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첫 뉴스레터를 발행합니다.
이번 호 필자이기도 한 박인규 선생님이 번역한 <워싱턴 룰>에서, 저자인 앤드루 바세비치는 압도적 군사력을 통한 미국의 세계패권은 미국인들에게 입증을 요하지 않는 ‘신념’인 ‘워싱턴 룰’이지만, 언젠가는 미국민도 너무도 많은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고 수 조 달러의 재정적자가 쌓인 이후에 이를 의심하면서 그것의 개정을 요구하는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 날이 온 걸까요. 박인규 선생님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보다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문제 해결을” 내세우면서 당선된 이번 미국 선거의 맥을 짚어주셨습니다. 이 글이 다루고 있는 시기의 한 복판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살고 있는 김성숙 작가는 지난 호에 이은 2부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민주당은 노동자와 중산층의 지지를 “빼앗긴” 걸까, 70년 계속된 미국 패권의 후과를 교정할 기회로 미국민은 어떤 선택을 한 걸까, 두 필자는 대립된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서 교차점이 생기는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일년 반 여 시간동안 류희림 방심위란 괴물조직 속에서 그 회오리에 ‘내가 왜 두 번의 내부고발자로 살고있나’를 담담히 써준, 리영희와 만날뻔 했으나 의자만 정리해놓고 술마시러 갔던 탁동삼 방심위 연구위원의 글을 싣습니다.
뉴스레터 1호에 리영희와 <세카이>지에서 대담을 나눴던 후기를 써 준 야마구치 이즈미 선생님이 <주간 금요일>에 실린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번 한국에서의 계엄사태를 살아내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야마구치 선생은 80년 광주에서의 7일을 떠올립니다. 다음은 그 일부.
제68신
"그 일주일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네요. 그야말로 ‘백일몽’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1990년대 초, 광주에서 만난 어린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고향인 광주에서,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군사 독재에 저항한 시민 봉기와 해방구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그는 그 기억 속에서 결연한 눈빛을 띠며 먼 곳을 응시하곤 했다.
전라남도 도청에서 시민군이 관리하던 그곳에, 계엄군 공수부대가 들이닥쳤다.
"중학생은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고 살아남은 그는,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5.18" 체험자였다.
그는 후일 병역 이야기를 꺼내며 "M16? 그거 다루기 쉬운 총이에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응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알게 된 광주 시민 공동체의 경험자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그 7일과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은 내 인생에 없다"고.
그 기적이 같은 나라에 다시 나타났다.
12월 3일 심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 선포 이후 군이 봉쇄한 국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가진 것 없이 달려가, 저지선을 넘고 담장을 넘어 국회 의사당으로 들어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190명의 국회의원을 지켰다.
그들은 군과 경찰에 맞서 마지막까지 국회를 지킨 시민들이었다.
적외선 야간 투시경과 돌격 소총으로 무장한 특수부대 병사들에게, 시민들과 보좌관들은 소화기를 뿌리며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부끄럽지 않나요?"라며 병사들을 꾸짖은 더불어민주당 여성 대변인.
주변의 기자와 시민들도 다수 있었던 그 상황은, 아마도 역사적 운명을 받아들이는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선하고 숭고한 존엄이, 그곳에 달려간 사람들의 수만큼 확장되고 드러나는 광경.
그들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생사를 초월한 "연대"이다.
돌이켜보면, 일본에서는 "계엄령"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국회를 열 기개를 가진 의원이 얼마나 있을까?
이 차이는 사람들이 자신답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이며, 즉 천황제를 병원체로 하는 사고의 정지와 주체성 상실의 문제인 것이다.
"계엄령이 발효되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라는 척하며 비웃는 이들은, 다층적으로 뒤틀린 우월의식에 휩싸인 자신의 뇌 속 깊이 박혀 있는 "천황제 계엄령 칩"의 위치를 탐구해 보길 바란다. |