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2주가량의 여름휴가를 보내고 왔어요. 비가 지독히도 많이 오는 장마 기간, 습하고 더운 계절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틈틈이 잘 쉬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야 ‘잘’ 쉴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휴가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을 떠올리며, 그때의 마음을 살피고 돌아보며 다시 열심히 일상을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편독자의 일명 ‘꼬꼬무 키워드 토크’와 제가 보내고 온 휴가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곧 출간될 책 소식도 알차게 담았으니, 시원한 곳에서 천천히 이야기들을 즐겨주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키워드 토크

2024년에 도착한 미래 (from 2070)

📖 편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편독자입니다. 몇 주째 도무지 예측이 어려운 험악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시나요? 오늘은 ‘편독자의 노트’로 한 꼭지를 이어가……는 대신, 최근 출간한 신간으로 ‘꼬꼬무 토크’를 시도해보려 합니다. 토크의 주인공은 장애운동가로서 앨리스 웡Alice Wong입니다. 자신도 회고록을 썼지만 ‘장애인 회고록’이라는 장르에 대해 온갖 곤란하고 도발적인 질문(“장애인 회고록은 표준적으로 가정되는 백인-비장애인-시스젠더-이성애규범적 독자가 ‘너무 신기하고 매력적이긴 한데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삶을 엿보게 해주는, 출판세계판 동물원 전시 같은 것일까요?”)부터 쏟아내버리고 마는 이 못 말리는 활동가죠.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길 원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토크가 출현했네요. 앨리스 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깔끔하게 우상향하는 곡선 같은 서사보다 희미하고 둥둥 떠다니며 그러다가 서로 연결되기도 하는 불규칙한 점들로 구성된 인상주의풍 서사”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저의 이 꼬꼬무 토크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르겠어요.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이라는 광활한 표면을 둥둥 떠다니는 서로 다르고, 자기주장도 강한 불규칙한 점들을 나름대로 잇고 엮어봤습니다. 그게 어떤 그림일지, 혹은 아무 그림도 아닐지 제 동선을 같이 한번 따라가보실래요.

존재=활동

여기, 앨리스 웡이라는 정말 못 말리는 활동가가 있습니다. 장애인권 활동가로, 장애 가시화 프로젝트를 창립해 장애와 관련된 온갖 스토리텔링과 문화 콘텐츠를 제작해왔죠. 이런 식의 작당모의에 ‘꾼’이라, 협업의 이력도 무척이나 화려합니다(그 이력이 궁금하시면 가망서사에서 나온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를 보세요). 아니, 그냥 협업이 삶인 사람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책에 대한 보도자료에서 저는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앨리스 웡은 정상성과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활동가의 삶을 꿈꾸지 않았던 자신을 그 길로 들어서게 한 무수한 계기들을 이야기한다.” 제가 썼지만, 저 문장은 어떤 점에서 완벽히 보도자료용 문장입니다. 이 문장만 읽으면, 꼭 그 뒤에 무척이나 비장하고 웅장한 서사가 등장할 것 같죠. 하지만 앨리스 웡이 쓴 이 책, 그러니까 첫 회고록은 저런 식의 모범과 전형을 깨부수는 무수한 저항과 해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도자료용이라고 해서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 문장의 행간을 발견해준다면, 그러니까 ‘원치 않았는데 왜 활동가가 되었을까’를 궁금해하며 ‘정상과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의식’과 ‘활동가의 삶을 꿈꾸지 않았던 자신’ 사이의 크나큰 낙차를 포착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불쑥 이런 질문이 끼어드네요. 그렇다면 활동가란 과연 꿈꿀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직업군인 것일까요? 글쎄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적어도 앨리스 웡에게 활동가가 되는 것은 장래희망이나 선택사항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독특하게도 그는 이 ‘빌어먹을 비장애중심 사회’가 자신을 사회운동의 세계로 ‘징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저는 늘 활동가였다고 생각해요.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그저 살아가고 존재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에게 활동/운동이란 자신이 선택하기 전부터 삶에 이미 존재했던, 매우 필연적인 ‘모드’였던 셈이죠.

