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시.사 레터 17회 (2021.08.11.) 안녕하세요? 시 쓰는 김개미입니다. 정말 무섭게 덥네요. 더위를 뚝 떼어 창고에 넣어두었다 겨울에 꺼내 쓰면 좋겠다 싶어요. 그래도 간간이 들리는 매미 우는 소리는 좋네요. 이럴 땐 움직이지 않는 게 최고죠. 움직이지 않으면서 시를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김개미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지박령(地縛靈)─유령」(장이지, 『레몬옐로』) 지낼 곳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열심히 찾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라고 하면서 시무룩해졌다. 보증금 때문에, 높은 월세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풀이 죽었다. 그러면 집을 찾을 동안만 같이 있을래? 하고 제안한 것은 나였지만. 방에 돌아오면 항상 그가 있다. 그는 수험서를 잔뜩 들고 와서 가끔 밑줄을 그으며 공부를 한다.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청색광을 흘린다. 내 잠옷을 빌려 입고 내 냉장고를 축내면서 와식(臥食) 생활의 정점을 보여준다. 내가 아끼는 누비이불과 거의 일체가 되어간다. 방 이야기를 꺼내면, 또다시 시무룩해져서는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러면 내게는 내 잠옷 밑으로 길게 삐져나온 그의 흰 발목이 보인다. 참 멀쑥한 슬픔이로고! 그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 슬픈 것이다. 나는 이 멀쑥하게 키만 큰 유령을 피해 다시 거리로 나선다. 무언가 영양가 있는 야식을 사다 먹여야겠다. 하지만 나도 나다, 참. 김개미 시인의 감상💡 나를 그라 부르고 그를 나라 불러보는 일은 시인이 아니라도 하는 일. 우리는 지독히 내가 싫은 나의 원수이며, 열렬히 내가 좋은 나의 팬이 아닐까. 역할과 책임에서 놓여나고 싶어 안달을 하며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낮 동안 무사히(?) 죽여두었던 또하나의 존재가 살아난다. 그것은 내가 아닐 때도 있지만 들키지 않도록 현관문 안쪽에 잘 가둬두었던 너덜너덜한 나일 때가 많다. 그것은 나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 이내 내 옷을 입고 내 밥을 먹고 내 자리를 차지한다. 집에 돌아온 나는 또하나의 원하지 않는 형식의 존재를 감당해야 한다. 잠시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해보지만 피로라는 친구는 서둘러 나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나는 먹을 것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격리와 단절의 긴 터널, 자신의 유령과 동거하는 자신을 요즘처럼 자주 마주친 적이 있었을까. 외면할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나의 이상한 유령을. 💘 막간 우.시.사 소식: "나는 내 생각을 존중한다" 힘센 문장이 가득한 동시집 『미지의 아이』 출간! 오늘의 시믈리에 김개미 시인이 펴낸 이번 동시집은 조금 특별합니다. 동료 여성 시인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꾸린 아지트 같은 동시집이거든요. ‘나’라는 아이, 그 미지의 존재를 탐험하기 시작한 여자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미지의 아이』라는 아지트엔 탐험의 열쇳말이 되어줄 문장들이 가득하답니다. 골똘히 자신을 탐색하며 씩씩하게 세상을 누비는 여자아이를 지금 만나보세요. 💛김개미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게스트 하우스」(박상수, 『오늘 같이 있어』) 목수국 가득한 언덕길을 지나왔어 떨어진 잎들을 모았다가 조금씩 불면서 왔어 작게 말하고 적게 숨쉬는 조랑말이 풀을 뜯는 들판, 들판을 지나 다시 뾰족한 숲을 지나 절벽을 걷다가, ‘그녀는 마침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잊어버렸다’는 문장이 머물러 있는 곳, 목책 위로 기울어가는 마지막 햇빛이 남아 있었어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다시 들이마셨다가 겨우 숨을 내뱉으면 곤충의 다리 같은 빛살이 눈을 멀게 만드는 곳, 시간이 느린 롤러코스터를 타고 멀어지고 있지 어떻게 해, 내가 이렇게 작아지고 있어, 차가운 잔디가 자라고 시간이 흐르고, 분홍 담요가 찢기고 또 찢겨서 그 사이로 시간이 흐르고, 갇혔던 새들이 하늘로 날 때마다 쪽가위가 날갯죽지를 잘라내고 있었지 창가의 나무 덧창이 요동치며 부서져내렸어, 멍든 조랑말들이 절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구나 그렇게 하지 마, 소리 내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전지도 없는 군악대 인형들이 큰북을 울리며 행진하고 있었지 거기로 가지 마, 소리도 없이 숨도 없이 잡아당겨도 빠져나가는 것들, 파도, 절벽, 절벽, 파도, 파도, 파도, 파도…… 김개미 시인의 감상💡 종종 아름다운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공간이 주는 특별함과 더불어 거기서는 내가 게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게스트는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게스트는 게스트 하우스가 무너져도 불편이라는 피해 말고는 피해를 보지 않는다. 어쩌면 공간이 나를 억압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행위가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게스트 하우스는 내 것이 아니라서, 내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서 오래 아름다울 수 있다. 게스트 하우스는 그 누구를 위한 곳도 아니어서 누구나를 위한 곳이 된다. 비범한 존재를 평범한 존재로도, 특별하지 않은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도 바꾸는 마법이 게스트 하우스에는 있다. 누구나 간혹 바람이나 햇살로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한데, 그게 꼭 게스트 하우스같이 실재하는 공간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일상과 루틴에서 나를 꺼내준다면 그것이 게스트 하우스 아닐까. 무엇이 됐든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하다. 오래 머물면 게스트 하우스는 집이 된다. 게스트 하우스가 집이 되면 게스트는 그곳의 구성원이 되고 만다. 거기가 어디든 그가 누구든 들판의 조랑말이 큰 소리로 이야기할 때까지 머무는 건 위험하다. 악몽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조랑말의 큰 눈과 큰 귀가 고통을 전하기 전에, 전지도 없는 군악대 인형들이 큰북을 울리며 절벽으로 행진해 가기 전에 떠나야 한다. 필요 이상의 것을 보아버리기 전에 게스트 하우스를 게스트 하우스로 남겨두어야 한다.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이재현 편집자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이재현 편집자입니다. 문학동네 국내문학 담당 편집자가 여러분께 권하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오늘의 레터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구체적이고 솔직한 의견으로 우.시.사는 성장합니다! 👉 피드백 하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