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통 일 아니던데요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야망백수입니다.
한 달 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연차를 몰아서 쓰고,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축하해주신 모든 풀칠러님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열흘 동안 SNS도 메신저 알림도 꺼두고 지내다

다시 한국에 와서 핸드폰을 켜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늙은 노인이 된 것 같기도 한데요.


내일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게 다 얼떨떨하네요.


이 얼떨떨한 마음이 사라지는 게 왠지 아쉬워서 오늘은 이런저런 감상을 손 가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결혼 회고>


1
결혼식은 정말이지 '일'이었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맡은 것과 비슷했다.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된 이런저런 절차와 그에 따르는 비용들. 연락. 검수. 전달. 비용 정산. 회의. 그 사이사이의 커피.

결혼식 다음 날에도 출근을 했다. 붙들고 있는 일을 다 매조지려면 한 주 텀이 필요했다. 출근해선 AI를 붙들고 10시간 정도를 보내다 퇴근 후엔 하객들에게 인사를 돌리던 한 주. 노동과 일상, 일과 말, 우정과 동료, 인간과 컴퓨터가 뒤죽박죽 뒤섞인 나날 속에서 나는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있단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찾아낼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풍습은 왜 생겼고 왜 유지되고 있을까. 신랑 신부의 제정신 유지를 위해서? 겨우 올라탄 비행기에서 혼인서약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돈. 집. 스펙. 남들처럼. 이 정도는. 이런 세상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휘둘리며 함께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서로가 걱정 없이 인생의 선물을 누릴 수 있도록 제 몫을 다하길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바쁜 서로를 위해 매일 적정량의 고요를 선물하겠습니다. 그러다 주말이 오면 모든 고민을 다 내려놓고 같이 카페에 가서 티타임을 즐기겠습니다.

이런, 이 내용들을 지키려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모든 게 다 일 같은 나날이지만 그래도 '일 같지 않은' 무언가를 어떻게든 찾아내 꽉 붙들어야 할 텐데. 쓰레기 같은 AI 콘텐츠들 사이에서 그나마 괜찮은 결과물을 골라내듯이. 그럴 체력이 우리에게 남아있을까? 비행기의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손을 찾아 쥐고 잠을 청했다. 비행기에선 피로가 권장되고 나는 이 점 때문에 장기 비행을 좋아한다.


2
우린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간다. 거리는 낯설지만 여행이 어떻게 작동하는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인터넷에서 갈 곳을 찾아본다. 그중 한 곳을 선택한다. 결제를 한다. 리뷰를 남긴다. 이 방식은 이미 만국 공통이다. 우리는 외국어엔 서툴지만 이런 방식의 소비는 네이티브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이번 여행에도 모험이라고 부를만한 순간은 있다. 원래 가려고 했던 도시에 홍수가 나서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 같은. 하지만 우리는 AI 앱으로 금세 대안을 찾아냈다. 이 물건은 어떤 요청이든 막히는 법이 없다. 유료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신혼여행 예산은 넉넉하다. 덕분에 여행하는 동안 좋은 친구를 꽤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호텔 프런트 직원. 호텔은 온수가 잘 안 나왔고 조식이 맛없었지만 그가 굵은 손마디를 어깨에 올리며 친근함을 표시해 주는 게 나쁘지 않았기에 별점 5점을 줬다.

그리고 또 보자. 시골 레스토랑에서 만난 교민. 그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친절했지만 음식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맛이 없었다. 하지만 생수랑 초코바 등 이것저것 선물을 잔뜩 받았기 때문에 도저히 나쁜 별점을 줄 수 없어서 별점 5점을 줬다.

