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71회 (2022.09.14)

안녕하세요. 시 쓰는 주하림입니다. 구 년 만에 독자분들을 만나게 됐네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늘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요즘 고양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 여름을 맞이하고 있어요. 새 시집이 나온 올여름은 저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신 감사한 분들 덕분에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북토크에서 독자분의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봉투 속에 지우개 가루가 있어서 마음 한편이 뭉클했습니다. 연필로 얼마나 쓰고 지웠을지,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녀의 편지글이 정신의 암흑을 자기기만으로 이겨내려 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네요. 잊지 않을게요. 이런 따스한 응원들을 받아본 기억이 적어 지금의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하림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철도의 밤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철도의 밤이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 차창을 뒤덮은 성에가 네온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네. 그날 밤, 난방이 형편없는 술집에서 자네와 헤어진 후 무섭도록 많은 가로등들이 켜져 있는 이상한 거리를 헤맸다네. 그러다 그만 길바닥 빙판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말았지. 그리고 이제 다시, 나는 나의 반복되는 꿈속에 있네. 우울한 마음으로, 내가 타고 가는 기차가 통과해갈 그 익숙한 수많은 철교들을 생각하며. 자네는 그날 밤 무슨 말을 했던가. 거래처의 P에 대해. 미결 서류에 대해. 자네와 J양의 쓸쓸한 연애에 대해.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웃었지. 자네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경멸했네. 그리고 이제, 철도의 밤이로군. 아무래도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을 작정인 것 같네. 열차는 줄곧 북상하고 있네. 추위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네. 어째서 나의 꿈속은 이리도 겨울, 겨울뿐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이 열차가 멈출 테고 그러면 나는 이름 모를 북구의 작은 정거장에 홀로 내려서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차표를 끊을 걸세. 이것이 언제나 반복되는 내 꿈의 행로일세. 늘 그래왔듯이 자네는 이런 내 말을 믿지 않겠지만 말이네.

 

이 글이 자네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어쩌면 꿈 밖의 나는 벌써 깨어 일어나 창백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댄 채 내게 할당된 업무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와, 나를 태운 이 열차와, 어둠 속으로 뻗어가는 겨울의 어두운 광채와,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는 모든 꿈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곧 소멸하고 말 것이네. 하지만 친구, 어쩌면 지금도 자네 곁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을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J양을? 통근 열차의 흔들림을? 우리 곁을 자전하는 찬란한 업무의 성좌를?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자네는 서류를 필사하는 틈틈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알고 있다는 것, 자네가 부인하는 꿈속의 자네 역시 북구의 어느 이름 모를 정거장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쓸쓸히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

 

이제 열차는 불 꺼진 공장 지대를 벗어나 눈 덮인 황량한 숲 속을 통과하고 있네. 내 앞에는 책상이 있고, 백지가 있고, 그 위로 흘러가는 겨울 가지들의 무수한 검은 선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는 내게 쓰도록 명령하는 집중된 허공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내 손의 움직임을 듣고 있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밤, 어둠, 고독한 불빛들. 철로를 깨무는 추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철교의 속삭임.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의 어두운 비명을 들으며 나는 자네를 생각하네. 사무실의 뿌연 조명 아래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자네와 나를 생각하네. J양을 훔쳐보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을 생각하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소멸하는 열차들의 침묵을. 여관방에서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자네의 눈꺼풀 뒤로 열리는, 영원한 철도의 밤을……

‘좋아한다’는 표현을 꺼내는 것이 무척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좋아한다는 말 다음을 이어가는 것이 부쩍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저에게도 좋아한다는 말을 곧잘 꺼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이 책을 펼치던 순간 그 말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혀 번득이는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그의 시에는 한여름 빗줄기에 씻겨내려간 듯한 서늘한 분위기의 광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철도의 밤」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라는 대목에서는 ‘항진’의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않아도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따라붙는 고통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의 소리’가 제게 그토록 또렷이 전달됐을까요. “차창을 뒤덮은 성에가 네온처럼 차갑게 빛나고” “무섭도록 많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이상한 거리”를 저는 꿈에서 현실에서 마주친 적 있었을까요.

“난방이 형편없는 술집”과 “불 꺼진 공장 지대를 벗어나 눈 덮인 황량한 숲 속을 통과”하는 기차와 “내 앞에 책상”과 “백지” “그 위로 흘러가는 겨울 가지들의 무수한 검은 선들”은 꿈과 현실 사이를 교차하고 뒤섞어나갑니다. 흩날리듯 촘촘한 장면들 속에서 그의 쓸쓸하고 흐린 꿈을 함께 목도하는 것은 시집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길바닥 빙판에 얼굴을 묻고 잠든” 그 우울한 마음이 무엇인지. 끝내 J양과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대해서도, “말없이 서로를 경멸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지만, 아마 “모든 꿈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곧 소멸하고 말 것”임을 예감해서일까요. 그의 숨겨진 전언과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 같은 문장들은 늦여름밤 내내 끼고 들었던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신보처럼 내내 저에게 머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문학동네 단독 입수★
황유원 시인의 미니 인터뷰
구독자 님, 문학동네시인선177을 출간하신 황유원 시인의 미니 인터뷰를 문학동네가 단독 입수했습니다. 두번째 시집을 펴낸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줄 내밀한 이야기 지금 바로 확인해볼까요?

