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여름 안부 인사
결에게,

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은 동네 카페에 와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너른 창으로는 반죽처럼 뭉개진 구름들이 보이고, 나란히 앉은 사람의 책 읽는 움직임이 곁눈으로 느껴져. 뒷자리에 앉은 연인은 느린 호흡으로 꾸준히 다투고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시킨 치즈 브라우니를 한입 떠먹었는데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조금 감동받았어. 함께 주문한 페퍼민트 티의 청량함과 잘 어울리는 단맛이야.  


이번 주는 바람이 좋은 날들이 이어졌어. 지난주만 해도 높은 습도에, 바깥을 걸을 때면 얼른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었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만 서도 금방 땀이 식어서, 그곳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이 많아.


매미 소리를 처음 들은 날들이기도 했어. 어느 날 아침,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자세로 잠에서 깼는데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어. 뭐가 다르지? 정신을 모아 생각했는데 바로 매미 소리였어. 내 방 창 멀지 않은 곳에 가로수들이 줄지어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되니 왠지 든든했어.


옥상에 올라가 일몰 사진과 구름 사진을 찍기도 했어. 휴대폰 카메라로 찍다가 색감이 과장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다닥 내려가서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 그 사이 하늘빛이 바뀌어 있어 아쉬워하면서도 그 새로운 빛에 마음이 환해지던, 그런 날도 있었어.   


여름의 안부 인사를 전해 들은 기분이었어. 여름에게서 ‘안녕, 나는 잘 지내고 있어’라는 편지를 받은 기분. 그 여름 안에서 나도 조금은 자연스러운 날들을 보냈어.


*


친한 언니에게 얼마 전 마음이 상한 일이 있었어. 언니가 내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도 없었고, 당시 내 기분도 크게 나쁘진 않았는데 그 일이 잊히지 않았어.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 하고 그냥 두었는데 오히려 여러 감정이 섞여 몸집을 불려 나갔어.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서 머리가 아팠어. 언니랑 알고 지낸 10년 동안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


좋아하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글을 쓴 날이 있었어. 글을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고 남은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려는데, 지금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카페에는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어. 그곳에 앉아 눈물이 새어 나오는 눈을 꾹꾹 누르면서 언니랑 통화를 했어. 모든 말이 조심스러웠고, 무서웠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어.


그리고 며칠 후 만난 언니에게 귀여운 하늘색 꽃자수 양말을 받았어. 선물을 주면서 언니가 함께 있던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어.


‘민경이가 나 때문에 삐졌어서 준비한 거야’


너무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감정을 토로할 때 ‘삐졌다’라는 말로 내 감정을 정리하는 걸 싫어했었거든. 근데 언니 입에서 나온 그 ‘삐졌다’라는 말을 듣고서는 안심이 되었어. 그 일이 삐짐이라는 가벼운 말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게 좋았어. 나 혼자 가지고 있을 때는 너무 무거웠거든.  


*


결아, 너는 언제 억울함을 느끼는 편이야? 나는 내가 타고난 기질에 대해 생각할 때 자주 억울함을 느끼곤 해. 언니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한결 가벼워져 카페를 나오던 그 순간에도 나는 옅은 억울함을 느꼈어. 작은 일에도 쉬이 마음이 상하는 나의 무름이 싫었고, 상한 마음을 나누는 걸 가로막는 나의 불안이 미웠어. 그럼에도 계속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많은 걸 나누고 싶어 하는 무모함이 바보 같았고.


그런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기질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어. 무르기 때문에 유연한 마음을, 불안 덕에 피할 수 있었던 상처들을, 무모하게 다가선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들을 생각했어.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나를 위로하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어. 그럼 그것들에 집착하게 될 테니까, 그것들을 얻지 못할 때 더 큰 억울함을 느끼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나의 기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하는 억울함도, ‘그래도 이런 걸 얻을 수 있잖아’하는 위안도 사라지고 해방감을 느꼈어. 뭉쳐있던 감정들이 흩어지고, 그 자리에서 자유가 시작되는 게 느껴졌어.


