에 갇혀 제한된 그녀들의 삶에서 시인 허초희나 직장에서 성공하는 현대의 며느리는 필요 없다. 자신이 그랬듯 시부모님에게 꼬박꼬박 안부 인사하며 아들을 잘 보살피는 며느리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배려를 이제 하는 것뿐임에도 오히려 ‘나 요새 며느리 눈치 보잖아’라는 말로 자신이 시대에 맞는 좋은 시어머니라 생각한다. 정작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독서나 좋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시대 흐름에 맞춰 잘 가고 있는지 조용히 성찰한다. 그러나 가정의 틀에 갇혀 고립되어 있던 사람은 나 정도면 좋은 시부모인데 왜 이러한 갈등이 일어나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며 갈등을 이어간다.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살던 친정을 떠나 여자라는 이유로 억압된 결혼생활을 한 허초희와 21세기의 나는 똑 닮아있다. 나 역시 의충효 문화에서 살아왔기에 결혼 후 시부모님이 내게 ’친정을 잊어라’ 고 말하시는걸 듣고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와 울기만 했다. 시부모님은 내가 이렇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상처가 깊었는지도 모르셨다. 시가에 갈 때마다 이어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상담실로 뛰어갔다. 상담 선생님에게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었다. 속앓이를 털어내며 말했던 여러 상황을 조합해보니 결과는 놀라웠다. 시부모님의 성차별적 발언은 오히려 내가 시부모님과 잘 지내보려고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할 때 일어났다. 내게 불편했던 발언들은 사실 시부모님이 내가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주는 팁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나라는 사람이 존중되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스승, 형제들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랑받는 삶을 살던 허초희가 시가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비참함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시대가 흐르고 있지만, 가부장제 안에서 갇힌 사람의 시계는 흐르지 않았다. 


이들의 시계가 흐르지 않게 강력하게 막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인으로서 ‘독립하지 못한 남편과 아들’이다. 자녀 양육의 목적은 성인이 되면 사회로 나가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도록 독립시키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가 원하는대로 살아야하는 소유물이 아니다.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시집간다‘라는 말은 구시대적 발상의 잔재다. 며느리가 시가에 들어가는 것이 결혼이 아니다. 결혼은 각자의 집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많은 남성은 여전히 아내가 며느리로서 자신의 집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나를 열심히 키워주신 부모님을 위해 우리 부모님이 바라시는 안부 전화, 생신상, 김장 등을 배우자가 당연히 해야 한다 생각한다. 혹은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큰 착각이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말고 며느리, 아내답게 살 것. 너 자신을 버리고 가부장제의 바퀴가 되어 살 것을 주문하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되어 21세기까지 김성립의 엄마는 대물림되어 내려왔다. 