마지막으로 들른 도시에서 한국인들 필수 코스로 유명했던 기념품 매장의 직원은 과연 대단한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특별 가격 제시, 무료체험, 박리다매, 업셀링, 사은품 등 모든 판매기술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캐리어를 기념품으로 꽉 채운 다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임 해피"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기 이름을 넣어서 리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부부는 이번에도 별 5개를 남겼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린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신혼여행 동안 느낀 점을 말하기로 했다. 애인은 놀러 오니까 노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눈에 잘 보였다고 했다. 택시 기사든, 기념품을 파는 아이들이든, 요리사든. 다들 너무너무 열심히 일한다고, 자기도 돌아가면 열심히 살 거라고 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번화가의 메뉴판들이 온통 AI로 디자인되어 있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본 것과 놀라우리만치 비슷해 보이는 게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리고 때아닌 홍수로 위약금을 물고 여행지를 바꿔야 했지만 바꾼 곳에서도 즐겁게 여행을 했다는 게 참 기쁘다고. 이게 꼭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가 점점 많아지는 아슬아슬한 곳이겠지만 그럼에도 우린 어떻게든 잘 해나갈 거란 예고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앞으로도 계속 바쁠까. 어디든 비슷해지고 점점 위험해지는 이 행성에서 계속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신혼여행이란 뭘까? 미래가 오는 게 무서워서 잠시 도피한 걸까. 아니면 같이 미래로 가기 전에 축제를 연 걸까? 식사는 이런 대화를 반복하며 오래오래 이어졌다.

"언젠가 또 올 수 있을까?"
"꼭 다시 오자."
"언제?"
"언젠간-."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우린 앓아누웠다. 휴가가 하루 이틀 더 남아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나는 기념품으로 가득 차 있는 알록달록한 상점 안에 술탄들이 쓰는 것 같은 화려한 침대를 두고 청포도를 먹는 꿈을 꾸다 깬다. 애인도 뭔가 잠꼬대를 한다. "우와 진짜 재밌다. 콜라가 있네?" 아마도 레스토랑인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앓는 것으로 여행을 소화시키며 긴 잠을 잔다.

잠깐잠깐 깰 때마다 창문 밖의 하늘색은 달라져있다. 창 너머 빛깔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결혼 프로젝트가 끝났단 생각이 비로소 든다. 우린 결혼식이라는 기성품으로 집을 짓고, 적당히 대중적이고 그럭저럭 취향이 반영된 신혼여행을 가구로 들인 다음 마침내 누워서 좀 쉬고 있는 거다. 노동과 소비로 마감된 시멘트 사이사이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박혀있는 게 보인다.

결혼식장에서 들고 있던 꽃. 우리가 그동안 서로에게 써왔던 편지들. 낯선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소리 죽여 나눴던 농담. 하객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식장을 빠져나와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맞았던 비. 이것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순간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찾아오게 되면 그냥 느끼게 되는 시간. 긴장은 풀어지고, 이러나 저러나 살아있어서 참 좋단 생각이 드는 시간.

핸드폰은 건넌방에 던져두고 대신 이불을 푹신하게 부풀려 무릎에 깐다. 여행지에서 흥얼댔던 콧노래 멜로디를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음이 뭐였더라? 내일 출근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내일이 오면 또다시 회사에 나가고, 월급을 받고, 그걸 여기저기 쓰느라 정신없이 바빠지겠지만 지금은 멜로디를 기억해 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파주  :  신혼여행 좋죠. 농담의 탈을 쓴 진담으로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신혼여행은 꼭 가라’라고 말할 정도로요. ‘연락이 두절될 수 있다’는 야백님의 카톡을 받고 걱정했는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오신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보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 좋아지는 여행기 덕분에, 작년 이맘때 보았던 이탈리아의 풍경도 떠올렸고요.

인생이 꼭 신혼여행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업무 메일에 정수리 머리털을 스스로 뽑아댈 이유도 없고, 돈 걱정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길거리 와인이나 젤라또도 원 없이 사 먹을 테니까요. 저는 인생에 주어지는 열흘간의 이 짧은 휴가를 천국 간접 체험이라 믿기로 했습니다. 아마 천국 관리자는 출국 게이트에 이런 안내문을 붙여뒀을 겁니다.


‘배우자와 함께한 천국 체험판은 달콤하셨나요? 더 누리고 싶다면 남은 인생을 부디 열심히 살아주세요.’


