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가 보이지 않을 경우 펼쳐보기를 눌러 확인하세요!


사람은 어떻게 운전자가 되는가. 운전면허를 땀으로써?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면허를 취득한 이후에 시작된다. 주변 지인을 무작위로 취합한 결과 운전자와 장롱면허자, 비면허자가 거의 1:1:1 비율로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장롱면허자는 결코 운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운전자와 비운전자의 실질적 비율은 1:2로 볼 수 있다. 운전면허가 있는 것과 없음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적어도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장롱면허자로 남을 것인가, 운전자가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운전면허 취득인이 운전자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가? 누군가는 ‘자차’라고 대답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내 경우는 용기와 친구였다. 나는 면허시험에 두 번 떨어졌다. 거의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첫 운전면허시험 날은 대선일이었고, 선거 전날 밤, 심란한 마음에 지인들과 술을 많이 마셨다. 다음날 흐릿한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르면서 ‘설마 떨어지겠어?’ 하는 생각으로 닥쳐올 개표 방송 결과에나 신경 썼다. 그리고 낙방한 후 멍하니 집에 돌아와 초저녁부터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두려워했던 결과가 현실이 돼 있었다. 낙방의 슬픔은 곱씹을 틈도 없었다. 이날 운전면허 취득에 실패한 데 좀 더 집중했다면 한 번 더 떨어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시험비가 얼만데, 멍청한 놈! 나는 세 번째 시험에서 비로소 운전면허자가 됐다. 당시 나는 차가 없었고 셔틀버스를 타고 매일 출판단지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롱면허자가 될 훌륭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렵사리 취득한 면허를 장롱에 재우고 싶지 않았다. 겁도 없이 친구들과 렌터카 여행을 추진했는데, 우리 그룹에 운전 숙련자가 한 명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의미의 ‘운전자’였는데, 여행 때마다 도심을 벗어나면 내게 운전대를 넘겨주었다. “자, 해봐.” 그가 나를 ‘운전자’로 키웠다. 초반에 내가 핸들을 잡으면 조수석에서 측면 손잡이를 꽉 쥐고 긴장했던 그가 점점 여유 있게 휴대폰을 보거나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마침내 조수석에서 잠든 그를 봤을 때 합격 도장을 받았음을 알았다. 어엿한 운전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계절마다 구례, 삼척, 강릉, 영월 등 많은 도시를 다녔다. 그사이 나는 국제면허증을 만들 수 있는 연차가 됐다. 다음 도전은 해외였다. 일본 여행 일정 중 하루만 차를 렌트해 보기로 했다. 일본 운전자들은 너그러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감행했는데, 어느 정도 틀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게 한겨울의 홋카이도라는 점이었다. 

@unsplash


눈이 한없이 내리는데 도로 양측에 눈이 제방 높이로 쌓여 있었고, 차선도 보이지 않아 어디를 어떻게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운전석과 주행 도로가 한국과 반대인 점도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방향지시등을 켤 때마다 와이퍼를 대신 작동시키며(이것도 반대다) 혼란에 휩싸여갈 때 비면허자인 동행자는 조수석에서 평온하게 있었다. 그의 신비로운 낙관에 힘입어 홋카이도 최북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새하얀 풍경 속을 운전한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하지만 눈의 도시 홋카이도에서 북쪽 해안의 곶 하나를 목적지로 찍고 무작정 달렸던 경험은 내게 영구히 운전 욕심을 갖게 했다. 관광버스도, 관광객도 없는 얼어붙은 해안을 뚫고 나아가는 쾌감은 그만큼 특별했다. 차를 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행 외의 일상에서는 오래도록 뚜벅이였다. 하지만 일본 시골 여행에 재미가 붙어 오키나와, 시코쿠, 나가노, 돗토리, 도야마, 야쿠시마까지 많은 지역을 렌터카로 다녔다. 
 