무한대의 밤이 우리를 낳았고
우리 또한 무한대의 밤을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 밤 위에 뜬 섬 한 채로
그 섬의 그 어둡고 거대한 녹색 저음들로
밤새
웅웅거릴 것입니다
_「밤섬의 저음」 부분
💚주하림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그게 블루스지

블루스맨 최상우에게

(황유원, 『초자연적 3D 프린팅』)

 

예전에 학교 앞에 있던 허름한 콩나물해장국집

그날 너랑 상암에서 영화 보고 가서 해장국 이 인분에 소주 한 병 마셨는데

국물이 부족해진 우린 국물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되냐고 조심스레 물었고

할머니는 그냥 한 그릇을 리필이라며 갖다주셨다……

그 가게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일흔이 돼도 너와 함께

가고 싶던 그 가게는, 그렇게, 그래서 망했다

 

그게 블루스지

 

학교 옆 재개발터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던 백반집

공강 시간에 가면 늘 공사장 인부들로 북적였는데

혼자 자리 차지하고 앉아도 늘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

학생이 돈이 어디 있냐며

늘 반찬을 더 갖다주시던

저녁때는 안에서 담배도 피우게 해주시던 그 할머니

가게 이름이 무려 ‘천하태평’!

 

그게 블루스지

 

나에게 먹을 것 해주시던 모든 할머니들

나는 외할머니는 본 적도 없고

친할머니는 살아 계실 때 몇 번

보지도 못해서

길에서 할머니를 보면 그게 다 내

할머니 같고

다들 내게 밥과 반찬과 국물을 더 갖다주시던

할머니들 같은데

그 할머니들 만난 지도 이제 벌써

십여 년

구천에서도 귀신들 밥을 해 먹이고 있을 그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그게 블루스지

 

상우야, 그렇지 않니

 

이제는 미국 텍사스 가서 사는 너도

평생을 기억할

미시시피를 가고 루이지애나를 가도 못 들을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의 블루스

읽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작품과 무관하게 나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 황유원 시인의 시집 중에서 마음이 가장 머물던 시를 골라봤습니다.

지금은 없어진(망했다는 표현 자체가 가슴이 아프네요) “학교 앞 콩나물 해장국집”. 친구 “상우”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일흔이 돼도 함께 가고 싶던 가게”는 사라지고 시인은 “그게 블루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블루스”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여행을 다니던 적이 있습니다. 작은 도시, 재즈 바 근처에 숙소를 잡고 몇 날 며칠 음악만 들었습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재즈 바는 블루스 바였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블루스는 제가 알던 재즈와는 달랐습니다. 세련된 연주곡이 아니라 거칠며 가슴이 미어질 듯 슬프고 어두웠습니다. 연주는 힘겹게 견뎌온 날들을 전부 떠오르게 했습니다. 마이크에 입술을 완전히 붙인 채 눈을 감고 노래하는 보컬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 구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내게서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이들을 떠올렸습니다. “구천에서도 귀신들 밥을 해 먹이고 있을 그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눈에 들어온 한 문장이 블루스를 듣던 그때처럼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이번 세상에 만난 그들은 구천의 귀신처럼 떠돌던 나를 위해 소고기 뭇국을 끓이고 게장 살을 발라 흰쌀밥 위에 얹어주곤 했습니다. 제가 파란 문을 열고 할머니,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지금이라도 슬리퍼를 구겨 신고 뛰쳐나올 것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을 다시 만나면 양손 꼭 붙잡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애도와 슬픔 속에 웅크려 살던 나는 이젠 슬퍼할 겨를 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단 것을, 그 깨달음에도 나는 어떤 것도 잊을 수 없다는 현실까지.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민병훈 소설가입니다. 서교동에 위치한 근사한 문학예술서점 '진부책방 스튜디오'의 매니저이기도 하죠. 다음주 수요일, 민병훈 소설가가 고른 두 편의 시와 함께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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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앉지 못하는 대중교통 출퇴근길에 마음만은 앉아 쉴 수 있는 느낌을 주어서..
💬소개된 시가 젤리나 푸딩같은 것에 딱딱한 물건을 눌러 넣는 것처럼 어려움 없이 물컹 들어왔습니다. 시의 구절들에 마음이 움직이고 좋은 시를 알게 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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