자, 일어나시죠. 이곳은 현생이고, 이제 다시 일할 시간입니다…

지난 호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 A : 한 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3일 쉬고 "3일만 일하고" 또 3일 쉬는 주 3일제의 실현. "주 3일제여도 일은 다 잘 굴러간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해피 휴일들 보내세요! 오늘 편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파주 : 저희도 한달의 달콤한 휴가(휴재)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쉬는 동안 영감이 와랄라 떠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글을 만드는 건 마감인가 봅니다. 공휴일이 없는 11월, 잘 버텨봅시다!
풀칠러 B : 우리동네! 저도 드디어 우리동네라고 부를만한 곳이 있어요. 20대때부터 10년도 넘는 시간동안, 어딜가나 1~2년정도만 머무르다 항상 이사하고 그래서 '우리동네'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었거든요. 근데 지금 정착한 곳은 5년도 넘게 살고있다보니 이제야 '우리동네'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사갈 예정도 없구요! 한번도 인사해본적은 없지만 매일 지나가다 보면 마주치는 동네 주민들이 있어요. 다들 같은 모습으로 매일을 살아내는구나~,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많이 커서 이제는 사춘기를 겪고있구나~, 처럼 동네주민과 함께 나이가 드는게 느껴져요. 친하게 지내는 마트 주인 아저씨가 있는데, 그 마트가 입점하는 것과 동시에 저도 이사왔거든요. 근데 갓난아기였던 저희 아기를 데리고 들락날락했고, 종종 장 보러 갔다가 사는 이야기 하고 그랬어요. 이제는 이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간다고 이야기했더니 시간 참 빠르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하네요. 저는 이 동네를 앞으로 더욱 사랑하게 될 거 같아요.
파주 : 저도 작년 늦여름에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요. 봄이 올 때까지 도통 동네에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그 시절이 무색할 만큼 완벽하게 적응했습니다. 단골이라 부를 만한 마트와 미용실이 있고, 얼굴을 알아보는 포장횟집 사장님도 생겼고요. 풀칠러님의 동네 이야기를 보고고 나니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드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풀칠러 C : ‘출퇴근은 돌아감의 반복‘이라는 말을 보고 처음에 갸우뚱했다가 뒤에 나오는 문장을 읽고는 ‘윽…‘하고 스스로 멱살을 부여잡았습니다. 저는 돌아갈 곳이 집뿐인지라 너무 부러워서요… 여기도 저기도 모두 돌아간다는 느낌이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저는 ‘돌아온다‘는 느낌으로 ‘우리 회사‘로 출근한다 생각하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남의 회사‘로 출근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며 살기로 했습니다. 그치만 언젠가 쌍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을 꿈꿔봅니다. 
야망백수 : 저도 돌아갈 곳은 집 뿐입니다...만 가끔 집에 왔는데도 '아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혼잣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때의 집은 어디일까요? 회사일까요? 사무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니 무의식이 회사를 집으로 인식해버린걸까요? 그런 거라면 프로이트 할애비라도 찾아가서 무의식 개조를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풀칠러 D : 놀랍게도 야망백수님 글을 읽고 격하게 공감해서... 저랑 밥 한끼 하자고 할 뻔 했습니다 ㅎㅎ '우리'라는 단어를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의미를 좀 생각해보게 되었고, 주변에 타지에 가서 살아남고 있는 지인이 떠올라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살아야하겠죠...
야망백수 : 서울살이 N년차인데요. 요즘엔 자취방 있는 동네가 '우리동네' 같고, 고향이 타지 같습니다. 이게 서운하기보단 그냥 살다보면 일어나는 일이구나 싶네요 ㅎㅎ. 타지에서도 지내다보면 '우리동네'로 만들어주는 단골 가게들, 같이 밥먹어줄 친구들이 생긴다는 걸 한번 겪고 나니 뭔가 대충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같구요. 언젠가 타지에서 낯선 풀칠러로 만나게 된다면 밥 한끼 하시지요. 오늘도 계신 곳에서 풀칠 화이팅입니다!
11월이라니. 밤이 부쩍 길어진 게 느껴집니다.
오늘 쉬면서 페르세폴리스라는 그래픽노블을 읽었는데요, 이런 대사가 와닿더라고요.
"밤은 조언자란다"

이번 연말은 끝을 향해 가는 숫자에 조바심을 느끼는 대신 밤의 조언에 귀기울여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정을 담아
풀칠 팀 드림
credit
에세이 | 야백
코멘트 |  파주
풀칠러스케치 | 야백
편집 | 야백, 파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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