자동차 여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길을 지금도 소중하게 회상한다. 시마네 현의 어느 시골마을 깊숙이 자리한 샘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렇게 맑고 작은 물을 볼 수 있다니, 용감한 렌터카 운전자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은 3년 차 자차 운전자다. 차가 생기니 ‘운전자의 길’에서도 다음 단계가 펼쳐졌다. 생활 운전자다. 여기부터 자동차 관리와 보험, 정기 점검과 수리 등 즐겁지 않은 과정들이 함께했다. 지긋지긋하게 빽빽한 서울이라는 도시가 무대가 되자 다른 의미로 긴장됐다. 여행지와 생활권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함께 달리는 차들은 물론, 주유소며 정비소 직원 등 앞으로 일상에서 운전자로서 나와 연루될 모든 동료 시민에게 어쩐지 합격점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조수석에서 나를 지켜봐주던 다정한 친구와는 달리 사무실 경비원은 심보가 사나웠다.
 
지시에 따라 정확히 차를 대야 하는 좁은 주차공간에서 두세 번만 왔다 갔다 해도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긴장해서 ‘한 번에 잘 대야지’ 했는데 어느 날 다른 아저씨가 주차할 때는 네댓 번을 헤매도 묵묵히 지켜보는 꼴을 보고 나서 의기소침하기를 멈출 수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자차 운전자가 되는가. 차를 구입하면서부터? 그렇지 않다. 여기서부터 또 무언가가 시작된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는 경험, 공업사를 돌며 견적부터 수리까지 원활히 마치는 경험 등이 쌓였다. 덧붙여 마음도 강해졌다. 생활 운전자가 된 뒤 운전대를 잡은 내게 의심과 못미더움의 눈초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싶어 하는 남자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기운 빠지고 불쾌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극복했다. 어쩌라고? 나는 ‘무사고’ ‘무딱지’에 주차도 잘한다. 불쾌한 아저씨들보다 새로 알게 된 즐거움이 중요하다. 새벽에 잠든 도시를 달려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러 가거나 훌쩍 당일치기로 친구들과 서해 일몰을 보고 오는 일은 생각보다 좋았다. 운전석에 앉는 사람이 됐기에 닿을 수 있었던 많은 시간과 장소에는 압도적으로 기쁨이 많다. 운전하길 정말 잘했어!



Writer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 <엘르> 2023년, 3월호 발췌




낙태죄가 폐지된 지금,

영화 <콜 제인>이 전하는 메시지_요주의여성 #82


한 걸음 더, 우리 함께.

영화 〈콜 제인〉 스틸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당신은 무얼 했나요? 저는 강남의 한 극장을 찾았습니다. 영화 〈콜 제인〉을 보려고요.
 
1960년대 미국, 변호사의 아내로 안정된 삶을 꾸려가던 주인공 조이는 둘째 임신 중 심근병증 진단을 받습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임신을 중지하는 것뿐. 병원에서 임신중절수술 위원회가 열리지만 ‘지난 10년 동안 단 한 차례’ 수술을 승인했던 그곳에는 담배 문 중년 남성들만 가득합니다. 절박한 조이의 눈에 “임신으로 불안하다면, 제인에게 전화하세요”라는 작은 벽보 광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콜 제인〉은 미국에서 임신중절이 불법이던 시절,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도왔던 단체 ‘제인스(The Jane Collective)’의 실화를 모티프로 했습니다. 영화 〈캐롤〉의 각본가 필리스 나지의 첫 연출작이기도 하지요.
 
‘낙태’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뤘음에도 영화는 무겁지 않게 따듯한 톤으로 흘러갑니다(수술 장면도 딱 견딜 만한 수위로 길지 않게 나옵니다). 영화는 치열한 투쟁을 전면에 그리기보다, 평범한 주부 조이(엘리자베스 뱅크스)의 상황과 변화를 통해 당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조이는 남편과 같은 대학을 나왔고 남편의 변론을 대신 써줄 만큼 똑똑하지만 ‘가정주부’ 역할에 갇혀 있습니다. 남편은 자상한 남자이긴 하지만 아내의 생명이 걸린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합니다.
 