 

활동=스토리텔링

앨리스 웡이 가장 활발히 사용하는 활동 도구는 스토리텔링입니다. 그에게 활동은 곧 스토리텔링이고, 스토리텔링은 곧 활동이죠. 스토리텔링은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서도, 온라인 기반의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팟캐스트를 통해서도, 에세이 쓰기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장애운동과 그 커뮤니티를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관점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지는데요. 그에게 운동이란 그를 비롯한 장애인 동료들에게 적대적인 이 사회에 맞서 싸우는 조직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운동과 커뮤니티는 취약한 이들이 닻을 내리는 터전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 지혜의 보고이죠. 지혜라는 것을 이야기, 곧 스토리텔링을 통해 만들어지고 축적되는 역량으로 여기는 관점은 그가 오랫동안 지속해온 장애인 당사자 구술사 아카이빙 작업(장애 가시화 프로젝트)에서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아카이빙이 중요한 건, 그야말로 비장애인과 중심의 지배적 서사(형식)가 누락하는 ‘다른 삶’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정말로 중요한 건, 그 다른 삶과 다른 이야기가 그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앨리스 웡은 정상성의 규범에서 벗어난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이 사회에 더 많이 출몰하는 것만큼이나, 그 이야기가 익숙하고 모범적인 문법의 틀에 갇히지 않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이 장애인 회고록에서 기대할 법한 서사, 그러니까 “감동과 영감을 주고, 예외적이고, 영웅적이고, 천사 같고, 역경을 딛고 용기를 주는” 종류의 ‘모범적 소수자’ 서사는 집어치워버리자는 것이죠(이 과격함!).

그래서일까요, 자신의 이 회고록에서 그는 매끄러운 (장애) 극복담을 늘어놓지도, 그렇다고 교차성이나 다양성 같은 ‘훌륭하고 고상한’ 개념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앨리스 웡이 관심을 두는 건, 사회가 기대하는 모범 서사로도, 일종의 급진성을 담고 있는 개념으로도 쉬이 포착되지 않는 일상의 울퉁불퉁하고 난삽한 이야기 다발들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 어떤 충분히 급진적인 언어도 불편하고 어렵고 부끄럽고 엉망진창인, 그러나 100퍼센트 ‘진짜’인 자신의 무엇을 표현하기에 급진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일 겁니다. 먹고 마시는 식당이나 카페에서조차 자신의 장애를 세세히 입증해야 하는 이야기, 사레들림으로 인한 질식을 예방하기 위해 (삼키지 않고) 타구컵에 뱉어놓은 자신의 침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이야기, 화장실/기숙사/편의시설 등을 마련해가며 자신을 위한 세계를 손수 지어야 했던 이야기……

 

스토리텔링=취약성 그리고 미래

앨리스 웡의 놀라운 면모는 자신이 지닌 취약성을 점차 확장해나가는 데서 드러납니다. 취약성은 그를 주저앉히는 결점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팔을 뻗어 동료들을 찾아나서도록 하는 연대의 역량입니다. 이때 그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미래를 점치고 그려봅니다. 코로나19 시기의 횡행한 담론들이 분명히 보여주듯, ‘장애’와 ‘미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장애나 질병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결함의 상태로, 혹은 존재한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문자 그대로 취약한 이들, 특히 장애인들은 ‘미래 없는 존재’인 것이죠.

