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하여

지금을 읽고 싶은 사람들의 미디어 이야기, 어거스트

안녕하세요. 오늘의 에디터 Friday입니다.

 날이 차갑다가 따뜻했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아프기 딱인 계절입니다. 저도 독한 감기를 이겨내고 겨우 살아났습니다.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고작 몇 주 아팠다고 늙음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니까요 글쎄. '나이가 들면 이거보다 더, 여기저기 다 아프겠지...?' 하면서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할머니가 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미디어가 잘 다루지 않는 '여성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그 척박한 토양에서도 싹을 피운, 소중한 작품들과 함께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오늘의 에디터 : Friday
솔직한 걸 좋아합니다. 적당한 선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1. 여성 노인의 성과 사랑을 다룬 작품들
2. 조금은 감정적이고 두려운 이야기

💋  여든 살의 섹스 라이프 : <그레이스 앤 프랭키>

  여러분, 잠깐 딴 소리 좀 할게요. 그런 날 있잖아요, 세상이 나를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것 같은 날. 그럴때 어디로 도망치세요? 저는 좋아하는 미드 에피소드 하나를 틀어놓고 생각 없이 초콜릿 케이크를 퍼먹습니다. 보통 내 상황이 드라마 속 펼쳐지는 상황보다 광활할 리가 없기 때문이죠. 쉼없이 사고치고 말아먹는 주인공을 보며 '내가 쟤보단 낫지' 라는 표정으로 실컷 낄낄거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뻔하디 뻔한 갈등-해결의 반복되는 구조를 보고 있노라면 '아 나도 문제를 피하지 않고 당당해지면 전교생 앞에서 술주정을 해도 Queen B가 될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 미드가 '프렌즈'였다면, 지금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앞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요절복통 시트콤 그 자체입니다. 2015년 5월 시즌 1이 방영되어 시즌 6까지 나왔고, 시즌 7이자 마지막 시즌만을 남겨둔 상태입니다. 참고로 현재 시즌 7 에피소드 4개는 선공개되었고, 나머지 12개가 2022년에 공개된다고 하네요. 저도 아직 끝까지 보지 않았고 야금야금 아껴 먹고 있는데요, 끝이 난다니 벌써 아쉽네요.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서로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그레이스(제인 폰다)와 프랭키(릴리 톰린)는 남편들인 로버트(마틴 신), 솔(샘 워터스톤)과 저녁 식사를 하다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습니다. 둘 다 당신을 떠나겠다고, 이혼을 요구한 것이죠. 밥 먹다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어이없는데 거기에 갑자기 둘 다 커밍아웃을 합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말하죠, 사실은 우리 20년 동안 사랑하는 사이였노라고. (?!) 40년 넘게 자식들도 함께 결혼생활을 했던 두 여자는 큰 충격을 받죠. 지금까지 단순히 사업 파트너 사이인줄 알았던 두 남자의 출장이 밀월 여행이었다니.... 벙쪄있는 그들에게 날리는 마지막 펀치. "남은 인생을 나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어."

 드라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닷가 별장을 찾은 '상극'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면서 점점 소울메이트가 되어갑니다. 초반 설정도 매우 신박했지만 이 드라마가 특별한 점은 노인의 사랑, 특히 여성 노인의 사랑과 성을 다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힐끗 대는게 아니라 70대의 나이로 시작해 시즌 7까지, 80대가 되어버린 노년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극을 이끌게 합니다. 주인공들은 버림받았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짱짱하고 화끈하게 이혼 후의 삶을 삽니다. 그레이스는 인터넷 데이팅으로 새로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고 커리어 코치라는 새로운 적성도 발견하게 됩니다. 자유로운 히피 프랭키는 질 건조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을 위한 천연 마 윤활제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죠.(그 와중에 마 농부와 연애도 하구요)

 지나치게 미국적인 요소일 수도 있지만,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고 동성 결혼을 한 로버트, 솔과의 우정도 잃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고 그들을 위해 싸워주죠. 젊은 이들과의 대립에서도 나이 든 노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기술적인 것들을 맡기고 물어보기 보다 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지죠.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나이가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이 머리를 맞대면서 연애 고민을 털어놓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첫 섹스에 설레하고,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나의 일을 위해 울고 웃는 그 모습이 말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할머니'라는 존재는 자애로운 무성욕자에 취향과 사생활도 없는, 그런 존재였는데 이 드라마는 그런 관념을 환기시켜줬습니다.

 💎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 : <빛나는 순간>

 두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고두심, 지현우 주연의 영화 <빛나는 순간>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 소개되었을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갸우뚱하게 했어요. 70대 해녀와 30대 다큐멘터리 남자 PD의 사랑 이야기라는 설명 앞에 '파격', '금기' 라는 단어가 빼놓지 않고 들어갔죠. 저도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과연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거지? 의구심을 잔뜩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점을 잘 못 뒀더군요. 어떻게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보게 되었나 보다,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상처를 서로가 보듬어 주면서 어떤 교감을 했는지를 봤어야 하는 거였죠.

