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tter from London
A Letter from London
Letter#6
2020.5.16

p5로 커서 이미지 바꾸기 연습 중
세상이 멈췄다는 것을 지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창밖의 고요함을 들었을 때, 잠옷을 입은 채로 뒷마당에 나가 중천에 뜬 해를 쳐다볼 때. 소음에 찌들고 모니터 빛으로 광합성을 했던 도시 인간에게는 거짓 같은 순간들.

쨍 – 시야가 흐려지 몸이 휘청. 눈을 한 번 껌뻑 뜨고 꿈이 아닌 현실임을 확인합니다. 치열하게 빨라지고 커지고 복잡해지는 세상에 묶여 헉거리고 끌려다니다 스스로 걸어가려니 뭐가 뭔지 싶어 눈치를 봅니다. 시간이 멈추는 것은 SF영화 속에나 존재하리라 생각했지만 내가 그 멈춘 세계의 점 하나가 되었습니다. 테크놀로지의 과도기와 SNS 혁명도 모자라 코로나까지 겪은 밀레니얼은 앞으로 2차 세계대전 세대가 그랬듯이 오 십 년은 족히 라떼토크를 하는 꼰대로 늙어가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강제로 일시 정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시대의 인간들은 멈추지 못하고 밀린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플랫 메이트는 20년 동안 하고 싶었던 ‘집에서 요가 하기’를 실천 중입니다. 나는 요가를 20년 동안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면 그냥 하기 싫었던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고 그녀는 이 좋은 걸 왜 이제 했을까 라며 딴소리를 했습니다. 나는 코딩을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번 겉만 핥다가 덮어두기 일였는데 이번에는 p5라는 아주 쉽고 재밌는 프로세싱 언어를 마스터하기로 합니다. 삼 주째 응용을 전혀 못 하고 있지만, 실력이란 자고로 계단식으로 느는 것이라고 힘을 내봅니다. 플랫 메이트와 나는 오 개월 동안 방치한 정원의 잡초도 뽑고 잔디도 심고 세 배로 비싸게 주고 산 흙으로 분갈이도 했습니다. 그동안 이 집에 들어온 화초는 선인장류를 빼고 모두 죽었지만, 락다운 이후로 넘치는 관심을 받고 쑥쑥 자라나는 남겨진 식물에 대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 대화합니다.

내일은 80% 할인으로 산 20권의 ebook을 읽기 시작하고 거북목과 비뚤어진 척추를 위한 스트레칭도 아침저녁으로 하면서 한 편도 못 봤다고 말하기 민망했던 르누아르의 영화도 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사실은 이 생각을 한 달 전에도 했는데 아직 하나도 못 했습니다. (플랫 메이트에게 한 질문을 나에게 해봅니다. 여태 하지 않았다면 하기 싫은 게 아닐까?)

시간이 없다 핑계가 비겁한 변명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많은데 왜 시간이 없을까. 모순적인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이쯤에서 시간이 없는 이유를 기발하고 시적으로 풀어내 마무리 짓고 싶지만 어떤 논리도 앞뒤가 맞지 않아 매우 난감합니다. 코딩 공부로 훈련 중인 논리적인 사고로 크리티컬 띵킹이라는 것을 해보아도, 시간에 대한 논문을 쓸 때 씹어 삼켰던 사상가들의 시간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고찰을 대입해보아도 아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시간을 많다, 적다, 없다 같은 질량으로 표현하는 것을 멈추고 속도나 색깔 혹은 촉감 같은 것으로 말해야 맞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가 어떤 것도 튕겨내는 고무 같기도 한 시간의 성질을 양이라는 납작한 차원의 언어로 가두는 것이 모순인 것일지도
컴퓨팅을 재료로 작업하는 Yuri Pattison이 공유한 온라인 프로젝트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수평선은 실제 해의 위치와 연동해서 색과 온도가 바뀝니다. 모두의 창문인 컴퓨터 스크린에 뛰어두고 방구석에서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해돋이를 볼 수 있습니다.

Lydia Ourahamane는 어린 작가이지만 작품의 대담함과 깊이가 오래 뇌리에 남는 작가입니다. 코로나 이후 Chisenhale에서 공유하는 작품 시리즈를 위해 잠을 잘 오게 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사운드의 치유 능력에 관심이 많은 작가답게 하루 동안 나도 모르게 생긴 상처들이 조용히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드는 사운드입니다.

히토 슈타이얼과 하룬 파로키의 전시가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았고 얼마 전 전시가 온라인으로 옮겨 왔습니다. 21세기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두 작가의 전시를 집구석에서 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봅니다. Life Captured Still. 절묘한 전시 타이틀입니다.

저번에 공유한 thislongcentury를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400번째 아티스트 아카이브가 소개된 것을 기념해 작가들이 직접 만든 플레이리스트가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 틀어주는 사운드에 몸을 맡기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추천합니다.

Werner Herzog는 언제 어디서나 농담도 진담도, 억지 논리도 숭고한 지헤도 모두 진심으로 진지하게 필터 없이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웃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뉴욕 매거진에서 뜬금없이 인터뷰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 인터뷰는 정말 재밌고 신랄해서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번역이 필요하다는 리퀘스트가 있다면 번역을 해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Is anything cute to you? Have you ever seen a dog and thought, That’s a cute dog? 
WH: No. I would assign a dog a different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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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곡 여섯 번째

연극 시라노 베르주라크의 러브레터의 대목입니다.
나는 당신을 목표로 하고,
당신을 열망하고,
당신에게 글을 쓰고, 당신을 위해 쓰고, 당신에게 썼던, 당신에 대해 썼던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나는 당신을 위해 나를 불태우고,
당신을 숭배하고, 당신을 벗기고, 옷을 입히고, 소매의 가장 작은 단추를 채우고,
손목을 붙잡고, 목을 끌어안고, 당신 뒤에 입을 맞추고, 다시 손목을 감싸 쥡니다.’

배우의 독백으로 만들어지는 장면은 애절한데요,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보셨나요?
오늘은 용기를 내야해, 후회하지 않게고백 하라고 말해주는 노래입니다.


From DJ나경..

A Letter from London Archive 에서 지난 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박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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