*


행복, 기쁨, 재미에 나는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큰 만족을 느껴왔었어. 하지만 요즘은 자유로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 예전에는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과 자유로움을 동일시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다르다는 걸 알아.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보단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더 자주 하는 것 같아.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도 이런 생각에 기반했던 것 같아. 언니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언니랑 있을 때 행복해.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건 좋은 사람을 멀리 보내고, 그 기쁨을 깨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나의 자연스러운 마음이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선택한 거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말하기. 누군가 그것보다 쉬운 일이 있겠냐 물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연습이 많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마음은 언어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바꾸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걸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최소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싶거든. 이때까지는 그게 힘들어서 시간의 흐름에 어떤 마음을 던지기도 했고, 끝내 말하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한 것 같아.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졌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가능한 그러지 않을 거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


*


결아, 오늘도 네 마음에 대한 질문을 하나 건네고 싶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건네야 할 때 너의 마음은 어떤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말이야. 그리고 끝내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순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마음으로 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


*


편지를 쓰는 동안 해가 다 졌어. 아까 본 하늘이 전생의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창밖이 컴컴해. 조금 전에는 가로등 불이 들어오고, 카페 마당에 길게 늘어선 알전구에도 빛이 들어왔어. 불이 켜지는 그 순간을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그 찰나를 목격했다는 것에 마음이 쉽게도 들뜨더라.


여름에는 한순간 바뀌어 버리는 풍경들이 가득하지. 해 질 녘의 하늘, 구름, 나무들, 꽃들, 나비와 개미, 모기와 초파리, 과일들, 소나기, 고양이, 웅덩이, 흙과 산들. 모든 게 빠르게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자라나는 이 계절에는 그 황홀한 풍경들이 흔해지고,

그 속에 선 나도 왠지 조금 자라나는 것 같기도 해.


우리 여름의 안부를 종종 받아보며 잘 지내다가,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어쩌면 한 뼘 더 자란 모습으로.



2022.07.17. 민경

 

추신. 옥상에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내:)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16-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순간에 대해 물었었어. 
"나는 내가 좋아"

민경이, 이번 주 질문이 나오는 부분까지 읽고, 뒷부분은 몇 시간 뒤에 다시 읽게 됐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했던 답변이 민경이 답변과 아주 비슷했어!
1.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2. 자연 속에서 멍하니 감상에 젖을 때
이 두 가지 답변을 생각하고 편지를 보내러 왔거든. 사실, 지난 주말을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보냈어. 가장 중요한 면접을 망쳐버렸거든.

서울로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월요일부터 경기도에 있는 동생 집에 머물고 있는데, 회사까지 가는 데만 거의 2시간이 걸렸어. 여의도 빌딩에 위치한 회사였는데, 하필이면 동생 집에 다리미가 없어서, 입기로 했던 셔츠를 두고 티셔츠를 입고 가야 했어.
겨우 도착해서 1층 안내데스크에서 예약 문자를 보여주고, 키를 받아서 경호원이 지키는 문을 지나 들어가서는, TV 에서나 보던 통유리 사무실에서 커다란 TV에 내 과제물을 띄워두고 면접이 진행됐어. 2대 1 면접이었는데, 면접관 한 분은 내 앞에, 한 분은 일본에서 원격근무를 하면서 화상으로 연결돼 있었어. 난 이 모든 상황에 압도돼서, 내가 입은 옷도, 내 마음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가 그렇게 겁이 났을까.

그 날 먹은 거라곤 달걀 2개, 커피에 케익 1조각이 다야. 뭘 먹을 힘도 나지 않아서 얼른 오늘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 서울에 있는 회사에 그렇게 다니고 싶었으면서, 고층 빌딩은 너무 쎘나봐!ㅎㅎ
이 이야길 쓰면서,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에 대한 답이 또 떠올랐는데,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이 있어.
면접을 망치고 자려고 눕는데, 자연스레 내가 나를 위로하더라고. ‘나는 내가 좋아’, ‘다음에 잘 하면 되지, 분명히 다음은 이번보다 나을 거야’ 다음을 기약하는 자체가, 그리고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나을 거라 기대하는 자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자각이 아닌가 해.
내가 나를 믿는 그 순간은 참 뭉클하고 좋은 것 같아.

