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과 최선뿐인


 나의 아침 일과는 정해져 있다.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알라딘’ 사이트에 접속한다. ‘새로 나온 책’을 훑어본다. 필터는 종합으로 놓고 신간 목록을 쭉 본다. 문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신간은 인문학이나 종교, 과학, 사회, 역사를 넘어 아동 도서도 가리지 않는다. 관심 있는 분야라면 새 창을 연다. 문학 분야는 자세히 본다. 처음 들어본 이름의 작가면 바로 눌러본다. 나라, 연령대, 어떻게 작가가 되고, 무슨 글을 출판했고, 어떤 작품에 기반을 뒀는지 파악한다. 대부분은 작가 소개, 출판사 소개, 미리보기까지 보면 기본적인 정보는 알 수 있다. 알고 있는 작가의 신작이라면 반가워한다. 작품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장바구니에 담은 책은 대략 91권. 한 달에 매번 그 정도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둔다. 일부는 오프라인에서, 일부는 온라인으로 주문한다.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박연준 시인의 신간은 당일 배송으로 받았다. 시인님의 인스타그램도 팔로우하고 있기에, 신간을 잘 보겠다는 디엠도 보냈다. 사려깊은 연준 시인님은 답장도 보내주신다(발레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왠지 더 좋다).

 얼마 전에는 사이비 종교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어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웹툰도 보고 영화도 보다가 신간을 발견했다. 을유문화사의 컬트는 팟캐스트 열풍을 불러온 시초라고 해서 더 흥미로웠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사이비종교는 결이 달라서 문화 차이에서 오는 차이도 꽤 컸다. 이후 더 알고 싶어서 구독하게 된 건 SBS뉴스의 ‘세계의 나쁜놈들’. 교수님이 나오셔서 나쁜놈들 집단을 요약해주시고 문제점도 짚어주신다. 한참 그것만 보다보니 유튜브와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온갖 호러와 미스터리로 점철되고 말았다(정확히는 피칠갑). 의도적으로 자연과 음악, 그 외 생각할 지점을 담은 채널과 프로그램을 구독했다. 대략 비중을 맞출 수 있게끔. 그러고나서 또 다른 영역을 탐구한다.


나는 책을 통해 세상을 본다. 여전히 그렇다. 세상에 나오는 책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에 흥미를 느끼는지, 사회에 뭐가 불만인지, 요즘 트렌드는 뭔지 알 수 있다. 책이라는 것이 출판되기까지 몇 달만 걸리는 게 아니라 몇십 년이 걸리기도 하니까. 혹은 이미 작가가 썼으나 번역이 이제 돼서 알려지는 작가도 있고. 그런 방식이라면 책도 세상의 흐름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무언가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건, 스무 살 때부터 ‘신간 보기’가 나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굳이 알라딘인 이유는 인터페이스가 제일 깔끔해서. 알라딘은 책 제목 옆에 간단한 소개 문구도 있다. 회색으로 붙은 핵심 문구도 카피라이팅이다.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는 습관은 기획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쨌든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그 책? 뭔지 알아요’가 된다. 혹은 ‘나온 거 봤어요’가 되거나. 온 세상 책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늘 책을 생각하고 있다. 이 일과가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고 영어영문학과를 복수전공한, 대학원 석사를 졸업한 사람. 이것은 내가 공부를 했던 흔적이고, 지금의 나를 증명하는 건 책과 나를 떼어놓지 않고 산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면서 연결고리를 찾는 습관도 그렇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하루키는 마라톤과 글쓰기를 꾸준히 한다는 점을, 헤밍웨이는 매일 전날까지 쓴 모든 글을 다 읽고 새로운 문장을 시작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 두 가지도 책에 나오는 정보다.


사실 더 나아가 예술과 관련되는 분야에 관한 지식 수집 자체를 좋아한다. 오랫동안 관심을 둔 분야는 미술과 음악이다.  아무래도 미술은 유년기에 전시를 본 경험이 크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체험형 전시도 딱히 없었고, “오늘 놀자” “미안. 엄마랑 미술관 가.”라고 말하면 다들 기함했다. “미술관에 왜?”라고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현대화랑, 국제갤러리 전시를 봤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한 달에 한 번은 갔다. 이중섭의 전시는 지금까지도 꽤 많이 했지만,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는 담배 은박지에 그려진 그림이 슬프게 보였다. 돈이 없던 그에게 묻어나는 절박함, 잃지 않은 희망과 사랑이 대단해보였다.

 모빌의 창시자라는 알렉산더 콜더 작품도 봤다. 현대화랑에 전시되었을 때였다. 사실 “와 크다”라고 생각하고 끝날 전시를 인상 깊게 만든 건 사건이 생겨서였다. 작품을 만지는 건 안 된다고 적혀져있자, 한 커플이 모빌을 향해 바람을 분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뻗어난 모빌은 작은 입김에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빌의 구조가 엄청난 균형을, 건축적임을 알았다. 그 모든 경험이 모여 그림을, 더 나아가 전시를 보는 걸 즐기게 만들었다. 나의 엄마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물어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명화라고 다 좋아야 한다는 인식도, 전시를 통해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재밌는 점은 전시도 오래 보다보니 기획에 관해서도 파고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작품에는 조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 외에도 설명에 관한 문장력과 가독성 역시도 중요하기에 매번 곱씹는다. 때론 전시의 타이틀과 준비하는 품도 생각해보곤 한다. 최근 한국에서 봤던 가장 좋은 전시는 ‘데이비드 호크니’전이다. 이 전시는 호크니 미술관과의 협업을 통해 몇 년 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흔히 전시의 마지막은 뮤지업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노루페인트와의 협업을 통해 가벽을 세워 몰입을 최고로 높인 이 전시는 의도적으로 뮤지엄샵을 숨겼다. 뮤지업샵을 찾아서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나오면 벽을 하나 마주한다. 거기에 엔딩 크레딧처럼 모든 사람의 이름이 있다. 주무관부터 시작해서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이름은 이 전시를 위해 노력한 모든 이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것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글은 몇 번이고 다시 쓴 글이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솔직히 구독을 부르는 글은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 나라는 사람이 매력적이라는 건 만나봐야 알 수 있고, 글로는 웃기는 재주도 없는데. 내가 갖고 있는 건 글에 대한 진심과 최선, 책임뿐이다.

 중학교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를까. 나는 종종 공감을 부르는 글이야말로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살다보면 우리 기억에 남은 글은 문학이 아니다. 뉴스 기사의 댓글, 커뮤니티를 통해 퍼진 일화 등등. 비속어가 난무하고 줄임말이 있어도 필력이 죽여주는 그 글의 생동감은 잊히지 않는다. 문학은 결국 현실에서 기반을 둔다. 단순히 잘 다듬어지고 매끈한 글이 좋은 글이 아니다. 정말 좋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 줄 알아야 한다. 작가로 다양한 글을 쓸 수 있는 나는 원하는 면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글 속에서 다루고 싶은 순간이다. 그 시간을 소중히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영감을 주길 바란다.

 덧,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일간이슬아’를 쓴 이슬아 작가에게서 뻗어져 나왔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에게 ‘아무도 청탁하지 않았지만 쓴다’라는 슬로건으로 프로젝트를 시행한 당돌함, ‘창작자’의 노고에 관한 당연함을 깨줘서 고마움을 전한다. 현재 뉴스레터 발행을 하는 작가들에게 따로 자신에게 사용을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다. 이슬아 작가가 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유려하고 세련된 방식을 보여준 덕을 내가 보고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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