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얼마 전 곧 이사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 거 기억나세요? 지난 주말 연휴에 이사할 집을 계약했습니다. 한국에만 있다는 반전세로요. 토요일에 종일 영등포구랑 마포구를 배회하다가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고, 일요일에 가계약을 하고 월요일에 홀랑 계약했어요. 하루 동안 집 2개 정도 보고 그날 바로 계약까지 해버린 과거에 비하면 매우 차분한 결정입니다. 공부할 때나 일할 때 보면 대충 빨리 스타일은 아닌데 이상하게 뭔가를 구매하는 결정만은 후다닥 끝내버리게 돼요. 어차피 같은 예산이라면 물건 질은 거기서 거기라는 오래된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랄까요… 아무튼 주위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이 가격에 이 정도 집이면 정말 잘 구했다고 해서, 오늘은 저의 집 고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이번에 집을 볼 때는 예산 안에서 세 가지를 봤어요. 투룸(최소 분리형)일 것, 채광이 좋을 것, 회사와 가까울 것. 원룸에 4년 넘게 살았더니 이 크기에 적응이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 집에 갈 때마다 거실의 쾌적함에 온몸이 쭉 펴지는 느낌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죠. 싱크대와 침대가 마주보고 있는 이 방에서 어쩌다 뭔가 해먹은 날엔 뒷정리를 다 마치고 침대에 풀썩 눕는 순간 아까 그 음식 냄새가 다시 나면서 앵콜 공연으로 거한 뒷풀이를 하고요. 이 예산으로 투룸은 잘 없다고 구박 받으면서도 꿋꿋이 분리를 외친 이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방이 아닌 집에 살고 싶어졌어요.

‘자취’라는 말로 설명되는 주거의 모습이 있죠. 원룸 아니면 투룸, 임시로 마련한 가전과 집기, 2년 계약이 끝나면 어디론가 옮겨가야 한다는 붕 뜬 마음… 그런 탐색 기간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온전히 혼자일 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과 생활 방식을 가졌는지, 어떻게 살 때 행복한지 잘 알 수 있고요. 사람은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 해보지 못한 일들을 꿈꿀 수 있잖아요.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아는 한에서만 무언가를 바라고 또 바라는 한에서만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아무리 멋진 롤모델을 봐도 나랑 안 맞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에게 4년의 자취는 그랬습니다. 그냥 혼자 살기 시작했을 뿐인데 계속 나에 대해 알아가고 더 나은 모습이 되고 싶어 노력하고 그래서 힘들기도 기쁘기도 했죠. 그래서 이제는 방이 아닌 집에 살고 싶어졌어요. 지금까지 발견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취’가 아니라 1인 가구의 가장이 되어서!


채광은 단순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늘 햇살이 밝은 집에 살아왔는데요. 그럼에도 초등학교 때 6년 동안 살았던 그 어두운 집의 그늘이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낮에는 밖에서 미친듯이 뛰어노느라 채광이고 뭐고 몰랐을 것 같은데도 그 어둑함이 자꾸 떠올라요. 이상하죠. 이런 마음의 얼룩은 아무리 해도 잘 지워지지 않으니 햇볕 아래에 쫙 펴서 말리는 게 답입니다. 무엇보다 채광이 좋은 집에서는 빨래가 잘 마르잖아요. 주말 오후 널어둔 이불 위로 햇살이 비추는 것만큼 마음 뿌듯해지는 광경도 잘 없고요.

저는 올 6월에 이직을 했는데요, 전 직장은 삼성역, 지금 직장은 합정역에 있습니다. 사무실까지 걸어서 7분 거리에 살다가 지하철로 50분 걸려 출퇴근을 하려니 너무 괴로웠어요. 새 회사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길바닥에 100분을 버리려니 몸과 마음에서 다 진이 빠져버리는 기분이었고요. 그래서 어느날 밤엔 갑자기 혼자 잉 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시 출근하면서 직방 앱을 깔았죠. “다 울었”다면 “이제 할일을 하”는 게 답이니까요.

오은영 박사님... 인생의 진리만 말하시는 분...

지하철에서 책을 보면 된다지만 (밀리의 서재 안 쓰는 분들 없죠?) 어떤 날은 그 시간에 운동이 하고 싶고 어떤 날은 그 시간에 맛있는 밥을 해먹고 어떤 날은 잠을 더 자거나 일을 더 하고 싶잖아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용 시간이 하루에 100분씩 막 날아간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무조건 1분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최단 거리 환승이 가능한 승강장 번호를 찾는 저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영상 참조). 물론 그 시간 아껴서 뭐 엄청 효율적으로 쓸 거냐 하면 할 말 없지만요. 또 저는 ‘이거 다 하면 9신데, 그럼 집에는 언제 가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하기 싫더라고요. 가뜩이나 하기 싫은 일인데 더 싫어지는 생각을 하기도 싫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만들어주기 싫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냅다 집을 구했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안주하고 싶어하는 저를 채찍질해서 마지막으로 부동산 한 군데만 더 들르게 한 친구 덕분이기도 하고, 저녁 숟가락을 내려놓고 당장 저를 스타렉스에 실은 부동산 할아버지, 첫눈에 맘에 든다며 먼저 보고 간 사람보다 이 아가씨를 들이라고 밀어준 부동산 아주머니, 사람이 맘에 든다며 월세를 XX만원이나 깎아준 집주인 노부부 덕분이기도, 무엇보다 지금까지 만 9년을 게으름 안 피우고 성실하게 일한 제 덕분이죠. 이놈이 갑자기 미쳤나 싶으시겠지만 말 그대로 전 재산을 보증금과 이사 비용으로 박아넣어야 하는 사람의 두려움이 이상하게 표출되었다고 너그럽게 생각해주세요.

이사할 집은 해가 잘 들고 방 두개, 분리된 거실, 주방, 베란다도 앞뒤로 두 개나 있는 오래된 빌라입니다. 뒤로는 넓은 공원이 있고 언덕을 내려가면 맛있는 커피집 앞을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많아요. 물론 이 정도 공간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잠깐 했지만 뭐 어떤가요. 일단 정하고나니 기대되는 것들뿐입니다.

그 동네는 정말 사람 사는 곳 같았고, 두 배쯤 넓어진 집을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꾸며놓고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관리하고 나만 사용할 수 있는 제법 넓은 공간이 생겼고, 그 안에서 저는 자유롭게 몸을 펼치고 쉬고 또 뭔가를 쓸 수 있겠죠. 무엇보다 사는 곳이 바뀐다는 건 먹는 걸 바꾸는 일만큼 저를 변화시킬 겁니다. 저의 의지만으로 스스로에게 큰 변화를 선물해줄 수 있어서 좋아요.


앞으로 그곳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것저것 확인하고 챙길 게 많은 이사라는 이벤트를 무사히 치르고 나면 또 소식 전할게요. 

그 전에도 계속 만나요. 안녕!



구독자 100명이 넘으면 헤더에 커버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는데, 지난 주에 100명이 넘었어요😮 이미 멋진 친구에게 운을 띄워두었으니 어떤 이미지를 만들지 열심히 고민해볼 예정입니다. 조만간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올게요 =)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또 찾아온 연휴, 가을 날씨랑 햇빛 실컷 즐기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