앨리스 웡은 접근이 금지된 미래에 재치 있는 허구의 스토리텔링으로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이 책에 붙은 부제(‘장애인 신탁 예언자가 전하는 지구 행성 이야기’)의 비밀은 여기서 이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신탁 예언’은 그가 자신과 장애인 동료들의 미래를 스토리텔링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인 돌봄과 취약성, 상호의존에 관한 진실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신탁 예언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후인 2070년을 살아가는 장애인 신탁 예언자가 되어, 2020년대의 지구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070년이라는 미래를 사는 신탁 예언자에게 과거인 2020년대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그 시기 지구 행성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사람들은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 누구를 배제한 채 미래를 상상하려 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질문들을 유발하는 미래의 스토리텔링이 왜 필요했는지 또다시 질문해보는 것입니다. 왜 ‘굳이’ 이런 스토리텔링이어야 했을지요. 여기에 대한 생각은 전부 다를 테지만, 저는 (장애인은) ‘미래 없는 존재’라는 담론에 이미 미래를 살고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맞서는 앨리스 웡의 재치와 적확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시점으로 (우리에게는 현재인) 2020년대 과거에서 펼쳐지는 온갖 야만과 우생학을 거울처럼 비추어내는 방식에, 정말 앨리스 웡은 어디서 떨어진 사람일까 싶은 거죠. (천재라는 뻔한 말 말고 더 좋고 더 적합한 표현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나 더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앨리스 웡이 그리는 미래가 정확히 ‘취약함의 미래’라는 것도 참 좋습니다. 왜 그렇잖아요, 미래라는 건 언제나 지금 현재에 부족하거나 결점으로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제거하고 극복한 매끈한 결과물로 상상되곤 하는데, 그렇게 보면 ‘미래’가 장애인에게만 유독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애초 ‘미래’라는 개념 자체가 지독히 장애차별적인 정상 규범으로 물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미래라는 건 언제나 ‘정상성의 미래’인 것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미래에 대한 그런 식의 상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앨리스 웡이 장애인을 ‘신탁 예언자’로 칭하는 것은 단순히 스토리텔링이나 은유만이 아닌데요. 실제로 그는 장애인에게서 비장애인이 느끼고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부정의, 차별, 억압을 예리하게 간파해내는 지혜로운 선지자의 형상을 봅니다. 코로나19 이후 급속로도 확산된 비대면 화상 미팅이나 원격 근무 같은 ‘새로운’ 접근성 확보 시도들이 사실은 전혀 ‘새롭지 않은’, 장애인들이 아주 오랫동안 주창해온 요구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죠.

그의 스토리텔링은 미래가 진보의 방식이 아니라, 취약성의 꾸준한 확장으로 펼쳐져왔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현재, 바로 여기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편리함 역시 취약한 이들이 한때 꿈꾸었던 미래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앨리스 웡은 ‘장애인의 미래’를 다시 쓴 것이 아니라, 결국 미래 그 자체를 다시 쓴 게 아닐까요?

휴가, 대만 여행 그리고 몇 개의 메모

⏳ 모래


저에게도 약 2주가량의 첫 장기 휴가가 생겼습니다. 여름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을 나가버린 입맛과 애초에 없던 체력, 각종 대출 및 집세, 이사 비용, 공과금 등으로 비다 못해 구멍이 나버린 지갑 사정 탓에 저는 그 기간 동안 칩거를 택할 생각이었어요. 휴가가 다가오던 그즈음은 제가 사랑하는 친구 한 명이 허우샤오셴 감독과 에드워드 양 감독을 ‘덕질'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친구는 갖고 태어난 파워덕질DNA(차와 영화를 덕질하다가 급기야 차가 나오는 영화를 찍어버림)로 그들의 인생을 매섭게 파기 시작했고, 그들의 조국인 대만 언어를 공부하고자 구몬한자를 시작했으며, 대만인과 언어 교환을 하는 일까지 벌였죠. 시간과 돈이 허락할 때 부지런히 대만을 찾아가 그들이 남긴 영화 속 씬의 장소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여긴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에 나오는 영화관 앞이거든.”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하고 영화 예고편을 보여주던 친구. 예고편에는 1초쯤, 그것도 어스름한 저녁 빛 탓에 잘 보이지 않는 그 장소를 친구는 자기가 남겨온 영상으로 다시 길게 보여 주곤 했어요. 엄청나게 큰 나무, 신호등, 비 오는 장면, 거의 꺾인 선으로만 보이지만 아름답기도 한 간판 속 한자의 서법들, 낡고 기품 있는 건물의 모두 다른 모양새 그렇게 친구가 남겨온 영상과 사진으로 저는 대만이라는 나라 곳곳을 처음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책을 빌리거나 샀고…

🔔{도움받은 책: 《도해 타이완사》(2021, 글항아리)/ 《아시아의 민중봉기》(2015, 오월의봄)/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2017, 산지니), 어반 리브 No.6 : 타이베이》(2020, 어반리브)}


