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IV " 박명인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프랑스의 화가들은 정부가 주최하는 살롱전 외에는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없었고, 마네가 등장했을 때는 2년에 한 번 개최하면서 절대 권위를 갖고 있었다. 이 살롱의 권위가 마네의 작품을 부정하고 희롱하면서 인상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당시만 해도 신화나 종교적 주제라면 허용되었어도 현실적으로 생생한 여자의 나체는 허용되지 않는 시기였다. 이 시대에 살롱전에 출품한 마네의 작품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다. 하나는 옷을 입은 남자들과 나부가 풀밭 위에서 점심을 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이었고, 도전적인 누드를 그린 올랭피아(Olympia)」(1863)였다. 그리고 더불어 소년을 사랑스럽게 그린 「피리부는 소년」(1866)마저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알몸의 여성이 굽이 높은 실내화를 왼발에 걸치고, 오른쪽 다리는 손톱 끝이 보이는 정교한 형태로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는 《올랭피아》신화나 종교적 주제라면 허용되어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여자의 나체는 허용되지 않는 때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올랭피아》는 1856년의 살롱(관전)에 입선했다. 그리고 관중의 분노를 사고, 전시되어 있는 그림 앞에서 지팡이(stick)나 우산을 휘둘렀다고 한다. 비평은 군중의 반응에 추종했다.
마네를 조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깊은 이해를 내보이는 통찰력과 견성(見性)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였다. ‘나는 목하 심한 모욕의 정면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마네에게 브뤼셀 체류 중에 있던 보들레르가 회신을 보냈다. ‘당신은 자신이 샤토브리앙(Châteaubriand)이나 바그너(Wagner) 이상의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들조차 당신과 같이 세상의 실소(失笑)를 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마네보다 11세 연상인 44세였다. 마네는 이 시대의 《경첩(hinge)》이며, 《축》이었다. 마네는 바로 근대회화의 아버지이며, 결정적인 추진력의 동기가 되었고, 그 자극에 의해 일체 관계를 맺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완수한 혁명은 결정적이었지만 실제로 예술 혁명적 성과는 대부분 나타나지 않았고, 마네가 꿈꾼 것은 야심을 태우고 있던 한결같이 관전에서 명성을 떨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세속적인 성공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의 눈에는 악평뿐이었다. 마네는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마네는 죽기 3년 전에 이 때의 심정을 ‘욕을 퍼부어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나의 숙명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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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Olympia), 에드아루 마네(Edouard Manet), 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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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아버지는 판사였고, 스웨덴 황태자 샤를 베르나도트(스웨덴가 노르웨이 앙/칼 14세 요한 왕, Charles ⅩⅠⅤ John)가 어머니의 대부였다. 아버지는 마네가 법관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마네는 해군병학교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16살에 배를 타고 리우데자이네루로 갔고, 6개월 간 항해를 하다가 싫증을 느끼고 17세가 되어 화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가 되는 것은 결코 불명예가 아니라는 의지를 굳혔고, 엄격한 아버지는 끝내 아들을 만류하지 못하고 재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아들의 희망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마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미술공방에 다니면서 외진 부댕(Eugéne Boudin), 토마스 쿠튀르를 사사했고, 플랭 에르(Plein-air, open air)에게 테크닉을 배웠다. 이 때에 수잔느가 그의 인생에 등장하면서 젊은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 후 20대 초반에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벨라스케스, 고야, 할스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수잔느는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에 사는 오르간 교사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피아노의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에 공부하러 온 수잔느는 파리의 부유한 고급관리의 집에 피아노 가정교사가 되었다. 마네는 이 집안의 장남이었다. 수잔느는 마네의 남동생인 아노의 가정교사였다.
아버지는 수잔느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1851년 가을, 마네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19세 소년의 사안(思案)이었다. 이미 혼전에 임신한 수잔느에 대한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수잔느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 우제니 마네는 남편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여자’를 며느리로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교를 좋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우제니 마네는 남편과 15세 젊은 40세였다. 우제니는 방책을 궁리하다가 아들이 수잔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아들을 돕기로 했다. 네덜란드의 수잔느 어머니를 불러 극비리에 두 사람의 결합을 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반대로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1852년 1월 29일, 사내아이를 낳고도 마네라는 성을 이어받지 못하고 근거도 없는 ‘코에라’라는 성으로 살면서 에두아르라는 이름을 계승하기는 하지만 마네를 자처하면서 살지는 못했다. 마네와 수잔느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수잔느의 동생이라고 속였다. 수잔느의 어머니가 낳았다고 하여 자식이 아닌 동생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름은 레옹=에두아르 코에라. 당초 수잔느 렌호프는 임신할 것을 크게 우려했지만 젊은 정열에 밀려 만남이 빈번해지고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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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느는 「블론드(blond)의 머리, 우유 빛의 안색, 통통한 볼, 도자기와 같은 눈, 플랑드르 여성다운 건강한 딱 벌어진 육체, 피아노 건반 위를 민첩하게 움직이는 작은 손의 여성이었다. 수잔느는 전도가 보이지 않는 다감한 소년 마네와 연애를 하고 ‘화가의 아내’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지만 정식으로 아내가 될 때까지 기나 긴 시간이 걸렸다.
