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통 속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는 일
얼마 전, 이모가 돌아가셨습니다. 암이었고, 다소 급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모는 어머니에겐 언니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또 고된 일상을 서로 의지하는 동료이자 어머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출가를 했을 때, 이제 남은 여생은 이모랑 가까이 지내며 살겠다며 오래 살던 동네도 떠나 일산으로 훌쩍 이사를 가시기도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이모와의 이별은 어머니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저도 그 슬픔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3일 동안 휴가를 고스란히 내고 어머님 옆을 지켰습니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모를 보내드리던 날로부터 약 2주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모의 병을 알게된건 불과 지난 10월이었습니다.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돌아가시기 2주 전부터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어요. 직계 가족과 형제들은 이모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인사를 나눴지만, 코로나 등의 이유로 면회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조카인 저까지 인사를 드리러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임종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촌형이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를 전하는 것이 전부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쉽사리 휴대폰에 손이 가질 않았습니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게 되면 사촌들과의 왕래가 자연스레 뜸해집니다. 그렇게 결혼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쉽게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던 형이었지만, 모두가 그렇듯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으로 가끔씩 카톡으로 안부나 묻던 사이었죠. 그러나, 부모님과의 이별을 앞두고 위로의 말을 건내는 일은 그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할까. 사실 이것은 위로의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그에게 하는 것은 위로도, 응원도 아닌 어떤 정해진 이별 앞에서 내가 그의 옆에 서 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손짓일 뿐입니다. 나는 겪어본 적도, 겪기도 싫은 일을 지나가고 있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그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카톡을 남겼습니다. 잠깐 시간이 된다면 통화를 할 수 있겠느냐고요.
이내 이어진 통화에서, 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일 없다는 듯 애써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 형의 목소리엔, 본인의 슬픔보다는 오히려 어렵게 걸은 전화에 헤매고 있을 저를 향한 배려가 묻어있었습니다. 위로를 하려고 걸은 전화에 한참이나 위로를 받고 있던 중, 형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늦게 연락해서, 평소에 이모를 자주 뵙지 못해서, 그리고 이렇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너무 미안하다고요. 그러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형아, 늦게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 그동안 걱정해줬던거 잘 알고 있어. 나는 네가 늦게 연락했다고 해서, 그리고 평소에 엄마를 자주 보지 못했다고 해서 너를 원망하지 않아.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 네가 언제나 멀리서 우리 엄마를 응원해줄 사람이라는 것도, 힘들어할 나를 생각 하면서 걱정했을거란 것도 알아. 그래서 나는 이 전화가 너무 반갑고, 고맙고, 또 힘이 된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는 말.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내가 받은 위로는 내가 전하고자 했던 위로를 집어삼킬 만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던 이를 믿는다는 것. 스스로 힘들어하고 황폐해지는 순간에도 다른 이를 미워하지 않고 믿는 것. 오히려 외로움의 끝에서 타인을 믿는 것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부모의 죽음을 문턱에 둔 형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어쩌면 형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용서하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내 나도, 내가 힘들 때 나를 찾지 않던 많은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생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힘들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고통속에서도 타인을 더 미워하지 않는 법을 어슴프레 알게된 것 같습니다. 이모는 떠났지만, 이모는 형에게 남긴 것을 내게도 남겼습니다. 항상 모든 이를 보며 웃어주던, 오랜만에 찾아가면 항상 와주어 고맙다며 미소를 지어주던 이모. 그녀는 어쩌면 언제나 모든 이를 믿고,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