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살인의 전조, 스토킹

폴라리스 항해도 vol. 66

스토킹 범죄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습니다. 가해자가 직장 동료였다는 점, 살해된 장소 역시 근무하던 지하철 역사였다는 점이 알려지며 피해자가 생전에 느꼈을 고통과 공포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는데요. 작년에 도입된 ‘스토킹 처벌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사안의 본질이 여성을 향한 증오범죄, 즉 ‘페미사이드’라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번 주 폴라리스는 피해자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려 합니다. 먼저 사건 발생 경과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오랜 기간 스토킹과 협박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여러 법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막지 못한 원인을 제도의 한계와 미비점을 통해 분석합니다.

사건 이후 더 큰 공분을 샀던 건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발언이었죠. 피해자의 책임을 암시하거나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부정하는 말들이 널리 쓰이는 현상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인식이야말로 스토킹 범죄가 반복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이번 사건이 전형적인 ‘페미사이드’라는 점을 짚고, 마지막으로 해외 입법 사례를 살펴보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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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가, 합의 없이 오늘까지 버틴 것은
판사님께서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피해자가 작성한 탄원서 中

1. 법이 있어도 막을 수 없었던 죽음, 뭐가 문제였을까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스토킹을 당한 기간은 무려 3년입니다. 가해자 전주환은 피해자와 입사 동기로 입사 이듬해부터 300번이 넘도록 전화와 메시지를 남기며 만남을 요구해왔습니다. 나중에는 피해자를 불법촬영한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까지 일삼았죠.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고소를 진행하고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할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계속되는 스토킹에 결국 한 번 더 고소가 이루어졌고, 이번에는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합니다. 하지만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4일,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범행을 저지르면서 스토킹에 벗어나려던 피해자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추가 고소를 한 뒤에도 별도의 보호 조치는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직권으로 100m 이내 접근 금지 등 응급 조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승현, 박지민, <조선일보>, 신당역 살인범, 300여차례 스토킹... 징역 9년 구형받은 뒤 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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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명 ‘스토킹 처벌법’이 도입된 것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경범죄로 간주되던 스토킹범죄가 징역 등의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죄로 인정받기까지 참 지난한 과정이 있었죠. 그러나 시행한 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또 한 명의 여성이 죽었습니다. 그간 ‘스토킹 처벌법’의 구멍과 독소 조항을 지적하며 국회에 발의된 법안만 15건이지만, 논의된 것은 단 1건, 그것도 1차례에 불과합니다.

에디터 무지🌈

2. 스토킹처벌법, 그 속에 담긴 맹점은?

또 한 명의 죽음으로 유명무실해져버린 ‘스토킹처벌법’에는 두 가지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집행하는 수사기관의 미온적인 태도이고, 또 하나는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를 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면 처벌을 하지 않는 ‘반의사 불벌죄’ 조항입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검찰이 처분한 스토킹 사건 중 피의자가 구속된 비율은 4.8%에 불과합니다. ‘스토킹=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대중화되고 신고건수도 늘었지만 구속 비율은 5%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반의사 불벌죄’ 조항도 큰 구멍입니다. 이 조항 때문에 외려 가해자에게 ‘고소를 취하하라’는 협박을 받는 스토킹 피해자가 많기 때문이죠. 가해자가 구속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를 찾아와 합의를 종용하는 상황은 엄연한 2차 가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인 서혜진 변호사는 “‘스토킹의 끝은 살인’이라는 말이 있다”며 “법원과 수사기관은 살인 등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스토킹 범죄를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변호사는 “현행법은 스토킹 행위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다. 스토킹 범죄 수법은 얼마든지 진화할 수 있고, 가해자들이 법망을 교묘히 피해갈 가능성도 있기에 스토킹 행위를 더 포괄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박고은, 이주빈 <한겨레>, 스토킹 구속 비율, 48%도 아니고 4.8%…너무도 관대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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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스토킹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서 변호사의 말처럼 이제는 ‘스토킹’과 ‘살인’을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도, 집행하는 수사기관도 스토킹 범죄에 대해 높은 경각심을 가져야만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피해자가 없을 것입니다.

에디터 부기🐢

디지털 성범죄 판결문 275건 양형사유 ⓒ 경향신문의 그래픽을 재구성

3. ’좋아하니까’ 죽인 거다?

