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오리진 편지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 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삶의 사용 설 연휴 잘 쉬셨는지요. 이번에 처음으로 화상 명절을 지내봤습니다. 여러 곳에 떨어져 사는 형제자매들이 줌으로 연결해서 서로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누고 웃음꽃을 피운 거지요. 나쁘진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기술과 점점 결합되어 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오드리 탕이라는 인물과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작은 책을 쓰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아 읽으며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오드리 탕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만, 우선 기술을 통한 새로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조금씩 실현해 가고 있는 사례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녀가 추구하는 방향인 다원성의 격려와 실현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나누는 공적인 것에 대한 정직한 관심과 헌신적인 태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나면서부터 심장에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감정이 조금이라도 고조되거나 흥분을 하면 위험할 정도였다지요. 그래서 일찍부터 고전을 읽고 명상과 기공 같은 것도 익혔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불안한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그 무렵에는 밤에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또 하루를 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나중에 수술을 거쳐 심장의 결함이 치유된 후에도 그때 생각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롭게 주어진 하루 동안 나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많이 단조로워진 듯합니다. 축소된 일상의 반경에 답답해 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인내만 요구되는 무력감 속에서 기술의 변화는 속도를 더해가고 관련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에 관심이 쏠리며 처지에 따라 열광과 부러움과 불안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을 잘 가누기 위해서라도 읽고 생각하는 정신 간의 소통과 교감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라도 메일을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3년 전 작고한 미국의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산문집이 최근에 번역되어 나와 그중 일부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르 귄은 예전에 어릴 적 일화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류학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서재에서 자주 읽던 책이 있었습니다. 노란 천에 붉고 푸른 문양이 들어간 표지의 책이었지요. 어느날 호기심에 펼쳐 보았더니 안의 내용은 더 놀라웠습니다. 이상한 문자들이 적혀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그 책에 어떤 대목들을 표시까지 해가며 탐독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물었더니 내가 죽었을 때 들려줬으면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장례식 때 그렇게 했다지요. 자신도 그 책에 심취해 직접 영어 번역까지 했습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었습니다. 책에 담긴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서도 그전까지 작가들 사이에 일반적이었던 선악의 대결보다는 경쟁하는 힘들 간의 균형을 추구했지요. 그녀는 평소 문학의 쓰기와 읽기를 통한 인간의 상상이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를 헤아려 볼 수 있게 하고, 그 결과 보다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은 그녀가 2002년 오리건 문학 예술 모임에서 한 '사용 설명서'라는 제목의 강연 일부입니다. 읽기는 귀 기울이기의 한 방법입니다. 그냥 듣기나 보기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 여러분이 하는 행동입니다. 끊임없이 알아들을 수도 없이 지껄이고 외쳐 대는 매체의 돌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도대로 읽는 겁니다. 여러분을 압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빠르고 거세고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당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강매를 당하지는 않지요. 읽을 때는 보통 혼자라 해도 다른 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합니다. 세뇌를 당하거나, 조작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닙니다.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하는 거지요. 우리의 매체들이 어째서 예전의 사회에서 극장이 자주 만들어 내곤 했던 것과 비슷한 상상력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를 못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대부분 매체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매체들이 광고와 이윤 추구에만 너무 지배당한 나머지, 그 속에서 일하는 가장 뛰어난 사람들, 진짜 예술가들마저도 팔아 치우라는 압력 앞에서 저항을 해도 끝없이 쏟아지는 장난감들과 사업가들의 탐욕에 익사하고 말 지경입니다. 그나마 문학은 상당수가 그런 조작에서 자유로운 것은 많은 책들이 죽은 사람의 작품이고, 죽은 사람은 정의상 탐욕스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출판사야 비열하게 베스트셀러를 추구할지 몰라도, 살아 있는 시인과 소설가 다수는 이득에 대한 욕망보다는, 그럴 여유만 있다면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해도 계속할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에 더 이끌립니다. 그 일이란 예술입니다. 뭔가를 잘 만들고, 제대로 만들고 싶은 거지요. 문학은 아직 놀랍게도 비교적 정직하고 신뢰할 만하답니다.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눈 문학이야말로 사용 설명서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입니다. 르 귄은 같은 책에 실린 다른 강연문에서 언어의 '가장 오래되고도 절박한 기능'을 두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정신적 재현"을 만들어 내어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우리가 무엇을 기릴 수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한 주를 기원합니다. 북클럽 오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