‘제인스’를 통해 비밀리에 안전한 시술을 받게 된 조이는 이들의 활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여성들을 은신처에 데려다주는 간단한 일부터 시작하나 ‘더 많은 여성을 돕기 위해’ 점차 대담하고 열성적으로 나서게 되지요. 덕분에 집을 자주 비우게 되자 남편은 냉동식품을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런 남편을 향해 조이가 말합니다. “난 사람들과 교류가 필요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말이야.”

영화 〈콜 제인〉 스틸


여성이 자기 몸과 자기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못하던 때, 여성들이 힘을 모아 다른 여성을 구하는 이야기는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제인스’의 리더 버지니아 역으로 출연한 시고니 위버의 연기 또한 든든하게 영화를 받쳐주는 느낌을 주지요. 제 또래의 많은 이들에게 ‘최초의 여전사’(〈에일리언〉)로 각인된 그가 일흔을 넘어 여전히 꼿꼿한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게(〈마이 뉴욕 다이어리〉, 〈아바타〉 등) 참으로 반갑습니다.
 
제인스 멤버들이 맞잡은 손을 올려 환호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는 그야말로 ‘해피엔딩’,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당장 이 영화를 만든 미국에서는 지난해 연방대법원이 여성들의 임신중지 결정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면서 낙태권 논쟁이 재점화되었지요. 과거 임신중지 합법화를 위해 시위를 했던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 모습으로 다시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오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사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는 위헌’이라 결정 내렸으나, 그 후 4년이 다 되도록 관련법 개정이 되지 않고 의료적 가이드라인도 없는 상황입니다(관련 내용은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에서 자세히 다뤘으니 찾아보길 권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은 여전히 불안에 떨며 인터넷 검색으로 도움받을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저출산 문제만 요란하게 언급될 뿐 정작 여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진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세상은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는 걸까?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런 한탄과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건, 낙담하고 포기해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세계 여성의 날에 〈콜 제인〉을 보면서 다시금 희망을 품어 봅니다. 함께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3년, 3월 웹기사 발췌


정말 많은 분의 응원과 참여로 마무리된 
엘르보이스 '기부' 앤 테이크 캠페인!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정된 아리님 250분의 이름으로 기부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비하인드 레터도 기대해주세요🌹

[선정 기준]
*초대한 친구의 이메일 구독 확인이 안 되거나,
신규 가입자가 아닌 분들은 아쉽게도 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중복 참여자(초대한 친구 중복)의 경우 먼저 신청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발했습니다.
*주소 오기입으로 인한 미발송 시 재배송되지 않음을 안내해 드립니다.

앞으로도 엘르보이스 이벤트는 계속 될 예정이니 아쉽게도 선정되지 못한 분들은 다음 기회에 함께해요💚

🔊지난 주 구독자 보이스🔊
매주 여러분의 목소리 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의 소중한 피드백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으니 오늘의 <엘르보이스>가 어땠는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앞으로 많은 분들이 관심과 사랑 💕 받으면서 발전하는 모습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포기하는 순간 시합 종료다' 꼭 시합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아요. 포기하는 순간 그 일은 끝나는 거죠. 그걸 알지만 포기는 너무 쉽고 꾸준히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ㅠ 이번 주 레터도 잘 읽었습니다!

*남성 독자 입니다 메트로섹슈얼적인 관점이 기사도 부탁해요.

*생리대 기부를 통하여 많은 여성들이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님, <엘르보이스> 52번째 레터 어떠셨나요? 
님의 감상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아래 링크에 남겨주시면 정성껏 읽고 다음 레터 준비하겠습니다💕
👋 엘르보이스를 이웃에 소개해주세요! 
더욱 다양하고 반짝이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길 <엘르보이스>, 나만 볼 수 없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님의 이웃에게도 <엘르보이스>가 널리 읽힐 수 있도록, 아래 링크를 공유해주세요 🙋
📝 구독자 정보를 바꾸고 싶어요!
엘르보이스 속 다양한 이벤트는 구독 시 기재해주신 정보를 통해 안내 및 제공되어요.  님의 구독 정보를 바꾸고 싶다면 이곳을 클릭해주세요✅

허스트중앙 유한회사
elle.korea@hll,kr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156 JTBC PLUS 빌딩 02-3017-258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