허난설헌이 이전 세대처럼 강릉 친정에서 결혼생활을 꾸려나갔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니 친영제가 되었더라도 안동 김씨 일가가 허난설헌을 ’김성립의 삶을 위해 내조하는 사람‘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인간 허초희로서 가능성을 무한히 펼쳐나갈 수 있도록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과거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또 다른 허난설헌이 결혼으로 날개가 꺾였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허난설헌은 자신의 문장과 글로 후세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며 결국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을 틀에 가두며 옥죄일 거냐고 묻는다. 이제는 변화해야 하지 않겠냐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귀하게 보라고 하는 허난설헌의 목소리가 계속 맴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할 때(@흔희)
  업무 조정으로 새로운 부서에 근무한지 한 달 즈음이 지났던 날이었다. 사무 보조원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 문제로 육아기 단축 근무제를 쓰고 있어서 2시 이후부터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하루는 난감한 얼굴로 부탁을 하였다. 퇴근 전에 인쇄실의 작업이 끝날 것 같지 않으니 대신 문을 닫고 보안 키를 눌러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작업이 끝나자 인쇄실 문을 닫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리자가 내게 인쇄실 문을 닫은 연유를 물었다. 사정을 말하자 사무실 내에서 그녀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다들 고등학생, 대학생을 키우는 워킹맘들이었다. "문 닫아주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라고 말하니 한 사람이 "같이 애 키우는 입장이라서 편 들어주는 거냐"며 가시 박힌 농담을 건넸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애를 키울 때는 그런게 없었던 때라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말투는 나긋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아서 멋쩍게 웃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계속 그 장면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육아기 단축근무제를 쓴다 해도 일을 덜어주진 않는다. 짧은 근무시간 내에 업무를 다 해내야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일한다. 나에게는 보이는 것들이 왜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호되게 신고식을 경험한 선배가 후배에게 더 잔인한 경우를 흔치 않게 본다. 같이 아이를 키워보았지만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먼저 걸어본 선배가 후배에게 보여주는 여유는 없다. 더 높은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댈 뿐이다. 사회 생활이니까. 인정을 바라기에는 너무 삭막한 곳이니까 그런 것이겠지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아니다. 안식처라고 일컬어지는 가정이라는 조직에서도 이런 부류의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시어머니의 심술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는 말처럼 말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되고 그녀는 다시 며느리와 갈등한다. 세대를 이어 고부갈등은 전승되고 있다. 

  결혼을 기점으로 며느리는 시가라는 새로운 조직에 편입된다. 사위는 처가에 가도 자신의 성을 유지한채 '~서방'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며느리는 '새아가'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대우받는 사위와는 달리 며느리는 기존의 조직에 편입된 새로운 구성원으로 대우받는다. '새로운 아기'가 되어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레이스를 시작한다. 이미 그 과정을 혹독하게 겪은 선배가 있다. 업무를 인수인계하고자 하는 선배와 이에 허덕거리는 후배가 불협하기 시작한다. 이 조직의 기존 멤버였던 남편과 시아버지는 방관한다. ‘새아가’의 미숙함 정도로 넘어간다. ‘새아가’는 괜히 맞섰다가는 집안이 시끄러워질 것 같다. 그래서 참는다. 불합리하지만 이 평온함에 만족한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새아가’ 덕분에 집안은 평온하다. 그리고 ‘새아가’는 시어머니가 된다.

  문제는 ‘새아가’는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폭력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하기에 시집살이를 폭력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시집살이가 모질어 질수록 내 안에서 싹트는 슬픔, 고통, 정의감, 자율성을 외면한다. 참고 견뎌낸 자신의 인내심에 몰두한다. 험준한 텃밭에서 싹을 틔워낸 자신에게 시련을 극복한 자아상을 부여한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된 선배 ‘새아가’는 후배 '새아가'에게 말한다. ‘나도 했던 것을 왜 너는 못하니. 나는 더한 것도 견뎌냈단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고단함에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며 규율의 잣대를 들이민다. 자기가 견딘 세월에 비하면 며느리의 삶은 수월하다고. 나는 별난 시어머니가 아니며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고부 갈등이 대를 이어 전수되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부갈등의 대물림을 시어머니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고부갈등이 대물림이 된 기저에는 그 집안의 기존 멤버였던 남편과 시아버지의 방관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시절에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고 보폭을 함께 맞춰주는 그 누군가가 집안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말살해가며 버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바깥 양반'이 밖으로 돌면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동안 '안 사람'은 엄마, 며느리가 되어 객체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집안의 평화가 누군가의 희생을 먹이삼아 일구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또 다른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그 누군가는 그녀가 자신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지해줬어야했다. 집안의 가풍에 익숙한 사람은, 그래서 그 문화에 걸맞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며느리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그 집에 있어 왔던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부갈등의 대물림은 피해자들의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수되는 과정일 수 있다. 인간적인 감각이 말살된 시어머니가 어떻게 며느리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남편과 시아버지가 나쁜 시어머니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묻어둔 채, 우리 사회는 비난의 화살을 나쁜 시어머니와 고분하지 못한 며느리에게만 쏟아대고 있다.
  