마네의 아버지가 1862년에 사망하고 어머니는 일 년간 복상(服喪)을 마친 뒤 수잔느의 본가가 있는 도시에서 13년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마네는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유산을 받았고,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지 못한 아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11세가 되고 있었다. 수잔느는 총명한 마네의 아내였다. 마네가 아버지의 신뢰에 반항하지 않고(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묘사한 「마네 부처」가 처음으로 살롱에 수리(受理)되었다), 결혼을 미루고 궁지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수잔느의 그림자같은 철저한 성격에 힘입었던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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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위의 점심 식사(Luncheon on the Grass),
에드아루 마네(Edouard Manet), 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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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정물, 꽃, 풍경보다도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여성의 매력을 그렸다. 양가(良家)의 품위와 매력을 가진 파리지앵(Parisien)을 그렸다. 성실한 남편은 아니었다. 수잔느는 탐색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내가 되고 나서도 미묘한 일이 생길 때는 조심스럽게 아틀리에에 발길을 향하는 것을 피했다. 어떤 때는 포즈 중인 모델과 활기 차게 수다를 떨며 이야기한 친구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수잔느는 마네가 젊은 여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목격한다.
‘이번이야말로, 현장을 확보했어.’라고 장난꾸러기처럼 검지손가락을 내밀며 마네에게 말했다. 마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하며 두 사람은 미리 정한 것처럼 웃어 댔다고 한다. 잇달아 바람기는 있어도 10대로부터 완전히 친숙해져 있던 수잔느는 마네의 인생에 있어서 둘도 없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마네의 일생에 세 여인이 등장한다. 인상적인 마네의 뮤즈 3명 중 두 명은 화가 빅토린 뫼랑이고 또 하나는 베르트 모르소, 그리고 아내 수잔느 마네이다. 1863년 살롱전에서 정장 차림의 두 남성과 나체 여인의 피크닉을 묘사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Le Déjeunersur L'herbe)와 같은 해 나체의 매춘부가 등장하는 올랭피아(Olympia)로 화단에 폭풍을 일으킨 두 작품의 모델이 바로 빅토린 뫼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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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파 위의 마네 부인》(1874-78)은 파스텔을 사용해서 그렸다. 작은 구두, 손의 자세한 손가락 등은 젊은 날의 몸매를 상상하게 한다. 소파의 푸른 색의 아름다움, 부드러운 질감이 인상적이다. 소파의 푸른 색의 아름다움, 부드러운 질감이 인상적이다. 눈도 코도 입술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생활의 일부가 된 아내, 태연한 수잔느. 마네가 모델로 항상 바라고 있던 ‘자연스러운 모습’이 표현되어 부부가 궁극의 평온을 보이는 한 장의 그림, 이상하게도 편안해지는 ‘아내의 초상’이다.
보불전쟁 즈음에 파리가 포위되었을 때, 수잔느에게 쓴 마네의 편지가 있다.
‘사랑하는 수잔느, 나는 장시간 당신의 사진을 찾다가 드디어 응접실의 테이블을 빼내고 그 안에서 앨범을 찾았소. 지금은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을 시종 바라볼 수 있소’ (1870년 10월 23일)
‘당신을 한 번 더 팔 안에 부둥켜 안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12월 18일)
마네는 방을 아내의 초상화로 다 메워 놓고 아내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잔느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수잔느도 ‘육성’을 남기지 않는 화가의 아내였다.
13년 만의 결혼과 마네라는 성을 주지 못한 아들 레옹의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마네는 1883년 4월 30일, 5년 동안 증상이 악화되어 괴저(壞疽)에 의해 왼발을 절단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51세 나이로 절명했다.(마네의 어머니는 이 해 반신불수가 되고, 2년 후에 사망했다).
마네가 죽음의 전년, 죽음을 예감해서 쓴 유서로 아내와 유산을 받을 사람을 지정했다. 결국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의동생(실제 아들)’인 레옹이 헌신적으로 마네를 병간호했다.
보들레르의 최후의 날 수잔느를 제1급 여류 피아니스트라고 했고, 수잔느는 그가 좋아한 바그너의 탄호이저의 한 구절을 연주했다. 남편이 격통(激痛)과 죽음의 공포로 고생할 때는 소나타를 연주했다.
여행할 때는 언제나 수잔느가 동했고, 아내는 마네에 있어서 보금자리였다. 마네의 사후에도 수잔느는 아들을 ‘남동생’으로 1906년까지 산다. 수잔느가 사망하고, 이 레옹이 만든 ‘에두아르 마네 미망인의 상속’이라고 새겨진 인장은 시기적으로 경과해서 작품평가가 정해진 마네의 작품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마네의 사후, 개조(改竄)된 그 그림에 대해 소송을 일으키는 허가를 받으러 간 쥬리 마네(마네의 남동생 우제느와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외딸. 마네의 조카딸)은 1899년 2월 7일의 일기에 글을 남겼다. ‘그러나 결국, 나는 상처받고, 모욕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아무 것도 할 말은 없다.’수잔느의 백모는 개조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 망설이다가 그림의 뒷면에 ‘이것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이다’라고 서명해버렸다. 그녀는 네덜란드인 특유의 농샬랑스(nonchalance)로써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만 이 누드는 그가 그린 것입니다.’
1878년 11월 생의 쥬리는 20세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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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파에 앉아 있는 마네 부인 수잔느(Madame Manet on a Blue Sofa),
에드아루 마네(Edouard Manet), 1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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