자유롭고 포용적이라는 시민성 때문에도, 일제의 속국이었다는 점과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 제주와 하루 차이로 타이베이에서 공권력에 의한 무차별 민간 학살이 일어났다는 점 등 동질의 기억과 역사를 가진 국가로서도, 대도시의 깔끔한 전형성보다는 낡음과 새로움이 적절히 조화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저는 그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반짝이는 친구가 본 것을 저도 알아차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 “거긴 아직 현금을 많이 써.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따로 빼둔 비상금 봉투에서 누구에게 뺏기듯이 머뭇거리다 오직 15만 원을 환전소로 가져가 돈을 바꾸고, 친구가 여행 직전 선물해 준 대만 작가 구묘진의 소설 《악어 노트》(움직씨) 한 권, 옷가지들 조금, 비염약을 챙겨 대만(타이베이)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후 최초 단상: 와너무덥고습해서곧탈진할것같다 그리고… 정말 처음 들어보는 새 소리가 많이 난다. 그래… 여긴 이국이지, 이국이다. 나는 다른 나라에 왔고 여기에는 내가 평생 보지 못할 뻔했던 새들이 사는구나, 그리고 난 지금 그런 소리를 듣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새 울음소리 덕에 생긴 정신의 틈으로부터 저의 여행은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저는 챙겨 간 《악어 노트》의 화자 ‘라즈’가 거니는 길거리, 그가 다니던(연인과 널뛰는 감정을 교류했던) 타이완대학교에 가볼 생각이었어요. 《악어 노트》의 저자 구묘진은 대만 퀴어 컬트의 대표 작가로 대항문화의 아이콘, 천재 작가라는 수식이 따라붙습니다. 실제로 《악어 노트》 역시 그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든 소설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혼과 관련된 퀴어배제적인 사회 규범에 반기를 들고 있어 대만의 혼인평권 운동에서도 핵심적인 문학작품으로 꼽힙니다. 2년 전쯤 구묘진의 또 다른 작품, 서간문 형식의 《몽마르트르 유서》를 읽었는데, 이 작품을 자신의 최후 변론처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서사를 알고 있기에 여행 내내 축축한 영혼과 함께 걸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친구가 만들어 준 플레이리스트(《악어 노트》 속에 나오는 몇 개의 음악)를 들으며 걷기도 하고요. 주인공이 사랑하는 연인 수령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교정을 누비는 장면에서 나온 張艾嘉(장애가)의 〈最愛(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게 남은 대만의 인상, 기억의 곁가지들을 모을 요령이 떠오르지 않아 그때 남겼던 몇 개의 메모를 여기 옮겨봅니다. 


7월 7일 메모

기후 영향인지 회랑 같은 필로티 건물이 많이 보인다. 식물과 더불어 거리의 인상을 정하는 듯하다. 군산에 가야 있는 일식 가옥도 널렸다. 도보의 이음새에 턱이 제거된 곳이 꼭 한 군데는 있어서 캐리어를 끌기 편하다. 휠체어를 탄 사람도 많이 보인다. (오늘 본) 버스는 모두 저상버스이고, 안내데스크, 대중교통 티켓 기계는 휠체어 높이에 맞춰진 낮은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었다. 버스를 잘못 타서… 잘 보존된 낡음이 세련이 되어 보이는 동네에 내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하고 그냥 걷다가 공원이 근처에 있어서 운 좋게 죽이는 일몰을 보았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면서 얻는 횡재가 이번 여행에 계속 깃들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그럴 듯.


7월 8일 메모1

(BUZI라는 카페에서. 싸우는 한국인 2명 옆에서 쓰다.) 구묘진이 자살했다는 사실과 자살한 사람의 일기를 이제 와 여기서 읽고 있다는 사실이 좀 구슬퍼 혼자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아주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보면서도 달래주지 못하는 것 같아 쓸쓸하다. 하지만 라즈는 넘 목구멍 막히는 회피형임…. 아까 지나가다가 2.28 평화공원 발견해서 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 이런 걸 느끼라고 나를 파견한 것.


7월 8일 메모2

이토 도요가 설계한 타이완 사회과학대 도서관에 왔다가 문 닫혀서 못 들어감. 밖에서만 빼꼼 보고 교정을 걷다. 사람들이 빗물이 내려앉은 안장에 그대로 앉아 자전거를 탄다. 이게 바로 스콜에 대한 짬? 한 학생을 붙잡고 “워 쓰 한궈런….”이라고 말한 뒤 “여기 문학원 건물이 어디입니까?”라고 번역기 돌려서 보여주었다. 그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그걸 끌고 나를 안내했다. 번역기는 ‘타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외로움을 다 충족시켜주진 못하나, 기계 번역이 주는 간결함 속 의미심장함이 있다. 그 뒤로는 다 내 몫이라는 듯이…. 건물에 다다른 뒤 그가 뭐라고 하길래 번역기를 내밀었더니 번역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름다운 건물이에요. 안에는 별 거 없어요.”


