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제주에 온 지 딱 5년이 된다. 5년 동안 제주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떠나 보냈다. 

제주에서 만나 떠나 보낸 사람, 하면 나는 후배 J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J는 지금 회사에 들어와 만났다. 내가 입사했을 때 J는 편집부의 또 다른 에디터였다. 나이가 많아 선배가 됐지만 특별히 내가 선배 노릇을 할 일은 없었다. 두 동생을 둔 씩씩한 제주의 장녀였던 그는 맡은 일을 곧잘 해냈고, 제주에 대해서도 에디터란 일에 대해서도 더 잘 알았다. 웃는 모습이 아주 예뻤고 시를 좋아해서 술을 마시면 좋았던 시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제주와 에디터라는 일은 물론 시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J만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나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어 알지, 그 시인 요즘 문단에서 잘 나가지, 하며 뜬금없이 선배다운 위엄(?)을 드러내곤 했는데, 거참 왜 그랬을까. 그런 의미 없는 아는 척을 할 바에야 그 시가 어떻게 좋았냐고 더 자세히 물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J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다운 글을 썼고, 나는 절대 쓸 수 없는 글이라 J의 글이 좋았다. 평소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J가 술을 마시고 과감해져 선배, 하고 늘어놓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것 치고 우리가 함께 술을 마신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내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J가 퇴사했기 때문이다. J는 서울로 올라갔다.

또 나의 친애하는 동료 Y가 있다. Y는 작년 봄 퇴사했는데, 짧지 않은 회사생활 동안 나의 큰 버팀목이었다. 우리는 한 계절을 사이에 두고 동기다.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본 사이고, 그 사이 우리 각자의 성장과 변화 또한 가장 가까이서 나누었다. 회사 얘기라면 척하면 척 눈빛만으로 이해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내가 쓸 수 없는 글을 써서 J를 좋아했듯, 나는 Y가 나와 무척 다른 사람이라 좋았다. 성격이 급하고 자기중심적이라 사려 깊지 못한 나와 달리, 그는 신중하고 남을 두루 배려하며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챙기는 사람이다. 뜻밖에 냉정한 면이 있어 칭얼대기 좋아하는 나는 가끔 놀라곤 했지만, 그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Y가 퇴사 결정을 고백했을 때 슬펐다. 물론 슬퍼도 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 제주에 쭉 살 생각으로 내려와 직장을 구했으니 특별한 이유가 없고서야 퇴사를 생각하지 않지만, Y는 상황이 다르다. 그는 일시적으로 제주에 내려온 상황이고, 언젠가는 떠날 운명이었다. 일종의 끝을 알고 만나는 연인이었던 셈인데, 그래도 막상 떠난다니 속절없이 슬펐다. 

J와 Y 사이에 또 무수한 인연들이 있다. 제주에서 살며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대부분이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회사를 다니고 있어 더 드나듦이 잦은 것 같기도 하다. 비슷한 정체성으로 모여 제주생활의 한 시기를 함께하지만, 각자의 상황이 변함에 따라 헤어짐이 꾸준히 발생한다. 실제로 입사하고 보낸 네 번의 여름 동안 여름을 함께한 멤버가 계속 바뀌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제주에 살지 않는다. 

사실 제주가 아니어도 인연은 다 시절 인연이다. 회사에서 만났다면 더 그렇다. 한 계절 뜨겁게 달아올라 가까워져도 시절이 다하면 붙들어둘 수가 없다. 어느 순간엔 맞잡았던 손을 풀고 혼자 뚜벅뚜벅 가야 하고, 그런 사정이 서울이라고 다를 리 없다. 제주에서 인연의 무상함을 자꾸만 되뇌는 건 그보다 내가 언제나 떠나보내는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나는 우리 회사의 가장 오래된 멤버 중 하나가 됐다. 수애기는 나를 보고 제주에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고양이도 있는 다 가진 여자라고 하지만, 나는 가끔 그게 무섭다. 제주에 올 때처럼 다시 훌쩍 떠나 새로운 곳에서 인생을 시작할 가능성이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제주에 붙박여 있고, 사람들은 나를 스쳐가는 것이다. 퇴사한 거의 모두와 연락하고 지내는데, 우리의 시절이 다했다는 게 못내 서운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우도로 출장을 다녀왔다. 우도에 사업체를 여러 개 가진 회사가 있는데(나는 우도 대기업이라 부른다), 공교롭게도 거기에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 회사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 중 하나로, 자신이 4년간 회사에 있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는 우도 내 숙식 제공이 기본 조건이라 1년이나 6개월, 단기로 제주에 살아보고 싶어 오는 젊은 친구들이 대다수다. 그처럼 그러다 오래 눌러앉기도 하지만, 떠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우도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떠난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는 말에 귀를 쫑긋했다. 나와 같은 마음일 것 같아서. 그도 어쩌면 무상해서 외롭고 서운한 마음이겠구나 했다. 그러나 그가 해준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지금도 연락와서 다들 우도가 그립다고 해요. 그립다고 다시 올 순 없지만 그때 우도에서 좋았던 기억들이 도시에서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된대요. 그 마음으로 힘을 내서 다시 사는 거죠.” 

순간, 떠나 보낸 모든 인연들이 보고 싶어졌다. 다시 만나지 못해도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진 않는다고, 각자 가슴에 품고 가는 보석 같은 기억이 되는 거라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그의 말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홍콩으로 돌아간 윙과 서울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 단비언니, 언제나 멋진 주연과 그림이 점점 좋아지는 소현, 다시 제주로 돌아온 명석과 경화, 늘 생각나는 연하까지. 나는 인연이 다했고, 그들을 이제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떠나 보냈을 사람이 그건 잃은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함께 레터를 쓰는 수애기와 효재, 칼발과도 언젠가 헤어질 것이다. 울적한 날엔 이별을 예행 연습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제주 이후를 씩씩하게 살아갈 테니까, 그 씩씩함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무척이나 기여하고 있을 테니까, 계절이 가고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꽃이 지면 여름이 오고, 제주의 여름은 말 못하게 근사하다. 우선 아름다운 여름을 함께 나자. 그리고 3월 17일로 제주를 떠나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또 다른 후배 수현에게 특별히 긴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PS. 친애하는 동료 Y는 퇴사하고도 떠나지 않고 제주에 남아 ‘대포동 칼발’이 되었다고 한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jeju.hu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