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지금부터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상이 연결되는 282북스의 온라인 매거진입니다.
#04 _ 문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오기까지

영화 <트루먼쇼>의 마지막 장면을 아시나요?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이 평생 살았던 공간의 끝자락에 도착해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하죠. 그리고 문을 열고 한 걸음을내디뎌 세상으로 나갑니다. 지금껏 살아온 가짜 세상이 아닌, 진짜 자신의 삶이 있는 세상으로. 비슷한 맥락으로 <설국열차>의 명대사도 생각이 나네요. “저게 하도 오래 닫혀있어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


트루먼도, 설국열차의 주인공들도 그들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문을 열기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문을 연다>는 표현이 갖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이나 단계를 시작하는 상징, 억압된 고통의 상황을 벗어나는 탈출의 의미, 새로운 경험과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나, 변화의 시작을 나타내기도 하고 물리적/심리적/사회적 경계를 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죠.


282북스가 만나고 있는 탈 가정 청년들은 삶의 중요한 문을 열고 나온 친구들입니다. 여러 가지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찾아냈고, 그 문을 열어 자신만의 세상으로 나온 우리 청년들. 우리 탈가정 청년들에게 문을 연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탈출이고, 삶의 발견이자 변화이며, 원가정의 경계를 넘는 행위였을 겁니다.


매거진 [지금부터] 네 번째, 각자의 인생에서 마주한 문을 열고나온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editor. 미쉘-

발행일 2024. 05. 28

"억울해요. 요즘 좀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살아요."


2022년, 처음 탈 가정 청년 프로젝트 [궤도이탈; 청년 독립 선언]을 시작하던 해에 프로젝트 참가자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무지님. 그 해 프로젝트에서는 함께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지님이 사는 지역 청년센터에서 하는 재테크 관련 교육프로그램과 시간이 겹쳤는데 우리 워크숍 대신 재테크 프로그램을 선택했거든요.


'이 친구 되게 야무지게 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3년 가을, 다시 만난 무지님. 늘 환하게 남들보다 높은 텐션으로 탈 가정 청년 모임의 분위기를 끌어주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무지님의 그 미소가 마냥 행복해 보였는데, 이번 인터뷰를 하며 그 웃음 뒤 지나 온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가 새삼 기특해 보입니다.


* 이번호는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Interview. 헤이즐 / Edit. 미쉘-

| 간단하게, 자기소개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무지(가명)입니다. 항상 282북스 탈가정 모임에서 신입들을 챙겨주고 있는 분위기메이커 무지에요.


| 무지님하고 282북스가 처음 만난 게 2022년도 여름이었잖아요. 그때랑 지금이랑 좀 마음이 어때요?


많이 바뀌었어요. 어떤 부분은 좀 안정된 부분이 있고, 더 나빠진 부분도 있어요. 그때는 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이 덜 된 상태여서 그런 쪽으로 불안했는데, 지금은 꾸준히 경제활동을 한 지 3년이 되었거든요. 일을 하다보면 좋든 싫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하니까 이전처럼 큰 기복은 없는데, 문제는 제가 많이 벌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점점 주임, 대리 승진을 하는데 저는 그냥 알바인생에 머물러 있다보니 그런 격차에서 오는 불안함은 있어요.

 

요즘은 그런 것들을 좀 타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왜 조급해해요? 본인의 사회생활이 좀 늦은 것 같아요?


저는 솔직히 많이 늦었다고 생각해요. 어릴때는 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생태에서 탈 가정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약대 편입 시험을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준비과정에 깨달았죠. 아, 돈이 있어야 이런 것도 준비할 수 있구나. 3수를 했는데도 안돼서 포기했어요. 그리고 원치 않는 과를 진학한 상태여서 그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하느라 좀 많이 늦었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처음부터 자퇴하고 기술을 배울걸하는 후회가 듭니다.

 

| 언제 탈 가정을 한 거에요? 무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로 벌써 7년차네요. 제가 17년에 가정폭력 쉼터를 들어갔어요. 쉼터에 들어가서 지내다가 18년도에 LH 전세임대 들어가서 그때부터 좀 자유롭게 살기 시작했어요.


통제 당하는 삶이 싫었어요. 음, 제 부모님은 사이비 종교를 믿었어요. 어릴 때부터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또래문화라든지 사회생활같은 걸 접하지도 못했고, 문화에 섞이지도 못했어요. 추론을 해보건대 아마 살고있던 그 지역에 사이비 종교의 신도라고 소문이 난 것 같아요. 왕따의 타깃이 되었거든요. 학창시절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아무도 저와 어울리려 하지 않고. 혼자 밥먹으면 혼자 밥먹는다 그러고 제 자리에 쓰레기 버려져 있고.

