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중독사건에서 산업보건전문가의 윤리
-11호-
오늘 오이레터는 세척제 급성중독사건에 관한 윤리적 쟁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22 트리클로로메탄 중독사건의 초기 대응 상황에 관하여는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에서 주최한 “2022 03 17 의사회 1 세미나: 트리클로로메탄 중독 사건의 경과와 의미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붕괴되실 뻔한 적이 있었나요?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박찬욱헤어질 결심 )


“그러나 위대한 사람도 때로 위대해 보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미천한 사람도 때로는 위대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한번의 ‘행동’은 한번의 행동일 뿐입니다. 그것이 부정적인 행동이든 긍정적인 행동이든 우리는 그저 개별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계속 자신의 가치를 향해 걸어나갈 뿐입니다. 그것이 수용-전념치료에서 말하는 ‘품위’입니다.”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 중)



산업보건전문가의 윤리


산업보건의 일차적 목표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조성하고, 노동자의 노동능력과 고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산업보건 전문가는 전문적인 역량을 갖고 이러한 목표를 추구해 나갑니다. 그런데, 전문가 윤리란 이 목표를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애물을 만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법은 법과 규제를 새롭게 만든다고 해서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하죠.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답을 얻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중독사건의 발생, 그리고 두 가지 정보


2022년 트리클로로메탄 중독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원파티마병원의 이현재 선생님(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은 소화기내과 전문의로부터 한 명의 환자를 의뢰받습니다. 간염으로 치료하여 호전되었으나, 업무에 복귀한 후 다시 악화되어 온 환자였습니다. 이현재 선생님은 환자가 세척작업에 종사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세척제로 인한 독성간염일 가능성을 의심하였습니다. 환자에게 세척작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환자의 입장을 배려하여, 환자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나중엔 사업주와도 통화를 하였으며, 문제해결을 위해 언제든지 자문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사업주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관계당국에 신고하는 것을 유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사업장이 대책을 마련하였다는 소식이 없었고, 상담했던 노동자는 연락이 두절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치를 하면 좋을까요?


여기, 두 가지 정보가 추가로 확인됩니다. 이 정보는 서로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 작업환경측정팀을 통해 알아본 결과, 유성케미칼로부터 공급받은 세척제의 MSDS 상 '1,2-디클로로에틸렌'이 있었습니다 . 이 물질은 간독성이 가능할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성분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작업환경측정결과에서는 노출기준이 초과된 경우는 없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나중에 트리클로로메탄이 MSDS에 누락된 것을 알게 됨)
  2. 타 특수건강검진기관 전문의 선생님으로부터 해당 사업장의 직원 4명과 협력사 직원 3명이 일반건강검진 소견에서 높은 수준의 간수치 상승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달받았습니다.



산업보건전문가를 위한 윤리강령 중 ‘개선사항에 대한 추적’


2015년에 발표된 ICOH의 산업보건전문가를 위한 윤리강령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건강과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도, 위험제거나 문제해결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거부하거나 주저한다면, 산업보건전문가는 결정권을 가진 고위경영진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분명하게 서면으로 우려를 전달하여야 한다. 또한 적절한 과학적 지식을 고려하고, 노출 제한을 포함하는 관련 건강보호기준을 준수하도록 강조하고, 법률과 규정을 지키고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할 고용주의 의무를 상기시켜야 한다. 필요한 경우, 노동자와 그들의 대표에게 알리고, 관할 당국에 연락을 취해야 한다


산업보건전문가를 위한 윤리강령 3판


위의 글처럼, 이현재 선생님은 ‘결정권을 가진 고위경영진’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분명하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사업주의 개선조치는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긴급하게 직업환경의학센터 회의를 열고, 산업안전보건공단과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기로 결정합니다. 관계당국에 신고를 한 것은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지만, 유사한 노출이 있을 수 있는 제 3의 사업장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관계당국에 신고하기 전 검토할 사항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안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떄문에, 다양한 사례를 통해 검토되어야 합니다. 위의 모범적 사례는 관계당국에 신고하기 전에 산업보건전문가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타 분야 전문가나 동료 전문가로부터 정보와 자문을 구하기
  2. 건강피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기
  3. 결정권을 가진 사업주에게 문제점과 개선조치에 대해 명확하게 전달하기
  4.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 해법을 결정하기
  5. 사업주의 개선조치 이행여부, 추가적인 피해노동자의 발생가능성을 검토하기



산업보건에서 자율성 존중의 원칙


산업보건에서의 개입은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자율성(Autonomy)은 자신의 가치와 믿음에 의해 선택하고 행위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관계당국에 알려짐으로써 사업주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것에 압력을 받아, 중독사건의 공개를 꺼려합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자율성이 침해받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죠. 따라서 노동자의 의견을 따라 필요한 조치를 주저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 3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선행의 원칙(beneficence)’에 따른 개입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만, 노동자와 사업주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여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보고와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의 한계 속에서


직업환경의학전문의와 산업위생전문가는 근로자건강검진과 작업환경측정을 일상적인 업무로 수행합니다. 법으로 정해진 바에 따라 평가를 시행하고, 비용을 받습니다. 정해진 것 이외에는 비용을 주지 않습니다. 이는 법적인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신호가 됩니다. 그러나 검진과 측정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고 오류와 편향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 산업보건의 목표를 달성하기에 부족하죠.  반면, 산업보건전문가들은 사명감만으로 정해져 있는 항목을 초과하여 검사를 하거나, 매번 모든 상황에서 오류와 편향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점검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해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트리클로로메탄 중독사건이 확인된 이후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는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여, 중독사고가 어떤 조건과 맥락에서 발생하였는지를 공유하였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보다, 유형과 패턴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 효율적이므로 '사례공유 세미나'는 측정과 검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법과 규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실천적 해법의 모범적 사례로 기록될만 합니다.


산업보건전문가의 윤리


우리나라의 사회적 규범은 주로 법의 영역입니다. 서구사회는 근대적 시민의 자율성에 기반하여 사회적 규범이 형성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식민지지배를 받은 후 상당기간 동안 국가주도의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산업보건영역에서 자율규제에 대한 논의가 오랜 기간 이루어져 왔으나, 자율규제에 대한 신뢰가 낮은 이유는 시민의 자율성에 대한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의한 규제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시민의 자율성에 기반한 윤리에 달려 있습니다. 산업보건 영역에서는 산업보건전문가들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윤리가 자율규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맺음말


수사를 한번 망쳤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습니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계속 자신의 가치를 향해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품위를 느낍니다. 앞으로도 산업보건전문가들이 다양한 회의와 모임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법을 꾸준히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글쓴이: 송한수 (오이레터 편집인, 대한직업환경의학회 윤리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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