  임신한 후 12주가 되었을 때, 무리한 탓인지 갑자기 하혈을 했다. 놀란 마음에 부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병원에 달려간 적이 있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고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이 났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부장은 애를 낳은지 오래돼서 자신이 잘 챙기지 못했다며 내가 맡고 있는 업무중 하나를 덜어 가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기 단축근무제를 사용할 때, 나를 타 부서로 이동시키려는 여성 관리자가 있었다. 제시하는 이유도 납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관리자에게 대신 쓴소리를 해주던 부장도 있었다. 동동거리며 아이를 키워냈던 자신과 겹쳐보였다고 했다. 사회성은 공감에서 비롯된다. 공감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여 상대방에게 다가가게 하는 힘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것은 비단 고부갈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간호사의 태움 문화, 학교 폭력, 군대의 군기 등과 같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양산해내는 사회 구조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런 구조를 해체하는 힘은 타인의 아픔을 볼 줄 아는 공감, 즉 사회성에서 나온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당함을 견딘 자신의 경험을 무기로 쓰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인내의 경험을 곤경에 처한 상대를 이해하는데 쓰길 바란다. 견디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은 또 다른 고립감과 외로움을 낳는다. 그 고리를 여과없이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고리를 끊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고통을 호의로 전환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우리 사회는 살아갈만하다. 사회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 사회는 좀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며느리는 왜 며느리를 학대하는 시어머니가 될까? (@못골)

사용자에서 노동자로, 혹은 노동자에서 사용자로, 박수치는 사람에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바뀌게 될 때 올 인식의 변화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며느리에서 시어머니의 지위로 바뀐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현재 심성에 근거하여 앞으로 변화를 예측하지만 너무나 급격하게 바뀐 지위는 그런 예측마저도 대부분은 빗나가게 된다.


현직에 근무할 때 남교사보다 여교사들이 육아, 가사로 업무에 부담이 더 크리라 생각했다. 대개의 교사들은 정시 출근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한다. 일찍 출근하니 30분 정도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퇴근 시간을 조정하자는 건의를 했다. 여자 학교장은 자신이 교사일 때는 학교가 전부였고 학교생활에 전념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젊을 때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여 여교사들의 고단함을 덜어 주려는 배려보다는 자신이 당했기 때문에 젊은 교사들이 학교생활에 전념하는 근무 자세가 당연하다. 그래서 퇴근 시간 조정은 불가하다고 한다.


군대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악의 대물림이라고 할까? 졸병 때 구타를 많이 당할수록 선임이 되면 구타를 많이 행하는 사병이 된다. 나는 맞았지만 내 후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겠다는 악의 연결고리를 끊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으면 사회 집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악의 고리를 끊기가 어렵다.


며느리 학대는 조선 시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남존여비 사상과 상놈과 양반의 구별이 뚜렷하던 시대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그때는 모든 곳에서 차별과 불평등이 당연시되던 사회 구조였다. 남성들이 혼인하면 아내와 처가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 혼인제도에서 친영제로 조선 중기 이후 신부가 시가집으로 시집을 가는 제도로 바뀌었다.


시가집에서는 며느리가 최말단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면 시어머니가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하던 노동을 며느리에게 전가한다. 며느리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육체적으로 핍박하는 가학적 입장으로 바뀌어 이제 시어머니는 군림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가 조선 시대 일반적이었다. 늘 시킴을 받는 며느리는 고되기 이를 데 없지만, 상대적으로 며느리에게 명령하고 징벌하는 상급자로서의 시어머니 지위는 누구나 갖고 싶고 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런 지위가 주어지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행위가 전부인 양 생각하고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 것이라는 이심전심의 자비심은 애써 마음 한구석으로 짓눌러 버린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같은 사람이다. 지위가 바뀌니 그에 맞추어 내재하고 있던 복수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당했던 그 고난 겪은 시절을 너도 당해야 한다는 몹쓸 심성이 시어머니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여자로 태어난 일, 조선에서 태어난 일, 그리고 남편을 잘못 만난 일을 인생 최대의 후회스러운 일로 들었다. 그런 후회는 지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리적 환경은 농경사회에서 우주 시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지만, 심리적 환경은 아직도 조선 시대 말기에 머물러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몇몇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선도역할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가능하다.