7월 9일 메모1

도서관에 드디어 들어갔다. 아예 드러누워 자는 사람 3명 봤다. 정말 웅장하고, 특이하고, 숙면의 명당에, 숨기 좋은 장소. 바스러질 것 같은 고서적이 많았다. 대만에는 건축 탐방을 와도 좋을 듯하다. 저녁엔 ‘Basement Cafe라는 지하 뮤직바에 갔는데, 내가 들어서자마자 직원은 “곤방와!”라고 했고, 난 다시 한번 워 쓰 한궈런… 한껏 면구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으며 대답은 “sorry”라고 하셨다. 나도 모르게 “괜찮아요”라고 함. 직원은 내가 앉자마자 한국어 내레이션이 나오는 노래를 틀어주셨다. *도재명-〈토성의 영향 아래〉(feat. 이자람). 혹시 미안해서? 뭐라고 검색했을까? 한국말 많이 나오는 노래?


7월 9일 메모2

비가 한 차례 퍼붓고 나니 시원한데,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속이 좀 답답하다. 쉰다는 게 뭐지? 떠나는(돌아가는) 날에는 언제나 이런 고질적인 패턴의 질문. 더 쉬어봐야 알겠지… 알게 되려나?←고질적인 패턴의 질문2 


🇹🇼 몇 가지 추천 장소
1. 국립 대만대학교 사회과학대 도서관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Ito Toyo)가 설계한 도서관. 내부 천장과 서가 전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가는 가구 디자이너 후지에 가즈코(Fujie Kazuko)의 작품. 모두 대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타이완대학교 후문 쪽에 위치한 도서관 출입구로 들어가면 방문자 출입증을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입장료는 무료.
2. Ponding 아트북 서점 
여러 아트북을 판매하는 서점. 잡지, 사진집, 일러스트북, 그림 등이 다양하게 있었고, 한국 작가 책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2층에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마침 진행하던 전시를 조용히 보고 내려왔습니다. 카드 결제 가능.
3. BUZI 카페
일본과 대만 느낌이 적절히, 오묘하게 섞인 인테리어의 카페. 융캉제 주택가 골목에 있어요. 원두 종류가 많고, 커피가 아주 맛있는 곳이었답니다. 기념품 사러 융캉제 거리에 가신다면 들러보세요. 
호스텔과 한 건물에 있었던 서점인데, 최근에 생긴 곳이라 쾌적하고 책을 분야별로 훑어보기 좋았어요. 주인장이 손으로 쓴 추천사가 책에 많이 붙어 있었고요. 대만으로 수출된 홍승은 작가님의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발견. 카드 결제 가능.
자크 랑시에르, 2021

자크 랑시에르의

《픽션의 가장자리》가 곧 출간됩니다.

🚶‍♂️ 산책자


자크 랑시에르는 68혁명의 경험을 통해 알튀세르와 결별하며 독자적인 학문적 여정을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이래, 줄곧 과학적 지식인과 무지한 대중 사이의 나눔을 문제 삼은 철학자입니다. 또한 그는 철학적 글쓰기의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나, 철학이 전제한 지적인 위계를 허문 철학자이기도 하지요.

《픽션의 가장자리》는 스탕달에서부터 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 릴케, 에드거 앨런 포, 콘래드, 제발트, 버지니아 울프, 포크너를 거쳐 후앙 기마랑스 로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의 지각, 사유, 행위 방식을 나누는 경계들을 허뭅니다. 아울러 ‘픽션적 합리성’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어떻게 사회과학의 논리가 문학과 인접한 경계 속에서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근대 픽션이 다층적인 의미의 가장자리‘들’, 즉 고전 픽션, 사회과학, 실재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떠오르는지 살펴보고, 나아가 이와 같은 문학 혁명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는지 탐구합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과 그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들을 살펴보고 사유하는 데 지평을 넓혀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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