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쯤 되면 (사실 여부와는 상관 없이) 올해는 내가 또 얼마나 허송세월을 했나 반성하고 (역시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 없이) 내년엔 반드시 이러이러한 것을 이뤄 갓생('갓(God)'과 '인생'을 합친 말로, '계획적이고 생산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을 살리라 다짐하곤 합니다. '실현 가능성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저는 대학 새내기이던 시절부터 몇 년째 운전면허를 따는 것을 신년 목표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내년 목표도 어김없이 운전면허 따기입니다. 오늘부터 격일로 여섯 편을 보내드릴 새 책은 〈안 느끼한 산문집〉의 저가 강이슬 작가님의 새 에세이,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입니다. 초장부터 운전 면허 취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 글을 보며 저는 사무실에서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숨죽여 웃었습니다. 이유는... 작가님의 글이 재밌었던 것도 있지만, 작가님의 일화 하나하나가 남일같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으로 보내드리는 글 역시 운전학원에서의 에피소드입니다. 저는 사실 세상에 운전에 전혀 감이 없는 사람이 나뿐인 것만 같아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묘하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어쩐지 내년에는 면허를 취득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깁니다. 어쩌면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투른 인생이나마 열심히 살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섯 번째 영.레터를 맞아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 인간〉의 편집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의 편지를 님과 나누며 오늘의 인사를 마무리합니다. 모레 뵙겠습니다. - 10년 째 운전 면허를 못 따고 있는 담당자 Jay " 안녕하세요? 담당 편집자 구예원입니다. 강이슬 작가님은 저를 자꾸만 ‘구원자 (구예원 편집자의 줄임말)’라고 부르시는데요. 이제 3년 차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책이 어려운 초보 편집자로서 정말 부담스러운 별명입니다. 고백하건대 작가님의 초고를 받고 덜컥 겁도 났어요. ‘지금껏 본 글 중 제일 웃기고, 심지어 초보 시절 잘 못 해내는 이야기인데도 멋있고 비장하고, 마지막에 감동적이기까지 한 이 글을! … 잘 펴낼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이 책의 다음 문장이 저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편집자로 만들었습니다.
“종종 할 수 없는 일과 너무 잘하고 싶은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 너무 잘하고 싶은 일 앞에선 자신을 과도하게 검열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구별이 되었어요. 전 이 책을 정말 잘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모든 초보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구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요. 처음 앞에서 용기가 필요한 분들께, 이 책을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 모든 개구리는 한때 올챙이였다 나의 첫 번째 운전은 짓궂은 농담처럼 기분 나쁘게 우스웠다. 심지어 날짜조차 4월 1일 만우절이어서 더 그랬
다. 학원 정문에 심긴 커다란 벚나무는 왕성한 봄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장내에는 샛노란 차들과 덜 노란 차들이 어쨌거나
노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노란빛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전날 세 시간 동안 학과 수업을 받으며
바퀴 달린 기계가 인생을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배웠기 때문이다. 노랑, 그것은 뻔뻔스러운 위장이었다. ‘나는 안전해요’ ‘나는 순해요’ ‘나는 부드러워요’ ‘나는 귀여워요’라는 거짓 시그널을 뒤집어쓴 위험천만한
기계들. 나만은 너희들의 앙큼한 겉치장에 호락호락 속지
않으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강이슬 씨!”
멀리서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한 손에 끼우고 두리번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쭈뼛쭈뼛 오른손을 들었다. 그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빨고 꽁초를 탁탁 털었다.
핸드폰 시계가 59분에서 정각으로 바뀌는 찰나였다. 그는
날렵하게 각이 진 매우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언뜻 영화 <매트릭스>의 소품 같기도 했다. 편의상 그를
‘매트릭스’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매트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 오늘 두
시간 동안 운전을 가르쳐줄 선생님이었다.
매트릭스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앞서 걸었다. 낯선 학교에 막 발을 들인 전학생이 처음 본 담임의 뒤를 따라갈 때처럼 위축되고 겁먹은 모양새로 나는 종종걸음을
쳤다. 1, 2년만 더 있으면 노랑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 같은 빛바랜 차 앞에 멈춰서 그는 물었다.