딸, 며느리, 시어머니의 갈등 고리가 남자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남자 역시 고부 갈등 사이에서 취해야 할 입장이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아내 입장보다는 효자라고 하는 전통적 입장을 중시하여 어머니 편에서 아내를 고압적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인식이라면 이 악순환의 벗어남은 거의 절망적이다. 그런 문제로 많은 가정이 파탄 나기도 한다. 힘들게 핍박받는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은 고부간을 조정하고 중재하며 밀착시켜주는 타협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적 요소는 여전히 우리 정신세계에 사회문화의 제도적 잔재로 존재한다. 고부갈등도 그러한 잔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오늘날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또 다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변하여 오히려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시집을 사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며느리에게 사는 시집살이는 이미 서구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부자연스러운 고부 관계가 싫다 보니 혼인한 자녀는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부모 역시 자녀와 서로 멀리함으로써 영향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 독립적 관계를 유지해 서로 심리적 편안함을 도모하려 한다. 그 결과 오늘날 혼인한 자녀와의 가족관계는 심리적으로 과거보다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며 독립적인 가족관계로 바뀌어 있다.


고부 관계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고 그 관계 속에 서로를 녹여 가는 과정이다. 너를 보며 나도 그렇구나! 하는 반성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이 먼저이다. 마음을 열고 측은지심을 드러내어 서로 얼마나 힘들까! 하는 자비심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의 업적을 혼자서 이룬 것으로 착각하지만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지원과 연대와 관계 속에서 나의 현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따뜻한 심성을 베풀어 함께 가족 문제를 개선해 나가려는 동반자로서 연대감이 필요하다. 

<어휘 해석 첨가>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에 38년을 머물렀고 서울에선 10년을 산 것으로 돼 있다. 며느리보다 딸로서 오래 산 것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중반은 현모양처의 토양조차 조성되지 않았다. 시집을 전제로 자식과 남편을 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서 당시 혼인 관행을 엿볼 수 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여자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남자는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란 뜻이다.

*남귀여가혼 제도 =고구려 서옥제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남자가 처가에 장가드는 형태, 조선 시대 중기 이후까지 이어짐

*차이점 : 서옥제는 혼인 후 일정 기간 처가에 머물다 남편 쪽으로 거주지가 정해짐. 남귀여가혼은 혼인 초기 후의 거주지가 남편의 집으로 고정되지 않음. 우리나라 전통혼례는 조선 중기까지 “남귀여가혼”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고,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친영례(신랑이 신붓집 가서 식 올리고 신부를 데려옴) 는 보통 왕실 같은 데서나 하던 것, 18세기 이후에야 민간에 퍼짐. 그전까지 주류풍습이 아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있는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저자 이순구가 전하는 조선의 ‘색다른’ 가족상이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매우 달랐다는 거다. 17세기 이전까지 딸은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상속재산을 결혼 후에도 관리했다. 칠거지악이라는 말은 있었으나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령 큰 죄로 몰렸던 자식을 못 낳는 문제조차 ‘양자’로 해결됐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은 “꽉 막힌 남성 중심사회가 아니었다.”

 

‘장인 집(장가)에 든’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풍습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를 깨뜨린 건 중국 바람이다. 부계 위주 문화가 선진적이란 인식이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여인의 숨통을 조이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딸이란 정체성이 며느리로 바뀌는 순간 가족의 역학관계는 적잖은 변화를 겪는다. 


출처 : 16세기 조선엔 처가살이만 있었다, 2011-11-25, 이데일리 오현주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어디서나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으로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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