그냥 혼자로 내버려두는 정도였으면 좋았겠는데, 걔네 가해자들은 복도같이 무방비한 곳에서 지나가면서 씨발년, 죽어 등의 욕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어요. 제가 하지도 않은 지갑 도둑 누명씌워서 더 괴롭히는 명분으로 삼기도했구요. 차라리 신체적인 폭력이었으면 경찰서에 신고하면 되는데 안 그러더라고요. 그 때 교사들도 그냥 저보고 참으라고 하고.

 

그 때 제 부모는 저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저를 위해 싸워주지 않았어요. 그냥 나를 학교에 맡긴다는 말만하고, 기도해서 맡긴다 이러고. 혼자 세상이랑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버텼어요. 버티고 버티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방대 간호학과를 갔죠.

 

이것도 이야기가 길어요. 남동생이 장애인인데 걔를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장애인 그룹홈을 만들겠대요. 근데 그룹홈 인가가 나려면 간호사가 한 명 필요한데 그걸 저로 하겠대요. 저를 도구로 생각했어요. 모든 생활이 남동생 위주로 모든 게 돌아가니까 제가 소외되고.

 

어떤 때에 따라 필요한 게 있잖아요. 자식을 위해서 그냥 믿어주고 기다려줘야 될 때가 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싸워줘야 될 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반대로 했어요. 도와달라고 할 때는 방임하고, 왕따 당하는 너도 문제가 있다면서 저를 더 힘들게 만들고.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자퇴하려고 했는데, 자퇴도 못 하게 했어요. 죽더라도 학교에서 죽어라 이러면서. 동생이 장애인이니, 저라도 일반적인 삶 정상적인 틀 안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차라리 신체적으로 폭력을 행사했으면 진작 탈가정했을 거에요. 근데 정신적으로 사람을 피 말리게 하니까 정말 너무 힘들더라고요. 오죽하면 맞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말하는 것,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다 통제하고. 간호사 돼서 돈 버는 게 최고라고, 네까짓 게 무슨 꿈을 이루냐고 무시하고. 취업이나 하라고 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쌓이고 쌓여서 탈가정 했는데, 이제 그 탈 가정하니 탈 사이비도 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우리는 우주의 먼지에요. 너도 먼지, 나도 먼지, 중한게 먼지."

지난 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웠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말 아플 땐 차라리 머리가 뽑히는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MRI를 찍기위해 입원을 했어요. 입원하는 날, 노트북을 챙겨가 병원 침대에 앉아 어지러운 머리를 한손으로 바치고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있는거지.'

 

허무함이 몰려와 하던 일을 멈추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병실의 빈 침대를 바라보니 울끈불끈 아프던 머리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어요.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내 삶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 같은 철학적인 것들. 그때 당시에는 분명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 생각하려고하니 생각이 안나네요. 이번에 만난 [어른, 프로보노]는 삶을 대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누구보다 진지하고, 이성적일 것 같은 일을 하는 그녀가 가진 한 없이 가볍고 철학적인 삶을 대하는 방식을 소개합니다.

 

이번호에서 소개할 어른은 미쉘의 언니이기도 한 신경과 의사 강미경 교수입니다.

* 이번호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Interview & Edit. 미쉘
| 안녕하세요,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특기가 없어 책상에 앉아 버티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린 신경과 의사 강미경이라고 합니다.


| 현재 교수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그 일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동탄 소재 한림대학교동탄성심병원의 신경과에서 임상조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환자 진료, 연구, 전공의 교육입니다. 주 진료분야는 두통, 뇌전증, 중추신경계감염 및 뇌염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서 너 타임 외래 진료를 보고, 병동의 입원환자들도 살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상황으로 응급실 진료와 당직근무를 심심찮게 서고 있죠.

 

사실 어떤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하였나? 라고 묻는 물음에 멋진 대답을 하고 싶은데, 멋진 대답이 생각나진 않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처음 의사가 되어볼까? 라고 생각했던 것은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우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사남매가 함께 사는 여덟식구 대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시골 면내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셨어요. 우리네 부모들이 그렇듯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던 건지 (이건 내 생각이지만) 할아버지는 아들 가게 대신에 버스터미널 근처의 작은 동네 의원 구석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곤 하셨어요. 어느 날은 점심시간이 되어 어머니 심부름으로 그 의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는데, 구석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의사가 되면 이런 병원을 내가 세워가지고 우리 할아버지가 눈치 안 보고 딱 한가운데 제일 편한 의자에서 쉴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유지하고 단순했죠. 왜냐면 그때는 하고싶은 직업은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살다 보니 이것도 하고싶고 저것도 하고싶고 어떨때는 다 하기싫고, 중학생때는 나름 공부를 했는데, 고등학생때는 그리 공부를 잘하지는 못해서 지방 국립대의 생물학과에 입학했어요. 1-2학년때는 아마도 정말 정신 못차리고 매일 놀고먹었던 것 같아요. 흥미도 없었고,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했어요. 정말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 심지어 1년 휴학을 했죠. 남들은 휴학하고 저어기 호주에가서 영어라도 배우고 경험이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그런것도 흥미가 없었어요. 모든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했달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직장을 구해보려는데, 이건 무슨 대학졸업장이 필요했고, 무슨 자격증이 필요했고, 영어 점수가 필요했죠. 결국 끌려가듯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어요. 그 때 당시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게 유행이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작년까지만 해도 나랑 신나게 놀러 다니던 사람들이 의대를 갔다는 거에요. 우와 대단하다 생각만 했는데, 어느날 특강에서 의과대학 교수님께서 수업을 해주셨는데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 영상 등을 보여 주셨어요. 그때 ‘아! 저거다!’ 싶었어요. ‘우와! 겁나 멋있다!’ 참 멋없죠?