“운전해본 적 있어요?” “아뇨, 난생처음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내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그는 빠르게 기본 조작법을 읊었다. 좌석을
알맞게 조정하는 방법, 시동 거는 방법, 기어 변속 방법,
와이퍼와 전조등을 작동하는 방법 등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머릿속은 온통 ‘미친! 조작해야 할
게 왜 이렇게 많아’라는 생각뿐이었다. 범퍼카 운전이랑
똑같다는 아빠 말만 믿고 전방 주시하고 핸들만 요리조리
꺾으면서 상황에 따라 브레이크만 잘 밟으면 된다고 생각
했는데 고난이도 멀티태스킹이 따로 없었다.
설명을 마친 매트릭스가 내릴 채비를 하며 이제 자리를
바꾸자고 말했다. 화들짝 놀라 “벌써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별 해괴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운전 안 배울 거냐고 되물었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운전석에 앉아 시트를 조정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시동을 걸어야 하나 싶어 자동차 키로 손을 뻗는데 순간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면 실격!”
어리바리하게 그를 쳐다봤더니 그가 턱짓으로 안전벨트를 가리켰다. 나는 바보처럼 “아 맞다 맞다” 읊조리고는 허둥거리며 안전벨트를 맸다. “이제 시동 켜보세요.” 브레이크를 필요 이상으로 힘주어 밟고 자동차 키를 돌리려는데 그가 불필요한 말을 얹었다. “살살 돌리면 안 걸릴 수도 있어요. 여자잖아. 여자들 잘 꼬집잖아요? 꼬집어본 적 있죠? 미운 사람 꼬집듯이
자동차 키를 꽉 꼬집어 돌려요.”
50미터 앞에 있던 차가 느리게 후진을 해서 기어이 내
앞범퍼를 박는다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이없고 짜증이 났고 충격적이었다. 예시가 하필이면 너무 거지 같고 시대착오적이지 않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앞으로의 두 시간이 걱정되어서 비굴하게 꾹 참았다.
두 시간 학원비는 무려 20만 원에 육박했다. 들인 돈을 생각하자 욱했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매트릭스의 입술을 꼬집어 비튼다는 생각으로 힘차게
자동차 키를 돌렸다. 과연 잘 걸렸다. 기본 조작법은 너무나 기본이어서 5분도 안 되어 익힐 수 있었다. 한숨 돌리려는데 그가 액셀을 밟으라고 했다.
“지금요?”
“괜찮아요. 그냥 살살 밟아봐. 지금 학생이 탄 차가 누~렇 잖아요? 오래됐다는 뜻이거든. 어차피 빨리 나가지도 않아요. 살살 밟으면 돼.”
“하지만 핸들 조작법을 하나도 모르는데요?”
“시작하면 딱 감이 와. 학생, 조카 유모차 몰아본 적 있어요?”
“아니요.”
“조카 유모차 몬다고 생각하고 운전해요. 유모차 몰기
보다 더 쉬울걸?”
나는 속으로 ‘그런 적 없다니까요’를 다시 한번 외쳤다.
아무래도 ‘조카 유모차 몰듯’은 그의 레퍼토리인 듯했고
‘그런 적 없는 학생을 만났을 때’의 변주 따윈 따로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았다. 하여튼 나는 있지도 않은 어린 조카가 뒷좌석에 탔다고 상상하며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고작
시속 5킬로미터였는데 그마저도 지나치게 빠르게 느껴져서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가 좌회전을 하라고 했다. 좌회전이 왼쪽으로 회전한다는 의미라는 걸, 그러니까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얼마큼 꺾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매트릭스는 알려줄 의사가 없어 보였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핸들을 왼쪽으로 감았다. 그가 급한 어조로 “그만”을 세 번 외치고는 방금 전엔 너무 많이 감았다며 살살 감으라고 말했다. 그 다음 좌회전을 할 때도 같은 지적을 받았다. 나는 울상이 되어 당최 얼마나 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감이 안 와요? 감대로 하면 돼. 핸들 감는 걸 어떻게 알려줘. 감대로 해야지, 이 사람아.”
‘운전을 해봤어야 감이라는 게 생기죠’라는 말은 피 같
은 돈을 생각하며 속으로 삼켰다. 아무래도 매트릭스는 자신의 초보 시절 같은 건 싸그리 다 까먹은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조카 유모차 모는 것보다 더 쉽다’는 매트릭스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조카 유모차를 이따위로
몰았으면 나는 수갑을 찼을 것이다. 나는 시속 5킬로미터의 무법자가 따로 없었다. 중앙선도 침범하고, 연석도 올라타며 장내에서 할 수 있는 생쇼란 생쇼는 다 했다.
