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리영희재단의 네 번째 뉴스레터입니다.

리영희클럽 2022 ‘리영희와 현장’ 강좌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문영, 김효순, 임종업 선생님의 강의와 박래군 선생님이 안내한 전쟁기념관 기행이 있었고 수강생들과 함께 집담회로 마무리했습니다. 높은 출석율과 수준 있는 질문들이 계속됐고 강사분들도 오랜만에 하는 대면강의의 열기에 서로가 충전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독립매체들의 협업과 연대만이 지금의 언론 상황을 타개할수 있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김용진 이사(뉴스타파 대표)를 '재단과 함께하는 사람' 편으로 소개합니다. 후원회원 진영종 선생님은 리영희가 <레미제라블>을 읽고 자베르의 내적 갈등과 당시 부랑아들이 썼던 은어를 20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는 빅토르 위고에게  경의를 표하는 데서 리영희의 다른 면에 주목해야 한다는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묻혀 있던 자료를 알려주고 찾아주신 진영종, 최영묵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카이브는 리영희의 1987년 버클리 초빙교수 시절 자료를 소개합니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당시 강좌 조교이기도 했던 장태한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고 귀한 글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영희는 1985년 당시 동경대학교 측의 노력으로 20여년 만에 여권을 받고 동경, 하이델베르크, 버클리에서 연구와 강의, 동포사회와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시절의 자료나 기억을 갖고 계신 분은 재단에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1년 재단이 두 번에 걸쳐 주최한 '대만해협의 위기' 토론회가 계기가 돼서, 당시 발표를 보완하고 새로운 글을 추가한 <미중경쟁과 대만해협의 위기>(갈마바람)가 길윤형, 장영희, 정욱식 지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재단은 다양한 사업으로 한반도와 국제관계에 관한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와 토론, 상호비평을 촉발하는 일에 노력하겠습니다.
재단소식
2022 리영희 클럽-리영희와 현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하는 2022 리영희클럽 강좌 (8강 '박래군과 함께하는 전쟁기념관 기행'은 다음호에서 다룹니다. 동의하신 강사분들의 강의는 8월부터 순차적으로 리영희재단 유튜브 리영희재단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5강은 김효순 리영희 재단 이사장(전 한겨레 편집인)의 <영화 ‘더 포스트’로 본 베트남전쟁과 언론>
전세계 지식인은 당시에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 30여년이 흐른 후 ‘한국에서도 당시에 기자나 지식인사회에서 그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말해지는 베트남전의 진실. 다 알게 되기 까지, 알아도 쓰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쉽게 말하기까지 정부의 자료를 의심하고 본인이 납득될 때까지 사건에 붙어서 충실하게 파헤친, 위험을 감수하고도 글로 써내려간 저널리스트들이 동서양에 있었다. 리영희가 부지런한 기자, 공부하는 기자와 더불어 기자의 상으로 말한 가난한 기자는 두 가지 의미라고 스스로 밝힌다. 하나는 “평균이상의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고 그들의 문제를 취재할 마음이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가난이 목적은 아니지요 하지만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그래도.“

6강은 이문영 서울대 평화연구원 교수의 <평화연구자가 읽는 우크라이나 전쟁>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칭하는 그룹을 한편으로 하는 유럽에서의 논쟁이 있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스스로에게 각자 물어보자. 이와는 별개로 전쟁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그들의 목숨을 가지고 벌어지고 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를 가진 러시아는, 1941년 천 일이 넘는 기간 백만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히틀러 나치를 모스크바에서 막아낸 자부심이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된 거대한 수치. 자세히 보기

7강은 임종업 전 한겨레 기자의 <DMZ의 숨겨진 마을 ‘대성동’ 이야기>
DMZ 대성동 마을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유엔사라는 중력을 먼저 체감해야한다. 출입증 관리와 이장 선출, 주민의 자격 의무 등을 담은 ‘525-2 대성동 민사행정’ 규정은 ‘대성동 헌법’이라 불린다. 이 규정은 정전협정이 항구적 평화협정으로 대체될 때까지 국적을 불문하고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170미터 인공기가 걸려있는 기정동 마을과 200미터 태극기가 나부끼는 대성동 마을이 유엔사 관할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자세히 보기
재단과 함께 하는 사람들
탐사보도는 골대를 정해놓지 않습니다
김용진 이사, 뉴스타파 대표

“탐사보도는 골대를 정해놓지 않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명백한 증거만을 쫓아갑니다. 그래서 형식상 탐사보도물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탐사보도적 자세는 지금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국 언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론칭한 ‘뉴스타파저널리즘스쿨’, 약칭 ‘뉴스쿨’을 통해 독립언론 창업 인큐베이팅에도 나섰습니다. ‘독립언론 100개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다소 거창한 별칭도 붙였는데 말 그대로 독립매체를 양성하고 독립매체의 연대와 협업을 통해 한국 언론생태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겠다는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단 친구 회원의 글

쟈베르의 갈등과 부랑아들이 썼던 은어를
20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는 위고에게 경의를 표하는 리영희 선생

진영종 성공회대 교수, 영문학
그 당시 자베르의 비극적인 죽음의 의미에 주목한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리영희 선생님은 자베르의 삶의 딜레마에 주목한 것이다. 체제 진영의 이쪽 저쪽이 아닌 개인의 처지와 생각을 주시한 리영희 선생님은 일찍이 이런 삶의 모습을 읽어냈다. 이것은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을 볼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분이다.
리영희 아카이브
리영희의 버클리대 초빙교수 시절

1987년 UC버클리의 한인 학생회가 동포사회와 함께 모금을 통해 초청, 개설한 리영희 강좌는 강의 내용에 앞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강의까지는 목이 타더니 세 번째 강의에서는 목구멍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고 영어로 하는 강의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일주일에 90분짜리 두 번의 수업, 공개강의, 한인학생과 교민들과의 교류, 리영희의 미국사회에 대한 단상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와 당시 조교를 하기도 했던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교수의 글을 싣는다.



발행인: 김효순(리영희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