말이 너무 길어졌다!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좋지만, 민경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쓰게 됐는데 말이야. 너의 불완전함이 때론 버겁겠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민경이가 참 소중해!
동생과 지낸 지 딱 일주일 됐는데, 서로 너무 반대의 성격이라 별뜻 없는 말에도 상처받곤 해. 그럼에도 화내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는 건, 동생도 분명히 내 흠을 견디고 있을 거거든. 그리고 내가 모르게 날 챙기고 있어. 수건을 세탁해둔다거나, 쓰레기를 버려둔다거나. 우린 말이 너무 안맞다 보니 서로 행동으로 챙기는 편이야.
내가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아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임을 아는 것, 그것만으로 민경이는 충분히 훌륭해. 맘껏 행복하자구! (고마워♡ -민경)
"나는 어떤 향이 나는 사람일까"

월요일 날 네 편지를 읽으면서 ‘혼자서 인터뷰 놀이를 해 보았구나?’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을 하며 나도 똑같이 해 보아야지 했었는데 훌쩍 일주일이 다 가고 있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즈음은 특히 이번 주는 사람 덕분에 너무 힘이 들었던 터라 이러할 나를 예상이나 하고 편지를 보낸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라.
어쩌면 민경의 고민 : 혼자 있는 순간이 소중하지만 함께 인 세계가 재미있다. 는 명제가 항상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참’일 것 같아. 나 역시 ‘혼자 놀기’의 고수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이런 모임 저런 모임을 기웃거리며 그 중의 일원이고 싶어하거든. 그리고 나 역시 사람들과 있을 때는 나를 돌보는 일에 소홀한 것 같아. ◆사람들과 있을 때 나를 살아 있는 상태로 둔다◆는 것은 네 말대로 매 순간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좋은 상황은 극대화 시키고 그 반대 경우는 표현하지 않는 편이야. 이번 주엔 이러한 나의 태도를 ‘위선’이라 몰아붙이는 꼴을 당하여 이제껏 믿어왔던 나의 윤리∙도덕관이 흔들 흔들! (위선이라는 말은 너무 심한 것 같아 -민경)

이참에 주변 인물을 탐색해 보았어. 눈을 똑바로 뜨고 똑부러지게, 남의 시선이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 표준적 범위에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는 사람, 먼저 자신의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 한 뒤 양해를 구하는 사람, 면전에서는 좋게 말하고 돌아서서 욕하는 사람,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기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사람, 나는 어떠한 부류이고 어떠한 향이 날까? 지금 마당에 분꽃 향이 가득하다. 분꽃 알지? 해가 떠 있는 하루 종일 오므리고 있던 찐분홍 꽃잎을 활짝 열어 젖히며 어머! 감탄이 절로 나오는 진한 향을 뿜어내고 있어. 잠시 나는 어떤 향이 나는 사람일까, 악취가 나지 않을까 저어해본다. 다시 꽃을 쳐다보며 생각해본다.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을 견디지 못했다면 저렇게 향을 뿜어낼 수 있을까?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참지 못하고 매 순간 마음껏 발산해 버린다면 무슨 향이 나기나 할까?

주제를 살짝 비껴 간 것 같네. 다시 네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언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있다고 느껴?’ ‘그 순간 네 마음은 어때?’
네가 아름답게도 언급했던 문구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혼자서는 찾을 수 없는 나의 조각들을 만져보고 싶다.’ ‘그 모든 상황에서의 나를 만져보고 싶다.’

나도 이런 마음인 것 같아. 모임을 만들고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를 만나고 일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데 사실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구나 싶네. 그런데 나는 만남을 설레어 하면서도 그 과정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마침내 무리에서 독립될 때 안도를 느끼며 비로서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 지난한 과정을 겪고 난 뒤의 자유로움이랄지, 그리고 그 순간에 몸이 지극히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 내 속의 것들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야. 이런 느낌은 성장 환경과 연관있지 않을까 싶어.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었고 항상 시끌벅적하여 조용한 공간, 나만의 공간을 늘 동경했었거든. 아마 단촐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반대겠지.

홀로 산을 오를 때, 어두운 공연장에서 오롯이 들리우는 음악소리를 들을 때, 만원 버스 안, 낯선 여행지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을 때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꼭집어 정석은 없지만 다르다는 것,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완전히 비워내는 환경을 만나면 비로서 모태에서 갓 태어나던 나를 만날 수 있고 그 순간엔 온전히 나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네가 고민하고 있는 자연스레 포개질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가 저버린 어두운 마당에 분꽃향이 희미하여 코를 대고 맡아본다. 아이~ 향기로워라
답장 잘 읽었어. 어쩌면 우리는 평소에는 자신과 친하게 지낼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가 어떤 사건들을 만나게 되면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나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 그 안에서 스스로를 믿어보는 빛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하고, 나를 완전히 비워내면서 온전히 살아 있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 같아. 네가 다른 존재들에게 마음을 쓰듯,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자신과 관계 맺는 순간이 네게 충분하길 바랄게. 답장 속 너는 이미 아주 잘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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