어느새 매트릭스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강이슬 씨는 마음이 아주 삐뚤어졌나봐요. 운전을 아
주 삐뚤빼뚤 삐뚤빼뚤!”이라는 심한 소리도 했다. 슬슬 짜증이 났다. 누구는 못하고 싶어서 못하나. 20만원이고 뭐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잘못할
때마다 매트릭스보다 한 박자 빠르게, 그리고 더 심하게 역정을 내며 자신을 비하했다. “아! 또 중앙선 밟았죠? 저는 진짜 갱생 불가 머저리인가 봐요!” “저 같은 게 운전은 왜 한다고 했을까요? 이 똥대가리로 무슨 운전을 한다고 아흐!” “강이슬! 이 멍청한 등신아 똑바로 좀 해!”(손바닥으로 핸들 내려치기) “선생님 답답하시죠...? 저는... 지금 그냥 콱 죽고만 싶네요.”(한숨을 쉬며 천장 바라보기) 광분한 내 모습에 매트릭스는 잘못 걸렸구나 싶었는지 잘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내가 뭔 짓을 해도 그저 한숨만 폭폭 쉬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T자 주차에서 매트릭스는 결국 나를 포기했다. 운전 학원 선생님을 하면서 나처럼 감 없는 사람은 처음 만나본다고 했다. 당최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감을 만들어 오는
건지 궁금했다.악몽같았던 두 시간의 운전 교육이 끝났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는 나에게 유튜브는 보고 온 거냐고 물었다. 얼빠진 얼굴로 “무슨 유튜브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스럽게 기함하며 “유튜브에서 얼마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잘 알려주는데 그것도 안 보고 왔어? 오늘 집에
가서 꼭 보세요.꼭!” 하고 힘주어 말했다. 왕복 두 시간
걸리는 학원까지 와서 유튜브를 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황당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유튜브보다 덜 친절하고 덜
자세한 선생임을 당당하게 시인하는 매트릭스의 태도가
얼척이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며 수고했다고 말했고
나는 그의 서늘한 뒤통수에다 대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거짓말이었다. 앞서가던 그는 흡연 구역에 당도하기도 전에 급하게 담배를 빼물었다. 나도 담배 한 까치가 몹시 간절해서 주머니를 뒤졌으나 손에 잡히는 건 먼지뿐이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담배를 챙기지 못한 것이다. 염치 불고하고 그의 뒤를 쫓아가 담배 한 대를 빌렸다. 그는 선뜻 담배를 내어주며 불까지 붙여주었다. 이번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담배 한 모금에 마음이 좀 물렁해진 나는
두 시간 동안 미워했던 매트릭스에게 앞으로의 내 미래를
상담했다.
“저 운전하면 죽을까요?”
그는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하하 웃었다. “처음부터 잘하면 뭐 하러 비싼 돈 내고 학원에 오겠어요.” 나는 속입술을 씹으며 “그쵸.... 학원비가 괜히 비싼 게
아니겠죠”라는 제법 뼈 있는 발언을 했으나 곁눈질로 살펴 본 매트릭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좁은 차안에 두 시간이나 함께 있었음에도 단 1밀리미터도 가까워질 수 없었던 우리는 놀랍게도 담배 한 대를
태우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고향과 가족관계까지 알게
되었다. 담배를 다 피울 때쯤 매트릭스가 말했다.
“하여튼 학생 너무 걱정 마(그는 어느새 완전히 말을 놓고
있었다). 내일도 온댔나? 두 시간 배우고 시험이지? 내일은
선생님이 더 잘 알려줄게!”
나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가고, 내일 봐!”
꾸벅 인사를 하고 빠르게 로비로 가서 다음 날 수업을 예약했다. 선생님을 꼭 바꿔달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친해진 건 친해진 거고 아닌 건 아닌거니까. 내일은
매트릭스보다 더 친절한, 이왕이면 자신의 초보 시절을
기억하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운전, 채식, 일... 어려워도 함께 용써요, 초보인간! ‘놀라운 토요일’ 등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방송작가이자,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은 강이슬 작가의 신작 에세이,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새해에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은데, 괜히 겁부터 나고 작심삼일로 끝날까 걱정된다면, 강이슬 작가의 좌충우돌 아슬아슬 ‘첫 순간’들과 함께 힘찬 2022년 새해를 열어보세요. 🌱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피드백 메일 보내기'를 통해 님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김영사의 출간 전 도서 미리보기 메일링 '영.레터'는 아래 페이지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