 둘이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해녀의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는 PD 경훈(지현우)은 촬영을 거절하는 해녀 진옥(고두심)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친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같이 일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서로에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닫죠. 알고 보니 해녀 진옥(고두심)은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잊고자 물질을 하고, 경훈(지현우)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서로의 상처에 눈이 뜨죠. 두 사람의 나이 차는 확연했으나 영화는 나이와 성별 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받는 과정을 주목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파도처럼 잔잔하게 그저 '사랑'을 다루고 있었건만, 고백하자면 저는 마음이 참 어색했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그림'이었기 때문이죠. 나이차가 거의 40살, 그리고 어딘가 생경한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의 키스신... 그래서 반대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키스신을요. 조금 다른 의미로 유쾌하진 않았으나 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깨달았죠. 할머니는 청년을 사랑할 수 없는 줄 알았어요.

 영화 속 진옥은 누가 봐도 사랑에 듬뿍 빠진 풋풋한 영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나시나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도망치고 싶거나, 그 사람만 생각나서 잠을 못 이뤘던 적은요? 사람마다 추억은 다르겠지만 이 영화 끝에 깔리던 아이유의 <밤편지>의 가사만큼이나 달콤하고 아릿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나에게 그대란 행운이 온 걸까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또 그리워 더 그리워
나의 일기장 안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띄울게요
좋은 꿈이길 바라요

🍁 늙음은 죽음이 아니다 : <69세>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영화 <69세> 중에서

 때로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인정해줘야만 슬퍼할 수 있다면,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깊어질겁니다. 제가 소개하는 세 번째 작품, 영화 <69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69세 효정(예수정)은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다가 29세 남자 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이를 같이 살던 동일(기주봉)에서 알리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나이를 듣고 코웃음 치죠. 그리고 간호조무사인 피의자가 '친절이 과했네'라고 한다거나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도 범죄보다 기행이라고 보는 시선이 강했습니다. 법원도 '젊은 남자가 나이 든 여자를 성폭행했을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피의자의 정액이 묻은 증거도 있었고 거짓말 탐지기 검사에서도 유리한 위치였던 효정은 결국 외로운 싸움을 이어갑니다. 

성폭행 자체도 끔찍한 일이었으나, 사람들의 말이 효정을 더 아프게 합니다.

할머니 수영을 열심히 하셔서 그런지 뒤에서 보면 처녀 같아요
그러게 조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나이에 비해 옷을 잘 입으시네요
내가 할머니 좋으라고 해줬잖아

 젊은 남성이 노인을 성폭행했을리가 없다는 시각과 위의 말들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여성 노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경찰청에 따르면 2015년부터 5년 사이 노인 대상 성범죄가 44.2% 늘었다는데, 여기에 카운트되지 못하고 스스로 입을 막아버린 사건들은 얼마나 많을지 셈도 잘 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100분 정도로 짧습니다. 생각은 자꾸 길어집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효정의 동거인이었던 동인이 외치는 말이 계속 맴돕니다. 효정의 사건으로 편의점에서 정신 없이 라면을 먹다가 급히 일어나버리는 바람에 동인은 먹던 자리를 치우지 못합니다. 이를 발견한 알바생은 동인에게 다 들릴만큼 짜증을 내고, 동인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나라에 어디 분리수거해야 할게 쓰레기 뿐이냐"
"넌 안 늙는줄 알어??"
  앞서 소개해드렸던 단비같은 작품들도 있지만 사실 미디어에서 '여성 노인'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아요. '혼자 자식들을 키우느라 몸이 상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노모' 혹은 '허영심 많고 자기 자식만 끼고 돌며 기싸움을 하는 청담동 시어머니'. 거의 크게 이 두 카테고리죠. 그래도 요즘 자신의 커리어에서 활약하는 중장년층 여성을 보며 힘을 얻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만, 가끔은 이 모든게 모래성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멋지고 세련된 할머니만 될 순 없는거잖아요. 저도 늙지 않는 팽팽한 피부와 티 안나는 명품으로 부내가 나는 할머니(밀라 논나 같은)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이룬 것 하나 없이 그저 늙어가기만 하면 어쩌죠? 사실 어느 쪽이든 '건강히' 늙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인데 말이죠. 과연 늙은 나를 품는 사회의 눈은 어떻게 변해갈까요. 뭘해도 촉망받던 유년 시절, 처음 보는 사람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젊은 시절, 악착같이 커리어를 쌓아가는 장년을 지나 노년의 나는 사회에서 어떤 존재일까요? 제거된 욕구는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까, 괜히 의식의 흐름 물음표만 많아집니다. 괜히 늙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멋대로 고쳐서 다시 해봅니다. '늙은 여자의 손은 거칠면서 부드럽고, 생명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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