 

이후에 마음속으로 상상만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어찌저찌 대학은 졸업했고, 여전히 공부는 하기 싫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하다가 25살이 되었을 때, 거울을 보는데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어요. 제 스스로 뭐라도 좀 해봐라!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 이왕 뭐라도 할거면 겁나 멋있는걸 해버리자. 라는 마음으로 3년동안 준비해서 28살에 다시 의대에 들어가게 된 거죠.


| 어찌보면 교수님도 남들보다 늦게 진로를 결정하신 것 같은데, 그 시간동안 어려움은 없었나요?


없을리가 없죠. 친구들은 근사한 직장에 다니고, 월급도 받고, 비싼 옷도 사 입고. 난 아직 수험생이고, 1년 후에도 여전히 수험생이고, 그 후에도 수험생일지도 모르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추접스럽게 울었던 적도 있었어요. 매일매일 내 자신이 한심하고, 포기할까 고민하고 포기하면 이제 뭐할건데? 그런 답답함이 들었어요.


어디 말도 못하죠. 수험생이 끝났더니 이제 또 대학생이네? 그 때 제 나이가 28살이었어요. 그래도 뭔가 꿈을 위해 시작은 하게 되었으니 행복했는데, 이젠 체력이 안 따라주니 그 엄청난 학업강도를 감당하기가 버거웠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을 버틴게 스스로도 대견합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이 되었을 때가 32살 이었어요. 갈수록 태산이었죠. ‘퐁당퐁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당직-오프-당직-오프를 말해요. 과 마다 다르지만 빠르면 새벽 4시에 일이 시작되요. 드레싱, 채혈, 수술실 세팅, 동의서 받기, 비위관삽관, 소변줄 끼우기 등 갖가지 병동콜 업무들. 그렇게 다음날 저녁까지 일을 하죠. 그리고 다음날 저녁부터 오프인거에요. 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저녁에 퇴근해서 다음날 새벽에 또 출근이죠. 그리고 24시간 당직. 당시에 근무처 근처에 월셋방을 구했었는데, 한달에 이틀정도 집에 갔던 것 같아요.


| 이번에 만난 청년은 막 서른이 된 친구인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가정 내 문제들로 인해서 사회 진출이 조금 늦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더라구요.


개그맨 박명수씨가 그랬죠.


"늦었다고 생각 할 때는 정말 늦은 거다."


아 뭐야 ㅋㅋㅋ 하는게 첫 느낌 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맞는 말이에요.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정말 늦은거에요. 그러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것도 우리 전공의들이나 간호사 쌤들이 지겨워하는 말이긴 한데, 우리 지구의 나이가 약 138억년 이거든요.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 있죠. 심지어 그것보다 더 오래된 애들 (항성) 은 이미 빛의속도보다 더 빨리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알수도 없어요. 10-20년의 시간은 지구 입장에서 보면 찰나 와도 같죠. 그리고 비록 지금은 몸과 마음이 부셔질 것 같지만 결국은 찰나와 같이 지나갈 거에요. 견디세요! 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찰나의 순간에 지나갈 시간들이니까요. 그러니, 내가 존재하는 이시간이 찰나와 같이 지나가버리지 않게 나를 잘 보살펴야 해요.

 

“그래서, 늦었다면 안 할거야?” 중요한 건 나의 결정입니다. 겪어보니 나이 먹고 뭔가 시작하고 나니까 오히려 ‘그 것’ 밖에 안보이더라구요.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해 내버리고 싶은 바로 ‘그 것’ 이요. 안 늦었어요. 걱정 마세요

[궤도이탈]은 표준적 삶의 궤도를 벗어나 자신만의 궤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주식회사 282북스의 사회적 프로젝트입니다.
그 첫 번째 삶의 궤도로 ‘탈 가정 청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궤도이탈; 청년 독립 선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본 프로젝트는 서울사회복지 공동모금회 영아너스 클럽 [청청모 지원사업]으로 운영됩니다.
주식회사 282북스
contact@282story.com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로 90, 503호 010-8307-3977
수신거부 Unsubscribe
stibee

이 메일은 스티비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