그럼에도 스토킹 범죄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신당역 스토킹 살인에 대해 “여성혐오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여가부 장관의 인식은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 때도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당시 김 장관은 “학생 안전의 문제고 성폭력이지 여성폭력이 아니다”라고 언급해 논란이 됐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통계는 다른 말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체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남성 비율이 높습니다. 하지만 경찰청범죄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체 강력범죄 피해자 2만4332명 중 남성은 11.8%, 여성은 88.2%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지난 10년 간의 통계에도 해당됩니다. (2011년~2020년 10년간 강력범죄 피해 남녀비율 남성 13.3%, 여성 86.7%)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 범죄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거죠. 특히나 전체 강력범죄 피해자의 82%, 여성피해자의 95%가 여성 성범죄 피해자라는 점에서 여성 대상 성범죄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페미사이드는 젠더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젠더 폭력은 무작위로 발생하는 ‘일부’ 남성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성별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적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무작위 사건, 일부의 일탈이라고 보기에는 문제의 규모가 크고 또 사회적 패턴이 뚜렷하다.

- 김명희, <시사인>, 연쇄살인이 아니다 ‘페미사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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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현상’을 가리켜 ‘페미사이드’라 부릅니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인식할 때, 매년 생겨나는 여성 대상 범죄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여성 대상 범죄에서 ‘여성’을 지우려 하는 여가부 장관의 인식이 문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은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가해자가) 폭력적인 대응을 했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발언을 했습니다. 성범죄에서 피해자를 탓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인식은 비단 정치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신당역 사건에서 법원은 가해자의 공인회계사 합격 전력을 구속영장 기각의 근거로 삼았고, 경찰은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조치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부실한 대응은 또다시 여성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에디터 바이타🍑

4. 스토킹 처벌법의 허점, 그리고 스토킹 보호법이 필요한 이유

스토킹 처벌법의 허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지적됩니다.

100m 이내 접근 금지의 실효성 (100m면 뛰어서 10초대…)
반의사불벌죄여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할 수 있다는 점
미성년자가 피해자여도 가중처벌 없음
피해자 보호 긴급응급조치의 최대 기한이 6개월에 불과

나아가 스토킹이 살인 등 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예방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로 불리는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스토킹처벌법과 별도로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보호 법규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법'과 같은 강도 높은 피해자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 권선미, <연합뉴스>, [살인의 전조 스토킹] ⑤ 과연 스토킹 제대로 막을까…"스토킹처벌법 곳곳 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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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스토킹 보호법을 통해 스토킹이 살인 등 중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가해자가 스토킹한 사실이 있고, 그것이 피해자에게 위협이 되며, 보호 명령을 사용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인정되면 법원은 경찰로 하여 가해자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했죠. SNS에서 피해자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임시 명령 제도도 있습니다. 비록 보호 지속 기간은 짧지만, ‘스토킹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 인정되면 즉각 경찰이 개입할 수 있죠.

‘살인의 전조’라고도 불리는 스토킹. 살인이 벌어지고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법에도 중범죄의 징후가 있을 때 즉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에디터 안목☕

3줄 요약

1. 스토킹 범죄에 시달리던 여성이 자신이 일하던 직장에서 가해 남성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2. 사법기관의 안일한 판단과 '스토킹 처벌법'의 독소조항이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3. 스토킹 범죄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서 구조적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실한 법망을 정비하고 보완책을 마련해 '페미사이드'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에디터가 남긴 편지

“요즘은 사람 만나기도 무서워. 조심해야 해, 진짜.”

TV에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 가해자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계산을 하다 멍하니 옮겨진 시선에 식당 주인 분은 염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걱정이 담긴 시선에 “그러게요”라고 짧게 답했지만, ‘둘은 만난 적 없다’는 해명을 덧붙이진 못했습니다. 피해자는 만남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요구에 법적 절차까지 진행했던 피해자에게 돌아온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였습니다.

‘조심하라’는 걱정을 달갑게만 들을 수 없는 까닭은 이 또한 피해자에게, 혹은 여성에게 또 다른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밤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것, 으슥한 곳에선 이어폰을 빼는 것 말고도 수많은 걱정 속에 살아야 하는 여성들은 더 이상 조심할 수 없습니다. 여성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기 전에,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전히, 피해자를 향하는 비난의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시선은 피해자에게 이중의 억압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모든 비난의 시선은 자신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힌 피해자를 괴롭히고, 스토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 가해자를 향해야 합니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미온적인 한국의 현실은 가해자를 옹호하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테니까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이상의 피해는 막아야만 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2022.09.26

에디터 바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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